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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07)화 (107/300)

달의 황홀경

107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릴 테니 필요한 게 있거든 말씀하시옵소서.”

장지문 앞에 도착한 주 상궁이 뒷걸음을 치며 옆으로 물러났다.

“자네 정말 무슨 일인지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인가?”

“……송구하옵니다.”

“일단 알았네.”

꺼림칙한 표정을 애써 숨기지도 않으며 이설이 장지문 앞에 섰다. 스르륵 열리는 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 뒤에서 주 상궁이 숨을 길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지만 어떤 때보다도 초조해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금군이 비은궁 앞마당으로 들이닥쳤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등 뒤로 문이 탁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웬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설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는 느긋하게 일어나 적당히 허리를 숙였다. 황궁 관리들의 관복이 아직 눈에 익지 않은 이설이지만 차림새를 보아하니 대충 약방이나 사의시에서 일하는 관리 같아 보였다.

“신 태부 손조익, 루 소의 마마를 뵙사옵니다.”

“…….”

“기별 없이 불쑥 찾아온 점 결례인 줄은 알고 있사오나 수차례 알현……,”

“결례이지요.”

이설이 길게 이어지는 말을 중간에 끊었다. 단호한 목소리에 상대를 향한 배려는 없었다.

희미한 기억조차도 없는 낯선 얼굴은 이름을 밝혔을 때 신원이 확실해졌다. 단 한 번 일면식도 없는 사내의 이름만 입궁 후 벌써 수십 번을 들었다. 끈질기게 알현 요청을 할 때부터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예상을 하긴 했다. 알현 요청이 뜸해진 이후로 경계를 늦췄던 건 제 불찰이다. 그리고 설마 주 상궁이 손을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설이 고개를 돌려 문밖을 바라봤다. 장지문 그림자로 주 상궁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긴 한숨에 오만 감정이 다 쏟아져 나왔다.

이설이 맞은편 자리에 앉는 동안 손조익은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였다. 준비된 찻잔에 찻물을 부어 반쯤 채운 후에야 이설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예.”

자리에 앉은 손조익이 두 손을 탁자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결례를 범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사과는 하지 않는다. 시선의 각도, 손의 위치, 표정, 앉은 자세까지. 딱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예의를 갖췄다. 하기야 기별도, 허락도 없이 먼저 남의 집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을 정도의 사람에게 뭘 기대할까.

“주 상궁은 태부의 사람입니까?”

먼저 여기까지 찾아온 주제에 말을 아끼고 있다. 설마하니 이설이 먼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얼굴이었지만 금세 표정을 감췄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 위에 가벼운 미소가 실렸다.

“주 상궁은 마마의 상궁이니 마마의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주 상궁은 제 사람이 아닙니다.”

“…….”

“그래서 누구의 사람인지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싱긋 마주 웃으며 이설이 찻잔을 들었다.

손조익을 견제하기 위해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내내 신경 쓰이던 궁금증 하나를 드디어 해소했다.

주 상궁에게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던 건 사냥대회 무렵이었다. 낙마로 이어질 뻔한 위험천만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말에 태워 사냥 대회에 참가시키려던 완고함이 의심의 시작이었다.

후에 주 상궁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곧 죽어도 기마만은 배우지 않겠다 이설이 고집을 부릴 것 같아서 강수를 둔 것이라 먼저 이실직고하였다. 그런 사고가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다며,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 한 것을 이설이 붙잡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주 상궁의 행동 하나하나가 수상쩍게 느껴졌다. 약방에 다녀온다며 가끔씩 혼자서 궁 밖을 나갔다 오는 것도, 식료를 조달해 주는 관리에게 다음에 받을 식료 목록과 함께 종이 한 장을 더 껴서 건네주는 것도 제 눈에는 모두 이상하게 보였다.

“마마께서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주 상궁은 신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하시지요.”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할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믿지 않는 티를 역력히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렇다 해도 그대를 내 허락 없이 여기까지 들인 이는 주 상궁이 아니겠습니까.”

“고집 센 노인네의 부탁을 거절 못 한 상궁을 너무 꾸짖지만은 말아 주시옵소서.”

“제 아랫사람에 대한 훈육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태부의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마마의 사람이라는 데에 여부 있겠습니까.”

쓸데없이 날이 섰나 문득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자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일 필요는 없었다. 황제가 경계하라 엄포를 놓은 사람이다. 황제에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얘기나 나누자고 변복까지 하고 찾아온 건 아닐 테니 긴히 찾아온 연유부터 듣고 싶습니다.”

제 관직도 아닌 관복으로 변복까지 하고 온 걸 보면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수차례의 알현 요청 거절 후에도 남의 눈을 피해 찾아와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제 당사자에게 직접 들을 때가 됐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손조익이 의자를 당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마께서는 본래 황후가 되셨어야 할 분이셨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소문에 밝으신 분이셨나 봅니다.”

“궁에만 있다 보니 소문에는 그리 밝지 않습니다. 입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폐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일입니다.”

당황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이설을 보고 손조익이 멈칫했다. 설마하니 이 사실을 황제에게 직접 들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턱 주변을 한참 동안 문지르던 손이 다시 깍지를 끼고 탁자 위에 놓였다. 의도적으로 긴장되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듯한 손조익의 행동에도 이설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식은 차만 홀짝였다.

“그 자리가 탐나지 않으십니까?”

“황후 말입니까? 전혀요.”

일부러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얼떨결에 코웃음을 크게 쳤다. 후궁의 자리도 버거운 저에게 황후라니, 택도 없는 소리였다.

“마마께서는 폐하와 천명으로 맺어진 반려이십니다. 마마가 아니시라면 금국의 황후 되실 분이 누가 계시겠습니까?”

손조익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설은 손조익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태자의 외조부라고는 하나 닮은 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태자의 친모였던 혜서 황후가 제 아비를 전혀 닮지 않았거나, 태자가 제 친모를 닮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왕이면 황후가 제 아비를 닮지 않았던 쪽이었으면 싶다.

이설은 아직도 누군가 자신을 ‘황제에게 이름을 준 정인’이라는 식으로 추앙을 할 때면 마음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아무리 우찬이 자신에게 다정하고 둘의 사이가 좋아졌다 해도 두 사람에게 정말 없던 하늘의 인연이 생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우찬에게는 이름이 있다. 우찬은 하늘 아래 제 인연은 없을 거라 딱 잘라 말했지만 이설은 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언젠가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우찬의 진짜 정인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불안함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모두 폐하의 결정이십니다. 폐하께서 제가 황후가 되는 걸 원치 않으신다면 저는 황후가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천명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황후는 저의 천명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마마의 이름을 가지신 이상 금의 황후는 마마의 천명이 되신 겁니다.”

이설은 최대한 온건하게 손조익을 구슬려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우찬의 계획도 모른 채 길게 얘기를 나눠 봐야 캐낼 정보고 없고, 혹여 말실수로 우찬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손조익은 이설이 황후에 오르지 않으면 천명을 거슬러 나라가 당장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완강했다.

찻잔을 거의 다 비웠다. 오랫동안 흙바닥에 앉아 있던 몸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천명을 얘기하셔도 폐하께서 바라시지 않는 한 저는 황후가 될 수 없습니다.”

“마마께서 바라신다면 폐하께서도 필시 들어주실 겁니다.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는 후궁 마마가 아니십니까.”

“그래서 지금 저더러 폐하께 베갯머리송사라도 올리라, 이 말씀이십니까, 태부?”

급기야 노골적인 언사를 넌지시 던지는 손조익에게 이설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장지문에 비친 그림자가 자리를 옮겨 반대쪽으로 섰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초조하게 그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실례되는 말씀을 했다며 거듭 사과하는 손조익을 보며 이설이 곧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사실 언성을 높일 정도로 기분이 상했던 건 아니었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한 지금 손조익을 어서 돌려보내려면 원래 제 성정대로 온화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겨우 화를 풀었다는 것처럼 이설이 보란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를 타이르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태부를 곧바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태부께서 태자 전하의 외조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마께서 태자 전하를 무척 어여뻐 하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예. 남달리 총명한 데다 저를 잘 따르시니까요.”

“마마께서 황후가 되시는 것만큼 태자 전하의 자리를 보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최후의 수를 던진다는 심정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딴에는 이설이 아끼는 태자를 들먹여 속에 든 감정을 살살 녹여 볼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내인 제가 황후가 된다면 폐하께서는 영영 적통을 볼 수 없으실 테니 말입니다. 누가 감히 태자 전하의 자리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오…….”

“다시는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일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태자 전하를 생각해 그냥 넘어가지만 제 관용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

“곧 폐하께서 오십니다. 이만 물러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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