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06화
“목이 아직도 뻐근한 걸 보니 꽤 잘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알아 온 일이나 말해라.”
별 싱거운 소리를 하는 차란을 보니 손조익이 당장 사달을 내려는 모양은 아니었다.
“서론은 평범하셨습니다. 태자 전하의 존체는 평강하신지, 글공부는 잘하고 있으신지, 다치신 곳은 잘 아물었는지 차례대로 물으셨습니다.”
그리 걱정이 되었거든 진작 태자를 찾아뵈는 게 도리였던 것을, 벌써 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뒤에 물을 건 또 뭔지. 아들에게서 본 직계 혈족이 아니어도 그렇지, 친딸이 남긴 하나뿐인 자식에 대한 정은 눈곱만치도 없다. 태자가 그나마 손조익의 관심을 얻을 수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태자라는 신분 덕분일 것이다.
“본론은.”
“동남 지방에서 명마(名馬)를 한 마리 데려왔는데 태자 전하게 드리고 싶다 하였습니다.”
“명마 한 마리에 제 수족들을 또 얼마나 딸려 보내려고.”
수작이 빤히 보인다. 노인네가 나이 먹고 아랫목에 오래 들어앉아 있다 보니 황궁 문턱을 너무 낮잡아 봤다. 황제 다음의 권력을 휘어잡았던 한 시절의 기억으로 터무니없는 과대평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로 노골적인 제안이라면 태자도 헷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태자는 뭐라 하더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냉큼 받겠다 하셨습니다.”
“뭐?”
황제가 눈을 부라리며 사납게 물었다.
“이번 도국과의 외교 친선에 손 가(家)의 이름을 대표하여 보내면 아주 적격일 거라 하시며, 굉장히 흡족해하셨습니다.”
“비차란 네 놈은 말을 하는 방식부터 고치거라.”
“예. 폐하께서도 부디 소신의 말을 언제나 끝까지 들으신 뒤 꾸짖어 주시옵소서.”
잠깐 태자에 대한 실망감이 생길 뻔했지만 역시 태자는 태자다.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재주가 어른 못지않다. 같은 상황의 이설이었다면 상대의 음흉한 속내는 냄새도 맡지 못하고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러 들어온 첩자들에게 삼시 세끼 뜨신 밥을 먹이지 못해 안달일 것이다.
“손조익이 정말 겨우 이런 얘기나 하려고 태자를 찾아왔다고?”
“예. 그 외에는 특별히 꺼낸 얘기는 없었습니다.”
“……헌데 네 표정이 왜 그리 어두운 것이냐?”
일말의 장난기도 모두 사라진 차란의 얼굴에 그늘이 깊었다. 고했다가는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 게 분명한 사안을 어쩔 수 없이 고하기 직전에 진 그늘이었다.
“물러가기 전 손조익이 태자 전하께 루 소의 마마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연이설의 안부를 물었다고?”
“예. 신하 된 자로서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게 도리인데 아직까지 만나 뵙지 못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자리 한번 만들어 달란 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그쪽도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뻑뻑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황제가 실소했다. 차란의 말을 부정하며 머리가 좌우로 약하게 흔들렸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에 반해 내리깐 눈동자의 온도가 차가웠다.
“손조익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아. 그자는 그저 지금이 연이설을 구슬릴 적기라고 판단했을 뿐이야.”
“그렇기는 합니다. 조만간 마마께서 황후가 되실 거라는 소문이 주안 바닥까지 파다하니까요.”
황제는 황궁과 주안 내에 퍼져 있는 이설에 대한 소문을 주기적으로 보고 받았다. 전에는 궁인들끼리만 쉬쉬하던 내용들이었지만, 지금은 주안 시장 바닥의 상인 중에서도 이 소문을 모르는 자들이 없었다.
여인 보기를 돌같이 하던 황제가 사내 후궁에게 미쳐 나라에 망조가 들기 직전이라고.
잠행을 나갔던 호위군이 떼어 온 벽보는 지금 모두 회수되었지만 인적 드문 어느 골목길에는 남아 있을는지도 모른다.
사실 황제는 그다지 개의치도 않았다. 여태껏 자신이 여인 보기를 돌같이 하던 것도, 사내인 이설에게 정신을 빼앗긴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그리고 황제가 사내 후궁에게 관심 좀 기울였다고 나라에 망조가 들 것 같았으면 진작 망하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례에 모인 신료들은 이따위 상스러운 벽보를 붙인 자들을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성화였지만 황제는 그 의견을 모두 묵살했다. 정황상 손조익이 할 법한 짓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깟 벽보에 흔들릴 민심도 아니었고 괜히 소동을 벌였다가 이설의 귀에 벽보 내용이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또 얼마나 송구스러워할지 눈에 선했다.
황궁 내 궁인들의 입단속은 철저히 시키고 있다. 이설이 알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찬은 요즘 이설의 어리숙하고 맹한 구석이 꽤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기가 찰 만큼 답답한 일이 생길 때도 있지만 적어도 그 멍한 눈이 저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그 파다한 소문을 연이설만 모르지.”
“폐하께서 아주 완벽한 본보기를 보여 주셨잖습니까.”
비은궁에 되먹지 못한 악행을 일삼았던 내섬시 관리들은 황명대로 아형에 처해졌다. 우장절이 끝나고 유독 더웠던 어느 날 궁인들이 오가는 길목에 보란 듯이 놓인 좁은 통 안에서 죄인들은 울부짖으며 서서히 죽었다.
황제는 제 궁에서 부정을 저지른 자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이 본보기는 부정뿐만 아니라 황명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말로를 보여 주는 완벽한 표본이 되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도망친 광흥창 관리 둘은 왜 아직 소식이 없느냐?”
궁인들의 녹봉을 야금야금 빼돌리다 꼬리를 밟히고 달아난 광흥창 관리 세 명 중 궁에 투옥된 건 한 명뿐이다. 아직 두 사람의 행방이 묘연했다. 사건은 일단락됐고 시간도 꽤 지난 일이지만 우찬은 그 일에 연루된 죄인들의 처벌을 엄격히 다룰 생각이다. 이상하게도 그 일은 최근 들어 곱씹을수록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래도 도국 북방 경계선을 넘어 도망친 모양인데 금군이 계속 뒤쫓고 있습니다.”
“무관도 아닌 사내 둘을 추포하는 데에 시간이 이리 오래 걸릴 일이냐?”
“도망치는 종적을 지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필시 도움을 주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도움을 주는 자들이든 받는 자들이든 연관된 자들은 모두 잡아들여라.”
“예.”
각 죄인들의 죄를 분류해 보자면 광흥창 관리의 부정부패로 이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것은 없었다. 관리들은 비은궁 궁인들의 녹봉을 가로챈 것이지 비은궁의 곳간을 털어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지금보다는 이설을 덜 아끼지만 기분은 내내 좋았던 그즈음 잡혀 들어왔다면 아형보다는 좀 더 곱게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황제의 자비로움은 한계와 기한이 있었다.
“그래서 손조익이 태자에게 이설의 안부를 물었고, 태자는 어찌 대답하였느냐?”
“태자 전하도 여간 보통이 아니십니다, 폐하.”
차란이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는 듯 실없이 피식 웃었다.
“마마께서 아직 금국 날씨에 적응을 하지 못하시고 내내 열병으로 앓아누우셨다 이제야 쾌차하실 기미가 보이니, 폐하 외에는 아무도 만나 뵙지 못하고 있다 하셨습니다.”
“태자가 그리 말했다고?”
“예. 눈 하나 깜짝 않으시고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이설이 창화군과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황궁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설은 요즘 황궁에 들어온 이래 가장 활력 넘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쩍 마른 몸에 제법 살이 붙었고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그러니 태자의 말은 거짓이다. 손조익도 태자가 거짓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손조익이 눈치챘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태연히 거짓을 말한 태자다.
태자에게는 늘 손조익과 척을 지지 말라 일러두었다. 적당히 어리광을 부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티를 내지 말고, 황제인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다.
태자가 여태 또래보다 영특한 것은 황제에게 유리한 조건이지만 이 사실을 손조익이 알 필요는 없었다.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한 이유는 아마 손조익이 괘씸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따금 드러나는 태자의 불같은 성미가 하필 그 순간에 터졌다. 경솔했다 탓하기에는 태자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우찬은 그 맹랑함을 야단치고 싶지 않았다.
“전하의 대답을 들으신 후 손조익은 바로 소봉궁을 떠나셨습니다. 아마 다른 곳은 들르지 않고 바로 퇴궐한 것 같습니다.”
보고를 마친 차란은 전처럼 실없는 소리로 시간을 때우는 대신 곧바로 물러갔다.
자리에 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조용히 생각해 보던 우찬이 고개를 젖히며 무겁게 눈을 감았다. 계획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제 손 위에서 통제되고 있다.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마음에 걸린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설을 향한 마음을 어떻게 계산해서 이 일에 끼워 넣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
“실력이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십니다, 마마.”
“조만간 만개한 능소화도 그리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비은궁 담을 따라 대문까지 걷는 길. 화구를 양손 가득 들고 쫓아오며 재잘재잘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해 주는 연화와 화홍을 앞서 걸으며 이설이 실룩이는 입술을 감췄다.
“거기까진 아직 한참 멀었지. 내 능소화는 바라지도 않으니 사군자 중 하나라도 제대로 그려 봤으면 싶다.”
“아유, 우리 마마는 욕심도 없으시지.”
까르르르 웃는 연화가 끙차, 하며 품 안에 화구통을 들쳐 올렸다. 도와줄까 물으니 고개를 저어 단호하게 거절한다.
창화군과 가암못에서 그림을 그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흙바닥에 비단 천을 깔고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도 뻐근하고 허리도 아프지만 기분은 좋다. 아니라 손사래를 치기는 했지만 사실 이설 스스로 봐도 제 그림 실력이 꽤 늘고 있는 것 같다.
소문대로 창화군은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능소화 그림을 보여 주는 것은 물론 그림을 배워 보고 싶다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하는 이설을 눈치채고 먼저 저에게 그림을 배워 보겠냐고 제안했다. 창화군은 이설 덕분에 황궁 내 곳곳을 제약 없이 다닐 수 있어서 좋다고 했지만 진짜 덕은 이설이 보고 있었다.
이설은 황제에게 ‘이것은 동백꽃이냐 아니면 붉은 염료를 실수로 쏟은 것이냐’며 들었던 수모를 드디어 씻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이제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늦으셨습니다.”
대문 문턱을 지나자 주 상궁이 마중을 나왔다. 평소보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더 어두운 것을 보니 얘기해 둔 것보다 훨씬 늦게 돌아와 걱정이 깊었나 보다.
주 상궁은 기연이 훈련을 하면서 이설이 호위무사 없이 비은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을 내심 걱정했다. 이설은 주 상궁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황궁 안에서 제게 호위 무사가 필요할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뿐더러 사실 황제가 호위군을 보내 몰래 저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최근 눈치채고 있었다.
“마마를 만나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찾아와 계십니다.”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을 함께 마중 나온 단향에게 건네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주 상궁이 뒤에서 조용히 말을 올렸다.
“나를 만나고 싶다니, 누가 말인가?”
창화군이라면 갈 곳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고, 우 미인은 고뿔에 걸려 당분간 찾아뵙지 못할 것 같다는 서신을 받았다. 소운은 까닭 없이 못 본 지 오래고 태자도 이제 기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
“단향이 너는 도월소에 물을 길어다 대문 앞에 뿌려 두고 연화와 화홍이 둘은 손에 든 짐들을 정리하고 단향이를 돕거라.”
주 상궁은 이설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세 사람을 멀리 보냈다. 이설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안으로 드시지요’라며 고집 있게 응접실로 안내했다. 단순히 걱정이 깊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느낀 주 상궁의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