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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00)화 (100/300)

달의 황홀경

100화

“이설아.”

“……”

“설아, 대답하거라.”

“……예에.”

“그리 아프면 약이라도 한 번 더 발라 줄까 싶은데.”

“괜찮습니다!”

포단 아래에 몸을 꽁꽁 싸매고 누워 있던 이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다 말고 돌연 소리쳤다. 고개를 가로젓자 머리끝까지 덮어씌운 포단이 아래로 슬금슬금 내려갔다. 다시 위로 끌어 올리려고 했지만 침상 끝에 걸터앉은 우찬이 막았다.

“약을 발라야 빨리 나을 텐데, 어째서?”

“빨리 낫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네가 어서 나아야 내 너를 다시 안을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빨리 낫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씀입니다.”

이설이 불만 가득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뒤척일 때마다 관절 하나하나가 분리되는 느낌이다. 아래의 상처야 어떻게 약을 바르는 둥 마는 둥 하긴 했지만 다른 곳들은 당장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좀 전에 진찰을 하고 나간 태의는 ‘격렬하게 몸을 쓰고 난 뒤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이라고 에둘러 설명했다. 일단 통증을 완화시킬 만한 탕약을 달여 드릴 테니 안정을 취하는 게 상책이라고.

태의와 함께 들어온 약들은 언제부터 준비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환부에 직접 발라 드리겠다던 태의는 윤 내관에게 쫓겨나듯 침소를 나갔다. 침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약을 집어 든 건 황제였다.

엉덩이에 베개를 두고 똑바로 누워 다리를 벌려 치부를 보였다. 쑥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진녹색의 약이 우찬의 손을 통해 음문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이설은 다시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비명을 질렀지만 우찬은 태연한 얼굴로, ‘다행히 찢어지지는 않았구나’ 하고 중얼거려 이설은 더 겁에 질렸다. 자칫하면 찢어질 수도 있었단 말이었으니까.

약을 바르는 게 아니라 어젯밤의 정사를 다시 치르려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때쯤 우찬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이설이 버둥거리느라 다리 여기저기에 묻은 약들을 물 묻은 무명천으로 닦아 내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옆으로 넘겨 주고, 포단을 펼쳐 이설 몸에 덮어 주기까지. 어울리는 모습이 하등 없으면서도 익숙하게 제 수발을 들어 주는 황제를 마다할 힘이 없었다.

“네가 농을 하는 것도 다 보고, 별일이구나.”

제 말의 어느 부분이 농 같았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온몸 여기저기가 다 아파 꼼짝도 못 하겠으면서도 이 몸이 다 나았다간 어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 모른다 생각하니 차라리 계속 이렇게 아픈 게 나을 것도 같다.

그래도 약은 약이라고 바르고 나니 아래에 쓰라린 고통은 한결 가시긴 했다. 이렇게 금방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 마비 작용이 있는 약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찬의 눈에 띄지 않게 엉덩이를 조였다 풀었다 해 보고 있는데 처음보다 아픈 감각이 많이 줄어들었다.

“신첩은 폐하께 농을 하지 않습니다.”

“농이 아니고서야, 어찌 빨리 낫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

“내게 안기기를 거부하는 게 아니고서야.”

황제가 웃음 진 얼굴로 이설의 목을 쓰다듬었다. 위아래로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태의 들기 전 황제가 입혀 놓은 침의는 포단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중에 풀어 헤쳐진 지 오래다. 입으나 마나 한 침의 안으로 황제의 손가락이 내려갔다.

“그, 그만두십시오, 폐하. 갑자기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내 허락도 없이 누가 여길 들어온다고.”

당황한 이설이 아무렇게나 한 말에 황제도 어이가 없는지 장난치던 손을 거두며 헛웃음을 지었다. 민망한 헛기침만 연신 터졌다.

우찬이 말없이 머리만 만져 주기를 잠깐. 늦은 아침 햇살의 포근함에 취해 다시 잠이 소록소록 오기 직전이었다. 장지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정신 차려 보니 궁녀 두어 명이 침상 가까이 있는 탁자에 가지고 들어온 물건들을 내려놓고 나갔다. 익숙한 차향에 앞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조반이야 차려 줘 봐야 먹지 않을 것 같고.”

우찬이 정확히 짚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인데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찬이 차를 따른 찻잔과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통째로 들고 돌아왔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단내가 무척 싱그러웠다.

“마침 올해 진상된 금귤의 맛이 좋아 들이라 했다.”

“금귤이요?”

우찬의 부축을 받아 이설이 허리를 세워 앉았다. 우찬에게 제 병상 수발을 시키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안 좋았는데 방금은 정신머리가 다른 데에 쏠려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젯밤 하도 울어 부은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바구니에 집중됐다.

“금국 남쪽에서만 재배되는 과실이라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이설 앞에 자리를 잡아 앉으며 우찬이 금귤 하나를 손에 들었다. 밤새 달인 치자로 색을 내어도 저것보다 샛노란 색이 곱게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먹어 본 적 있느냐?”

바구니에 담긴 금귤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이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얘기만 들었지 직접 본 것도 처음입니다.”

우찬이 말했던 대로 금국 남쪽에서만 재배되는 과일이라 들었다. 황궁에서 수확량을 직접 관리하는 데다가 애초에 수확할 수 있는 양도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수확한 거의 모든 금귤은 아마 황궁에 보내지게 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최상품만이 황제에게 진상될 것이다.

“그래?”

미묘한 웃음을 짓는 황제의 속내를 모르겠다.

좌우간 맛이 어떻든 향이 정말 좋다. 과일 냄새야 뭔들 좋지 않겠냐마는 난생처음 맡아 보는 냄새에 코를 킁킁거릴 만큼 냄새가 좋았다.

냄새의 근원지를 쫓아 이설이 고개를 점점 숙여 내려오자 우찬이 금귤 하나를 집어 이설에게 건넸다. 껍질에 코를 박아 숨을 들이마시자 금세 기분이 상쾌해졌다.

“향이 무척 좋습니다.”

“맛은 더 좋지. 먹어 볼 테냐?”

“예.”

답지 않게 입맛을 다시며 이설이 자리에 고쳐 앉았다. 곧추 세운 허리가 찡하게 울리는 아픔은 있지만 우찬에게 티를 냈다가는 다시 약을 발라야겠다며 제 다리를 활짝 벌릴지도 모른다. 그나마 가라앉기 시작하는 통증을 참아 냈다.

우찬이 손에 쥔 금귤의 껍질을 벗겨 냈다. 부드럽게 한 겹으로 벗겨지는 껍질 아래에 말랑한 과육이 있었다.

그런데 먹어 본 적도 없는 생소한 과일에 군침을 다시는 이설에게 우찬이 벗긴 껍질을 불쑥 건넸다.

“먹어 보거라.”

“예?”

“먹고 싶다 하지 않았어?”

놀란 눈으로 되묻는 이설에게 우찬은 다시 한번 금귤 껍질을 얼굴 앞에 밀었다. 도통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건지 이설은 알 수가 없어졌다.

“이걸, 먹는 겁니까?”

“그래.”

“껍질……인데요?”

“원래 껍질을 먹는 과일이다.”

아닌 것 같은데…….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 말인데 아닌 것 같다고 거절을 할 수가 없다. 바구니에 나동그라진 말랑한 과육은 어쩌고 왜 이런 너덜너덜한 껍질을 먹는 과일인 건지 도통 모르겠다.

“자.”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적당한 크기로 잘린 껍질 조각이 입안에 쏙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씹기는 씹는데 맛이 영 이상하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덜 익은 감을 씹는 것처럼 떫고, 단맛은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듣기로는 혀가 녹아 없어질 만큼 달다던데.

“어떠냐. 맛이 괜찮으냐?”

“그……, 음……,”

“왜? 입맛에 맞지 않아?”

맘 같아서는 입 밖으로 퉤 뱉어 버리고 싶다. 씹으면 씹을수록 떫어서 더 이상 씹기도 힘들었다. 그냥 꿀꺽 삼켜 버릴까 고민하는데 저를 들여다보는 우찬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다. 기껏 준비해 준 귀한 과일을 먹고도 맛이 좋다 한마디 못하는 저에게 화라도 난 건 아닐까 걱정이 들려던 찰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빤히 이설의 곤란한 얼굴을 들여다보던 우찬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리 웃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 때마다 이설은 같이 웃을 수도 없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역시 제가 먹은 건 껍질인 거지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설도 우찬이 웃은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다.

“삼켰느냐?”

“예.”

“맛은 그래도 몸에 좋다 하니 너무 억울할 건 없다. 보통은 달여서 차로 먹긴 하지만.”

“입이 아직도 떫습니다.”

이설이 저도 모르게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렸다. 우찬은 아직 웃음기 가득 남아 있는 얼굴로 이설에게 차 한 모금을 권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떫은맛이 언짢던 차에 우찬이 제 입으로 금귤 과육을 넣어 주었다. 또 장난을 치시나 싶어 씹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슬쩍 보내긴 했지만 어차피 오래 갈 것도 아니었다.

처음 맛 본 금귤은 우찬이 방금 전 제게 쳤던 장난을 모두 잊게 할 만큼 맛이 좋았다. 꿀꺽 삼켜 내고 눈이 휘둥그레진 이설은 우찬이 입에 넣어 주는 금귤 하나를 다 먹고 나서야 비로소 우찬에게 드셔 보시라 권했을 정도였다.

“난 됐으니 일단 네 배부터 채워 보자.”

“이렇게 많이는 저도 다 먹지 못합니다.”

“다 먹지 못하면 오늘 이 침상에서 내려올 생각은 하지도 말고.”

울상을 짓는 이설이지만 막상 우찬이 먹여 주는 금귤은 또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아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작은 바구니 소복하게 담긴 금귤이 다 제 것이라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시키는 대로 오물오물 귤을 먹고 있는 이설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우찬이 불쑥 물었다.

“설아, 서과라고 혹시 아느냐?”

“과일이라면 들어 본 적 있습니다.”

“먹어 본 적은 있고?”

의미심장하게 묻는 우찬의 얼굴만 봐도 속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반으로 갈라 안에 있는 붉은 과육을 먹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

“어찌 아쉬워하십니까, 폐하?”

재차 묻는 이설에게 우찬은 대답 없이 금귤 껍질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여지없이 제 입안으로 들어오는 금귤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이설은 아직 제가 먹어보지 못한 과일이 무엇이 있는지 진지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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