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94화
“쓸데없는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지.”
장난 같은 웃음을 가라앉히며 황제는 이설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 가락지는 네 탄신일을 기념하고자 주는 것이니 받아 두거라.”
“고작 탄신일입니다. 폐하께서 신경 써 주실 만큼 귀한 날이 아니옵니다.”
도로 가져가 달라는 눈빛을 간절히 보내 이설이 가락지 올린 손을 황제 앞에 내밀었다. 하지만 심드렁하니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황제는 전혀 그럴 기분은 아닌 듯했다.
“고작 옥가락지다. 하다못해 금가락지라도 줬다면 모를까, 기껏해야 옥가락지를 주고 네게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구나.”
어쩐지 진심으로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는 황제가 웃음이 가신 얼굴을 한 채 식은 차로 목을 축였다. 물끄러미 그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설도 덩달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제가 눈여겨보던 물건을 탄신일 선물이라며 주었으니 설레고 들뜬 것이야 당연하지만 덥석 받기에도 뭔가 석연찮은 마음이 든다. 그간 황제에게 받은 것들이 이미 궁 이곳저곳에 가득 쌓여 있는데 자신은 황제에 뭐 하나 값진 것을 준 게 없다. 차라리 주고받기라도 했으면 마음이 덜 무거웠을 텐데.
“정 마음에 안 들면 저기 호수에 던져 버리든지.”
황제가 앞에 호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게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이설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놨다 몇 번 반복하다 다시 황제 앞에 손을 밀었다.
“그럼 폐하께서 직접 끼워 주세요.”
“……이걸?”
“예. 청 드리옵니다.”
선물로 받은 가락지는 준비해 준 사람이 직접 손에 끼워 주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는 연국의 미신을 황제에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혼례식에서 으레 했어야 할 의식을 지금을 핑계 삼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약간 들긴 했다. 오늘의 황제라면 제 청을 매정하게 거절하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도 어렴풋이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황제는 이설을 무시하는 대신 가락지를 집어 이설의 가운뎃손가락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제 손에 맞춰 만들어진 듯 쑥 들어오는 가락지는 확실히 손가락에 끼워 넣었을 때 더 보기 좋았다.
양손을 제 앞에 펼쳐 보이자 한쪽에는 황제가 준 가락지가, 반대쪽에는 태자가 준 가락지가 하나씩 보기 좋게 손가락을 장식했다. 황제는 태자의 가락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한마디 던지려다 흐뭇하게 양손을 번갈아 보며 웃는 이설을 보고 관뒀다.
“뻔한 옥가락지가 뭐 그리 마음에 든다고.”
“색이 참 곱지 않습니까?”
“네 손이 더 곱다.”
자랑하려 보여 주는 가락지는 눈길도 주지 않고 황제가 심드렁히 대답했다. 산딸기 열매를 이설에게 직접 먹여 주는 행동 하나하나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말없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서먹해진 이설이 괜히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곧 해가 질 것 같습니다. 궁에는 언제 돌아가실 참이십니까?”
“이제 그만 가 봐야지.”
허리를 감싼 황제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전에 잠깐 걷자.”
무릎을 짚고 먼저 일어난 황제가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양손으로 포개 잡아 일어난 뒤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잡아 이끌었다.
황궁까지 돌아가는 것도 한참을 걸어야 할 텐데 무슨 길을 걷자 하시는지 몰랐다. 사실 반나절 내내 하염없이 걸어 다닌 터라 발도, 다리도 슬슬 아파 오기 시작했다. 금국에 온 뒤로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져서 걱정이다.
“머리 조심하거라.”
황제가 향한 곳은 꽃나무들이 심어진 수풀 사이였다. 오고 다닐 길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빽빽한 틈 사이에 좁게 난 길이 하나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며 유난히 낮게 꺾인 나뭇가지를 들어 올리며 황제가 속삭였다.
발 딛는 곳마다 떨어진 꽃 없는 곳이 없었다. 바람이 불 때면 흩날리는 꽃잎들이 두 사람의 시야를 가릴 만큼 떨어졌다.
“연국의 제 궁 앞에도 배꽃나무가 무척 많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일 년 되던 해에 아바마마께서 심어 주신 것입니다.”
“……”
“그래서 이렇게 바람이 불 때면 꽃잎이 창 안으로 들어오는데, 어찌나 아름다운지 폐하께도 한번 꼭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느릿하게 걷는 걸음에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나직이 울리고 그 위에 이설의 나긋한 말소리가 화음처럼 얹어졌다. 황제는 이따금 이설의 길을 방해하는 나뭇가지를 손으로 치워 내며 말없이 걸었다.
“……금은 앵두꽃이 한창 예쁘게 피었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보셔도 잘 구별할 수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폐하?”
한번 터진 고향 얘기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들떠서 말이 빨라지는 어느 순간 옆에 있는 이가 황제라는 걸 깨달았다. 조용히 운치를 즐기고 싶은 황제의 기분을 망치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 당황했다.
발을 멈칫하는 이설을 따라 황제도 걸음을 멈췄다. 이설의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 내며 숙인 고개로 부드럽게 눈을 마주쳤다.
“응. 듣고 있다.”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하는 것 같아서……. 조용히 걸을까요?”
너무 가까이 닿은 황제를 피해 옆으로 물러섰다가 나무 기둥에 어깨를 쿵 부딪쳤다. 얼얼해진 어깨를 문지르며 무심히 쳐다보는 황제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황제는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웃음기 없는 눈이 묘한 시선으로 이설을 가뒀다.
“설아, 나는 네가 나를 그렇게 피할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아.”
황제가 나뭇가지 그늘 아래로 깊이 들어왔다. 이설과의 사이를 가로막은 굵은 나뭇가지가 황제 손에 가볍게 꺾여 부러졌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이유 없이 위협적으로 들렸다.
아직 연분홍 꽃이 촘촘하게 피어진 나뭇가지는 황제의 손에서 이설에게로 넘어갔다.
이설이 건네받은 꽃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쥐자 우툴두툴한 나뭇결이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졌다. 그 아릿한 고통을 애써 참아 냈다.
“피하지 않겠습니다.”
“응?”
“앞으로는 제 곁으로 다가오시는 폐하를 피하지 않겠습니다.”
“…….”
“약조, 하겠습니다.”
‘약조’ 한마디에 힘을 실어 대답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설은 앞으로도 황제에게 겁을 먹어 피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황제는 자신을 위협하지도, 핍박하거나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황제에게 지레 겁먹는 건 자신이 고쳐야 할 문제였다.
“내가 이렇게 다가가도,”
부지불식간에 코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허리를 숙인 황제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려 와 이설의 볼을 간지럽혔다.
“피하지 않겠다고?”
이설은 차분히 숨을 길게 내쉬며 흘러내린 황제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감촉이 긴장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웠다.
“예, 피하지 않습니다.”
“나는 네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어.”
눈 한번 깜빡하는 사이에 얼굴 사이의 간격이 더 좁아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서로 코끝이 닿을 것 같다. 눈앞에 바로 얼굴이 있어서 표정을 읽기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저는……,”
황제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것과 동시에 달싹이는 제 입술이 전하는 말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가볍게 닿는 입술이 끝이 아니었다. 당황으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혀의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입술 사이를 기어이 비집고 새어나가는 제 신음 소리에 놀라 황제를 밀어내기는커녕 와락 끌어안았다. 밀착된 가슴의 두근거림이 누구 할 것 없이 요동쳤다.
“…음, ……하읏…, 폐…하아…….”
오래 지나지 않아 슬며시 떨어지는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밭은 숨이 불규칙하게 쏟아져 나왔다. 황제의 가슴께를 두른 팔은 여전히 단단히 고정되었고 그 아래에 황제가 쥐여 준 나뭇가지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피하지 않는구나.”
입술만 떨어졌을 뿐 아직 한 뼘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황제의 얼굴이 있었다. 짧은 숨을 몰아쉬는 이설과 달리 황제는 평소와 같이 고른 숨으로 가슴팍만 오르락내리락 반복했다. 이설의 한쪽 볼을 가볍게 쓸어내린 뒤 그 위에 황제가 가볍게 입 맞췄다.
“원래 주려고 했던 선물은 이게 아니었는데.”
등을 감고 있던 팔이 황제 손에 스르륵 풀려 내려왔다.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 황제는 제 손으로 끼워 주었던 반지를 돌리며 이설의 손바닥을 펼쳤다.
“저는 이 반지만으로… 하아……, 반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직 숨이 다 고르게 차지 못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니 황제와 입을 맞췄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우장절의 마지막 날 강제로 안길 뻔했던 그날 이후로 황제와의 접촉은 손을 잡거나 가볍게 안기는 정도가 다였다. 그날의 기억으로 한동안은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몸이 굳을 때가 있었고 황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떡해야 하나, 약간의 불안감에 젖은 적도 있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은 해답이 없었지만 막상 실제로 상황이 벌어지고 나니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밀착된 몸이 너무 금방 떨어져 나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당혹스러웠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주지 않을 뭔가를 주고 싶었다.”
오롯이 이설만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는 장난 어린 기색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폐하만 옆에 계셔도 좋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눌린 이설은 아무 대꾸도 못 했다.
“네 이름이 연이설인 것처럼 내게도 이름이 있지.”
갑자기 이름 얘기를 꺼내며 황제가 이설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쪽, 손바닥과 손가락 끝 여기저기에 황제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들리는 소리에 귀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한참을 그 위에 입을 맞춘 뒤 황제가 고개를 들어 다시 이설을 봤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내 이름은 나는 물론,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
“그러니 네가 가지거라.”
황제가 이설의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 검지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적어 내려가는 글자가 무엇인지 이설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폐, 폐하! 이건 제가 가질 수 없는……!”
황제를 말릴 틈도 없었다. 억지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고작 이설에게 빼앗길 황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적어 내려간 글자가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황제가 입 맞추며 예민해진 손바닥이 원망스러웠다.
이설의 손바닥에 세 글자를 간결하게 새겨 넣은 뒤에야 황제가 손을 놓아주었다. 황제가 손가락이 닿은 모든 곳이 불에 지진 낙인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 이름, 금우찬은 이제 네 것이다.”
눈을 꽉 감은 이설에게 황제, 금우찬이 다시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