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93화
‘탄신일’이라는 세 글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쥐고 있던 옷자락을 놓으며 얼떨결에 손으로 밀어 버리기까지 했지만 다행히 황제가 쉬이 뒤로 물러나 주었다.
“그걸 폐하께서 어찌 아셨습니까?”
“뭘 그렇게까지 놀라? 내가 알면 안 되기라도 했느냐?”
“그런 건 아니지만…….”
곤란함으로 뭉개지는 대답에 황제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황제에게 숨긴 것은 아니었다. 고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뿐.
“그럼 내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무슨 이유에서지?”
그간 황제와 가까이 지내며 황제의 표정 읽는 법을 체득했다. 다분히 꾸짖는 말투이긴 해도 화를 내는 기색은 아니라는 점에 간신히 마음을 놓았다.
“따로 이유가 있어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부러 말씀드릴 이유도 없다고 생각되어…….”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잘못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핀잔을 듣고 있자니 까닭 없이 주눅이 들었다. 언질을 드렸어야 했나 생각이 들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참 우습다. 제까짓 게 뭐라고 황제에게 탄신일을 알린단 말일까.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먼저 나서는 법이 없는 주 상궁도 오늘이 제 탄신일인 걸 황제에 고해 드려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이설은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요 며칠 함께 조찬도 들기 힘들 만큼 바쁜 황제에게 굳이 전해야 할 만큼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얘기할 이유가 없었다고?”
하지만 이설의 생각과는 달리 황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을 이설 때문에 놓치기라도 한 것처럼 집요하게 캐물었다. 황제가 더 채근하여 물을까 봐 이설이 다급하게 대화의 공간을 메꿨다.
“그저 탄신일입니다. 굳이 폐하께서 아셔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겨우 이 정도 변명을 납득할 리가 없는 황제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눈초리였다.
“내가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건 도대체 뭔데?”
“그건 제가 딱히 대답해 드릴 만한 게 없습니다만, ……송구하오나 폐하.”
“왜.”
“어찌 그리 화가 나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정말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게 크게 성이 났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황제의 탄신일을 잊고 넘어간 것도 아니고, 단순히 제 탄신일을 말하지 않았던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꾸지람을 들어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제 딴에는 제법 용기를 내고 비장하게 물은 것이었는데 황제는 그 질문 자체가 더 황당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불붙은 나무에 기름을 부은 걸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이 보이기는 하니, 다행이구나.”
누가 봐도 화를 내고 있는 게 분명한 태도였지만 이설은 구태여 대꾸를 하는 대신 황제가 제 물음에 답해 주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부쩍 낮아진 목소리가 ‘설아’ 하고 불렀다.
“너는 네가 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저는 폐하의……, 후궁이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 짧게 고민했다. 아직 제 위치를 한 단어로 설명해 주는 ‘후궁’이라는 말이 익숙하지가 않아 큰일이었다.
이 이상 황제와 자신의 관계를 확실하게 연결해 주는 단어는 없다 생각했는데 황제가 기대하던 바는 그게 아니었는지, 이설의 대답에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다물어진 입매에 순간 긴장하긴 했지만 제가 겁내는 모습을 황제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티 내지 않으려 못 본 척했다.
“그럼 네가 내 후궁이 된 까닭은 무엇이냐?”
황제가 두 번을 묻고 나서야 제가 했어야 할 올바른 대답을 깨달았다. 황제가 저를 끌어안은 팔의 손목으로 눈길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소매에 가려진 이 손목에, 황제가 품을 내어 주는 이유가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네 덕분에 나는 천명으로 이어진 정인의 탄신일도 챙기지 않는 무정한 사내가 되었다.”
“무정……, 무정이라니, 폐하께 그런 부도덕한 생각을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빙긋 웃고 있는 미소만 봐도 진심이 아닌 게 빤히 보이는 말이었지만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린 이설은 고개를 한껏 저으며 황제의 말을 부정했다.
황제의 말에 다소 억지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애초에 비은궁 궁인들이 아니라면 제 탄신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을 것이다. 저에 관한 거라면 별의별 것들을 다 캐물어 보던 태자 정도나 알고 있으려나.
게다가 황제는 무정함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건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작 눈치챘다. 오히려 황제가 제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면 그거야말로 무성한 소문을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지 않으냐? 네 탄신일인 오늘 황궁이 저리 조용한 걸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오늘이 제 탄신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황궁에 몇 되지 않습니다. 그들 중 그런 생각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하다,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라 이설이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이리될 줄 알았으면 하다못해 주 상궁을 시켜 태금궁 윤 내관에게 슬쩍 언질이라도 줄 걸 그랬다.
“허나 제 생각이 짧았던 건 맞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결국 납작 엎드려 잘못을 비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사실 궁인들이 사정을 모르니 저도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오늘이 제 탄신일이라는 걸 황궁이며 주안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황제의 체면에 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저 한눈에 봐도 황제가 저를 놀려 주려는 태도가 뻔히 보이는데도 거기에 걸려 넘어져야 한다는 게 조금 억울했던 것뿐이다.
“뉘우쳤다니 다행이야.”
만족스럽게 웃는 황제에게 처음으로 얄미운 기분이 들어 낯설었다. 그리고 운 나쁘게도 그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버린 것 같다.
“근데 뉘우쳤다는 표정이 왜 그러해?”
“제 표정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기는.”
부풀어진 볼을 툭 건드리는 황제를 그저 쳐다만 본다는 게, 억울함 짙은 눈빛을 미처 지워 내지 못했다. 진심으로 황당해 마지않는 얼굴로 황제가 이설의 부푼 볼을 손가락으로 깊게 찔렀다.
“네가 쓸데없이 말을 아껴 무정한 지아비가 된 것은 나인데, 어찌 설이 네가 그런 억울한 표정을 짓느냐?”
“……억울하지 않습니다.”
“네 얼굴은 그리 말하지 않는데.”
툭하면 제 얼굴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황제 때문에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면경이라도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들여다봐야 할까 싶다.
그래도 황제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맞으니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 이상 말을 했다간 그나마 지금 짓는 표정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황제에게 부끄럽다거나 송구스럽다거나 하는 것 이외에 감정을 이 정도로 드러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앞에만 서면 늘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느라 제 감정 돌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가 싶다.
“처음 보는 얼굴이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좋은 날 그런 얼굴일 필요는 없잖아.”
황제의 말이 맞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제 탄신일에 이런 얼굴을 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오늘 종일 저를 짓궂게 놀리긴 했지만 황제 덕분에 황궁을 나와 보기도 했고 이 정취 속에 차를 마시는 나름의 호사도 누렸다.
원망해야 할 사람을 원망하고, 억울할 만한 일을 억울해해야지.
“표정 좀 풀거라.”
“……예.”
표정 좀 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헤벌쭉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답은 고분고분히 해 놓고 다과상 위만 하릴없이 뚱하게 보고 있자 황제가 짧게 실소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차 싶어 폐하, 하고 부르며 고개를 돌리자 황제가 그 앞으로 손을 쓱 내밀었다.
“표정 푸는 데 좀 도움이 될까 싶은데.”
“…….”
“받지 않고 뭐 해.”
코앞에 들이 밀어진 손에 놀라 상체로 뒤로 빼다가 반대편 황제의 팔에 몸이 막혔다. 굳은살 배긴 커다란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뭔지 알아차리는 데에는 아주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옥가락지 아닙니까?”
“맞다.”
“아까 장에서……, 해국 상단의 상점에서 봤던 그 옥가락지와 똑같이 생겼는데……,”
“……”
“설마 그 옥가락지입니까?”
보통 옥가락지치고는 모양새가 특이하다 싶으면서도 어딘가 낯이 익는 것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까 전 해국 상단의 상점에서 봤던 그 옥가락지다. 값이 비싼 건 둘째 치고 수중에 한 푼 없이 나오는 바람에 그 앞에서 구경만 실컷 하고 온 물건이었다.
사실 황제에게 넉넉한 돈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돈을 꾸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사 달라고 청하기도 난감하여 마음을 접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를 보고 이설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설마 그 상점에서 가져오셨습니까?”
의심의 눈초리 가득히 이설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황제가 단번에 인상을 팍 구겨뜨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당연히 값을 치르고 사 온 것이지.”
“언제요? 그 이후로 폐하께서는 내내 저와 함께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광대놀음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흑영더러 사 오라 일렀다.”
생각해 보니 광대놀음을 보느라 황제와 잠깐 떨어져 있던 적이 있었다. 사실 황제가 제 옆에 없는 줄도 모르고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때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라 해 봤자 그리 길지도 않았다.
난데없이 도둑놈 취급을 당한 황제가 화를 내기는커녕 기가 막혀 웃는 걸 보고서도 이설의 하얗게 질린 얼굴은 핏기가 돌아올 생각을 못 했다. 설령 황제가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왔다 해도 황제를 꾸짖을 사람은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는데, 제까짓 게 뭐라고 황제에게 소리를 지르고 의심을 한 건지 모르겠다.
거듭 제 경솔함을 사과하는 이설이 말을 더듬기까지 할 때쯤에야 황제가 이설을 달랬다.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듣고서야 이설도 깊은 안도의 한숨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