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91화
“아직 멀었습니까?”
“거의 다 왔어.”
“들를 곳이 어디십니까? 황궁에서도 이미 한참 멀리 떨어진 것 같은데요.”
“가 보면 안다. 걷는 게 힘들어 투정 부리는 거면 내 업어 줄 테니 말하여라.”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는 이설을 보고 황제가 장난 걸듯 몇 발자국 앞서 걸어가 등을 보였다.
“업히거라”
농담조가 다분한 말투인 걸 알면서도 이설은 목이 떨어져 나가라 고개를 저으며 그 등에 업히기를 한사코 사양했다.
장을 떠나 좁은 길 사이사이를 꽤 오래 걸었던 것 같다. 사람이 비교적 한산했던 돌담길은 어느새 수풀이 우거진 숲길이 되었고 오가는 행인은 보지 못한 지 오래다. 근처에 사람들이 있을 때는 훤히 얼굴을 드러낸 황제가 신분을 들키거나 또 괜한 소동에 휘말릴까 봐 그게 걱정이었는데, 인적이 아예 없는 곳을 오니 이건 또 이것대로 불안하다.
정확히 어디를 가는지도 말해 주지 않는 황제는 이전에도 자주 왔던 길인 것처럼 방향도 헤매지 않고 척척 잘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설은 나덕산 이후로 오랜만에 산길을 걸으며 고향 생각이 났다.
“이 담만 지나면 돼. 바닥에 돌부리가 많으니 조심하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이끼가 잔뜩 낀 돌담을 만났다. 황제가 내민 손이 아니더라도 혼자 충분히 지날 수 있는 길이었지만 이설은 군말 없이 황제의 손을 잡고 돌담 앞에 섰다. 두 사람 모두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나무문을 지나자 아래로 향하는 돌계단이 길게 이어졌다. 황제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이설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을 아래로 내디뎠다.
나무에 가려진 돌계단 아래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깜빡깜빡 느리게 뜨였다 감기는 눈이 천천히 황제에게 향했다.
“폐하께서 들러야 한다는 곳이 이곳이었습니까?”
“네 마음에 드느냐?”
“예. 마음에 들고말고요.”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온 전경은 이설이 금국에 와서 봤던 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다웠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부지에 나룻배가 한 척 떠 있는 호수가 있었고, 한쪽에는 연분홍색의 꽃이 가득 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라기에는 사람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게 흠이 될 만한 구석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일단 저쪽에 가서 앉자. 앉아서 얘기해.”
황제가 가리킨 호수 옆에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가 미리 준비한 듯 조촐한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황제와 이설이 신을 벗고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이곳은…….”
앞선 이설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황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하기 곤란하시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된다 고하기 전 적절한 대답을 찾은 황제가 답했다.
“내 집이다.”
“예?”
“태자가 즉위한 뒤 상황으로 물러나면 내가 살 집이지.”
당황하는 이설에게 황제가 이설의 뒤로 멀리 손가락을 가리켰다. 나무 기둥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이사이로 집 한 채의 형태가 대충 보였다.
“폐하께서는 보좌에서 물러나셔도 황궁에서 지내실 수 있으실 텐데요.”
“법도상은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밀전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황궁에서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한없이 소탈한 태도에 의아함이 들었던 것도 잠깐. 인제 보니 황제가 제 앞에서 지금만큼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는 것도 처음 봤다. 정자의 바깥 난간에 팔을 걸친 황제는 호수 위 나룻배가 좌우로 출렁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진작 나왔어야 할 곳인데.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야 할지, 까마득하군.”
“폐하께서는 황궁이……, 황궁이 정말 싫으십니까?”
조금 전 가게에서의 말도 그렇고, 황제가 이런 일을 가지고 두 번이나 농을 칠 리가 없다 여기며 이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못 들은 척 묻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황제의 씁쓸한 표정을 보니 입이 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럼 좋을 리가 있겠느냐?”
당연한 걸 묻느냐 핀잔주듯 황제가 되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긋지긋하고 답답해.”
구체적인 설명 없이 단답으로 끝내는 황제였지만,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으로만 봤을 때 그 ‘지긋지긋하고 답답함’의 정도의 어느 수준일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끝내 더 캐묻지 못하는 이설을 대신해 황제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황제로서의 짐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즉위 직전까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지금 옥좌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이 그리 즐겁지는 않구나.”
씁쓸한 웃음을 짓는 황제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차보다는 술이 더 필요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설은 황제를 따라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페하께서는 무척 훌륭한 황제이십니다.”
“내가?”
한쪽 입꼬리가 삐죽 솟아오르며 황제가 물었다. 이설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부터 금국은 유례없는 번성의 시기를 맞고 있지 않습니까? 후대에도 분명 성군으로 기록되실 겁니다.”
보좌라는 자리가 답답하고 지긋지긋하다는 황제였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금국을 쇠퇴의 길로 밀어 넣은 적이 없었다. 즉위 후부터 지금까지 금국은 무역과 국방,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번성했고 백성들의 살림은 하루가 다르게 더 나아졌다. 하다못해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강수마저 시기적절하여 매년 수확물이 늘어 가고 있었다. 금의 백성들이 황제를 신으로 떠받들며 추앙하는 것이 그저 이상한 노릇만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했다면 입바른 소리에 치를 떨며 무시했을 황제지만 또랑또랑한 눈을 빛내는 이설에게는 관대하게 웃었다.
“나도 내가 황제로서 무척 훌륭하다는 건 알고 있다 설아. 다만 나는 이 자리가 지겨울 뿐이지.”
“아, 제가 괜한 말씀을…….”
민망한 듯 턱을 긁적이는 이설은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다.
황제가 상황으로 물러난 뒤 황궁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게 될 때면 자신은 이미 연국에 돌아가 있을 것이다. 황제만 약조를 필히 지켜 준다면 그럴 수 있다.
한때 이설은 그날만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마주쳐도 선한 눈길 한번 주지 않는 황제를 오매불망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물에 젖은 바람 냄새를 맡으며 눈뜨는 연국에서의 아침을 그리워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 마음이 정확히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설은 늘 연국을 그리워하면서도 언젠가 황제를 떠날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졌다.
“무슨 생각을 또 그리 골똘히 하느냐?”
“저기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고 있었습니다.”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재빨리 대답을 하였지만 황제 눈치를 빗겨 갈 거짓말이 아니었다. 가늘게 뜬 두 눈이 저를 무심히 바라보기에 머뭇거리며 다시 대답했다.
“떨어지는 꽃잎을 보니 연국 생각이 나서…….”
아주 지어낸 거짓말을 아니었으니 이설도 껄끄러울 이유는 없었다. 다행히 황제도 이번에는 이설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황제가 이설을 따라 멀리 꽃나무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에 한 번씩 세차게 몰아칠 때마다 파르르 떨린 가지들 아래로 꽃잎이 흩날렸다. 이설은 저 꽃은 향기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네 이름의 ‘이’는 저 꽃을 의미하지 않느냐?”
별안간 이름의 의미를 묻기에 이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저 나무가 배꽃나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비슷한 것 같은데.”
“키가 더 작고, 꽃잎의 색이 다릅니다. 사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잘 구분하기 힘들긴 합니다만.”
“너는 이 멀리서 용케도 잘 구분하는구나.”
쑥스럽게 웃던 얼굴에 한차례 짧은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배꽃이라면 연국의 궁에서 숱하게 보았으니까요.”
“네 이름에 그 꽃이 담겨 있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저는 그 꽃에 제 이름이 담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설의 대답이 그다지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한 황제가 이설을 빤히 들여다봤다. 이설은 다른 이에게 먼저 말해 본 적 없는 이 얘기가 부끄러우면서도 처음 이 얘기를 알리는 이가 황제라는 사실에 내심 설렜다.
“제가 태어나던 날 어마마마께서 산통 중에 창밖을 내다보시니 그날따라 배꽃잎이 무척 아름답게 흩날리셨다 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설산에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 제 이름을 이리 지어 주셨다 전해 들었습니다.”
“연국에서는 눈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가 보군.”
“아닙니다. 어마마마께서야 나고 자라신 고향이 만설지 어귀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눈 구경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셨겠지만, 연국에서 평생을 살아도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눈이 내리는 설경을 본 자들은 더욱 드물고요. 저도 살며 딱 두 번 보았습니다.”
타국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 본 적이 몇 번 없는 이설은 금국에 온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 나라 연국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이미 수차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중 한 가지가, 연국에서는 설경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비은궁 궁녀들만 해도 이설의 혼례를 돕기 위해 연국에 머물 때 얼마나 더 기다리면 눈을 볼 수 있는 건지 물은 적이 있었다. 평생을 기다려도 이곳에서는 눈을 볼 수 없을 거라는 기연의 냉정한 대답에 시무룩해지는 표정들을 보고 농담으로 물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연국의 궁에서 눈이 내리는 만설지 입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지만 지형이 험한 오악산을 지나야 하는 게 복병이라면 복병이었다. 워낙 사고가 많은 위험한 곳이라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거기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설이 최근에 오악산을 넘었던 것은 몇 해 전 어마마마께서 달로 돌아가셨던 때였다. 달이 유난히 밝았던 그날도 눈이 시리도록 하얀 눈이 펑펑 내리며 발치에 쌓였다.
“폐하께서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절경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랜만에 떠오른 어마마마 생각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까 염려하며 화제를 돌렸다.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는데, 황제의 반응은 기대밖이었다.
“몇 해 전 조약을 어긴 이민족 역당들을 토벌하러 도국 군사 경계령 부근까지 갔을 때 본 적이 있어. 덕분에 나흘 내내 고생 좀 했지.”
옛 생각으로 추억에 잠길 만도 한데 황제는 그게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는지 찌푸린 인상을 좀처럼 펴지 못했다. 하기야 풍류를 즐기러 간 곳도 아닌 데서 나흘 내내 눈이 내렸다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달밤에 눈이 내리는 정취는 제법 봐 줄 만했어.”
그나마 좋게 봐줄 수 있었던 기억의 한 조각을 겨우 찾아낸 황제가 저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함께 공유한 기억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정취에 아는 체를 하고 싶었지만 황제가 달가워할 것 같지 않아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