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89화
주위를 한번 넓게 둘러봐도 이설의 머리카락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엄습하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길게 널어 놓은 색색의 비단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 사이로 건너편에 서 있는 이설이 보일 듯 말 듯 얼굴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맥이 탁 풀린 황제가 헛웃음을 치며 비단 천을 걷어 내고 이설에게 다가갔다.
“뭘 구경하고 있느냐.”
“옥가락지입니다. 보세요, 세공 장인의 실력이 무척 좋습니다.”
“세공이 훌륭해 봤자 옥가락지다. 금에 비하면 쓸모가 없어.”
굵은 가락지 전체에 꽃 모양의 음각을 넣은 것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옥이다. 금에 비교하자면 터무니없을 만큼 하찮은 장신구에 눈독을 들이는 이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이설이 전부였다.
콧방귀를 뀌는 황제에게 이설이 힘없이 웃으며 ‘그렇습니까?’ 하며 손에 쥐고 있던 옥가락지 하나를 조심스레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황제가 옆에 없는 동안 이설에게 갖은 사탕발림으로 구매를 유도하던 점인이 이설이 옥가락지를 내려놓자 눈에 띄게 실망을 금치 못했다.
“옥가락지가 마음에 안 드시면 금가락지도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면 이 옥가락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귀한 것들이 많습니다, 공자님들”
“……그렇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겠느냐?”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가지고 나온 돈도 없고요.”
“별걸 다 걱정하네.”
설마하니 황제가 잠행을 나오는데 돈 한 푼 없이 나왔을까 걱정을 한 걸까. 어이가 없어 터진 웃음에 이설은 민망한 듯 볼을 긁었다.
“말만 하거라. 뭐든 다 사 줄 테니.”
이설은 황제가 농담 삼아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였는지 그저 웃고만 말았다. 그럴수록 옆에 있는 점인이 더 애가 타 이설을 부추겼다.
“가락지가 싫으시면 비녀는 어떻습니까? 마침 정인끼리 나눠 낄 수 있는 비녀가 들어왔는데 그게 요즘 우리 해국에서는 연인 사이에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
“정인끼리 비녀를 나눠 낀단 말이냐?”
“예예. 이게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말로 하려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점인이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가 곧 비녀 두 개를 양손에 가지고 나왔다. 길이가 반 뼘쯤 되는 두 개의 비녀는 얼핏 봐서는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잘 보십시오. 이게 그냥 보기에는 평범해 보일지 몰라도, 이 두 개를 서로 가까이 가져가면……, 자, 이렇게 철석같이 들러붙는다 이 말입니다.”
“손으로 직접 갖다 붙인 것 아니었느냐?”
“의심 많으시기는. 자, 공자님께서 직접 해 보시지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황제에게 점인이 비녀 두 개를 내밀었다. 점인이 그랬던 것처럼 비녀에 달린 장신구를 가까이 가져다 대니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저절로 딱 붙어 맞닿게 되었다. 눈이 동그래진 이설이 저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기에 건네주자 황제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신기해했다.
“겉보기에는 그냥 금비녀인 것 같은데, 안에 뭐라도 들었습니까?”
“저 같은 장사치가 뭘 알겠습니까요.”
헛헛하게 웃으며 점인이 황제를 다시 보았다. 눈치 빠른 장사치답게 돈을 낼 만한 자가 누구인지 일찌감치 파악한 듯했다.
“연인이 나눠 가지면 두 사람이 어디에 있든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귀한 비녀입니다. 요즘 저희 해국에서는 혼인 선물로 인기가 무척 좋습니다. 두 분께서 나눠 가지시기에 이보다 좋은 게 있겠습니까?”
“앗, 저희는 그런 사이가……,”
“얼마지?”
두 사람 사이를 연인으로 생각한 점인이 넌지시 던지는 말을 뒤늦게 이해한 이설이 그런 게 아니라며 부인하려던 찰나 황제가 그 앞을 막아섰다. 이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지 않아서 몸을 끌어안아 당기자 점인이 민망한 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내 정인의 마음에 꽤 든 모양이야. 얼마에 팔 텐가?”
비녀 한 쌍치고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부르는 점인에게 웃돈을 더 얹어 주고 두 사람은 상단을 떠났다. 이설은 아직 두 비녀가 서로 가까이 다가가면 철썩 달라붙는 게 신기한지 계속 비녀 두 개를 떼었다 붙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내내 웃었지만 천에 가려져 이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설아.”
“예, 공자님.”
“아-, 해 보거라.”
“예?”
“아- 해 보거라 했어.”
한창 붐비는 거리를 지나 한산해진 길을 걷던 중 황제가 걸음을 멈춰 세우고 이설에게 명했다. 멀뚱히 황제를 쳐다보던 이설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작게 입을 벌렸다. 황제가 ‘더 크게’라고 말하기에 조금 더 크게 벌려 보기는 했지만 처음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옜다, 먹거라.”
곧 입안으로 툭 떨어지는 동그란 것을 혀로 굴리고 나서야 황제가 제게 당과를 먹여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과는 언제 사 오신 겁니까?”
“사 오기는.”
“……”
“좀 전에 바닥에서 주운 것이다.”
“예? 바닥에서 주운 걸 지금 제게 주신 겁니까?!”
놀라 되묻는 이설을 보고 황제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입과 코를 가린 천이 위아래로 펄럭일 정도로 크게 웃는 황제를 보고 이설은 대꾸도 못 하고 자리에 서서 동그란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는 이내 점점 튀어나오는 입이 삐죽거리며 ‘진짜 주운 당과를 제게 주신 줄 알았습니다, 폐하.’ 하고 불만스럽게 투정 부렸다.
황제는 대답 없이 손에 남은 당과 하나를 마저 제 입에 넣었다. 황궁에서 먹는 것에 비하자면 정말 바닥에서 주운 것을 먹는 거나 다름없을 만큼 형편없는 맛이었다. 태자에게 주었다면 단박에 뱉어 버렸을 것이다.
“폐하께서 이런 농을 하시면 저는 어떻게 반응을 해 드려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직 토라진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이설이 입안에 당과를 굴리며 고시랑고시랑 불만을 토로했다. 그간 몇 번 이런 장난을 쳤던 것이 티는 내지 않았어도 내내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나 보다. 황제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가 가리개 너머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하고, 이설의 투정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한산한 거리를 함께 걸었다.
*
“정말 여기가 괜찮으시겠습니까?”
“똑같은 걸 왜 자꾸 물어보는 것이냐? 네 맘에 들지 않는 것이면 다른 곳으로 옮겨도 좋고.”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설이 말끝을 흐리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끼니때가 지난 뒤라 생각했던 것만큼 사람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아직 탁자마다 띄엄띄엄 앉아 있는 손님들이 꽤 남아있었다.
“이런 곳에서 수라를 드시는 게 염려되어 그렇습니다.”
“수라를 들고 싶으면 황궁으로 진작 돌아갔겠지.”
“공자님 듣는 이가 많습니다.”
구태여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하지 않는 황제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이설이 급격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려고 했지만 황제가 그 앞에 손을 휘저었다.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더 수상쩍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황제의 말대로 두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 들어올 때는 두 사람의 행색이 남다른 것을 보고 흘끔흘끔 훑어보기도 했지만 이내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가까이 앉은 젊은 사내들은 이설과 황제가 무슨 대화를 하든 귀 기울이는 기색 없이 식사만 계속했다.
황제가 하는 말도 주변 사람들에게 들릴 리 만무하다. 게다가 조금 전 낮술에 거하게 취한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며 왁자지껄한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금세 난장판이 된 주변을 살피며 이설은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이었지만 황제는 별 반응 없이 식전 차만 음미했다.
다시 둘러봐도 황제가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아니다. 낡은 천막으로 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에 허름한 탁자와 의자를 아무렇게나 배치해 놓은 게 전부였다. 음식 맛이야 어떨지 몰라도 이런 곳에서 황제가 식사를 한다니, 윤 내관이나 차란이 알게 되면 핀잔이라도 듣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졌다.
얼마 안 있어 차려진 밥상은 예상대로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고기 찬 하나에 나머지는 죄다 나물 찬만 가득이다. 이설의 입맛에서야 제법 군침이 도는 차림이지만 고기 찬 없는 밥상은 취급도 하지 않는 황제의 성에 찰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설의 걱정과는 달리 황제는 불평 한번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되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이설을 보고 반찬 투정을 한다며 장난스럽게 꾸짖었다.
“반찬 투정이 아니라 사실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아 그렇습니다.”
아직 시장한 기운이 없는 배를 괜스레 문지르며 힘없이 대답하자 황제가 짙게 웃었다.
“하기야 오늘 장에 파는 모든 떡을 다 맛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
웃음기가 가득한 말은 과장이 반인 농인 걸 알면서도 이설이 발끈했다.
“폐하께서 자꾸 권하셨으니까요!”
울컥 터지는 목소리가 가까이 앉아 있던 손님 몇몇의 이목을 끌었다. 실수를 깨달은 이설이 당황한 얼굴로 입만 뻥긋거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먹지 않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셔서…….”
황제와 달리 이설의 말에는 과장이 없었다. 황제는 장에서 파는 모든 음식들을 이설에게 권했다. 떡뿐만이 아니라 다섯 걸음에 한 번씩 ‘이것을 먹어 보아라, 저것을 먹어 보겠느냐’ 하며 온갖 것들을 권한 뒤 이설이 거절하면 장에는 이만 볼일이 없다며 궁으로 돌아가겠다고 은근한 협박을 했다.
시무룩하게 국그릇을 휘젓는 이설을 보고 황제가 으레 짓는 무표정한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황궁이 그렇게 싫으냐.”
방금 전까지도 넘쳐흐르던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의 중압감이 어깨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이설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나온 황궁을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뿐입니다. 오해 마시옵소서.”
“솔직하게 말해도 돼.”
“거짓을 고한 적 없습니다.”
“그래?”
황제는 이설의 대답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혼잣말하는 목소리가 마치 이설이 들으라는 듯이 선명했다.
“놀랍군. 나조차도 황궁이 싫은데 말이야.”
덤덤히 뱉는 속내는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대다가 들고 있던 숟가락만 조심스레 탁자에 내려놓았다.
황제가 다시 묵묵히 식사를 하는 동안 이설이 황제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재고했다. 생각해 보면 입궁한 이래로 황궁이 한결같이 좋았던 적도, 싫었던 적도 없다. 좋은 날이 하루 이틀 이어지다 싫은 날이 찾아오기도 했고 그 긴 시간을 버티고 나니 다시 좋은 날이 찾아왔다. 만약 황제가 구체적으로 ‘요즘’ 황궁 생활은 어떠한지 물어봤다면 이설은 두말 할 것 없이 ‘무척 좋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