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87화
*
황제는 차란과 매우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물론 알고 지낸 기간으로만 치면 소운과 흑영이 더 오래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한두 해 차이일 뿐이었고, 차라리 승상 자리에 오른 뒤부터는 매일같이 얼굴 보는 날도 허다했다. 그러니 아무리 외면하고 무시하려고 해도 차란의 습관, 감정, 걱정, 욕심 등이 손짓 하나만 봐도 눈에 훤히 보였다. 황제는 이것을 차란이 제게 내린 저주라며 극도로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황제는 정말이지 차란의 장단대로 움직여 주고 싶은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옆에서 무슨 헛소리를 하고 갖은 짓거리를 하더라도 사람 취급도 않고 무시해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무척 잘해 왔다고,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된다고,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또 뭐냐.”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러는지 묻지 않느냐.”
그런데 그 어렵지도 않았던 일이 요즘 들어 마음 먹은 대로 쉽게 되지가 않는다. 드릴 말씀이 있지만 폐하께서 하문하기 전 까지는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훤히 쓰여 있는 차란의 얼굴을, 황제는 이제 더 이상 코웃음을 치며 외면하지 못했다.
이유야 뻔했다.
“무슨 설이 얘기가 하고 싶어서 또 그런 역겨운 얼굴인 거냔 말이지.”
“폐하, 아무리 저희 둘뿐이라지만 말씀의 격을 좀…….”
“네가 감히 지금 짐에게 격을 논하겠단 말이냐?”
어제와 오늘. 이설과 조찬을 들지 못했다. 빌어먹을 이민족 오랑캐들의 침략 빈도수가 잦아지며 덩달아 황제가 집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침 저녁으로 찾아오는 문무관들은 이제 알현 소리만 들려와도 지긋지긋해 죽을 지경이다.
지난 수 십 년간 전쟁과 침략과는 거리가 멀었던 금국이었는데 왜 하필 지금에서야 이런 귀찮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황제는 요 며칠 내내 심기가 불편하던 참이었다. 그 분위기를 모두가 알고 있기에 다들 알아서들 황제 눈치를 보며 제 몸들을 사리고 있는데, 늘 그렇듯 차란 만이 이 기류를 읽지 못했다.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말장난할 기운 없다. 그래서, 오늘은 설이가 고구마를 캐다가 뒤로 넘어졌느냐 앞으로 넘어졌느냐?”
“드리려던 말씀은 그런 게 아니라,”
“그럼, 호미질을 하다가 또 담장 밖으로 돌을 날렸어? 이번에는 누가 그 돌에 맞았느냐?”
“……아닙니다. 폐하, 소신의 말을 끝까지,”
“그것도 아니면 무엇인데. 대체 얼마나 대단한 얘기를 하려고 반나절 내내 뜸을 들이는 것이냐?”
창피하다며, 이설이 기를 쓰고 숨기려는 일들을 차란은 속속들이 모두 알고 있다. 황제 눈에 보이지 않는 이설의 순간순간을 전해다 주는 것이 차란의 일이었다. 묻지 않아도 알아서 고분고분히 알려 주면 좋으련만 남달리 삐뚤어진 차란은 황제에게조차 그럴 생각이 없었다.
물을 때까지 기다렸다 바로 대답이라도 해 주면 차라리 낫지. 이따금 황제에게 제 이른 퇴청 시간 등을 조건으로 내걸며 ‘말씀드릴까요?’ 하고 물을 때도 있었다. 그럼 백이면 백, 황제는 결국 차란이 원하는 대로 편의를 봐줬고 그것들은 언제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늘도 보통 때 같았으면 적당히 차란의 장단을 맞춰 주다 쓸 만한 얘기나 듣고 쫓아내면 그만이었을 텐데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게다가 차란도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할 셈인지 반나절 동안 뜸을 들이며 황제 기분을 건드렸다.
“냉큼 말하고 눈앞에서 썩 꺼져 버려라.”
오랜만에 살기 가득히 진심으로 성을 내는 황제를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차란은 되려 평소보다 더 여유 넘치는 모습이었다. 가지고 온 패가 무엇이길래 저렇게까지 황제 심기를 거스르는 건지, 집무실 천장에 몸을 숨겨 두 사람을 내내 지켜보던 흑영이 차란이 할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폐하께서는 루 소의 마마의 탄신일이 언제인지 알고 계십니까?”
“뭐?”
“루 소의 마마의 탄신일 말입니다. 생일이요.”
“……”
“알 만합니다. 폐하께서야 폐하의 탄신일조차 챙기지 않으시니까요.”
태어난 순간이라면 모를까, 태어난 날을 매년 챙겨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어 하는 황제에게는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남의 탄신일은 고사하고 황제 본인의 탄신일조차 하찮게 여기는 황제다.
금국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리는 연회도 현 황제가 즉위 된 이후 규모와 기간이 반으로 축소되었다. 그저 자신이 태어난 날일 뿐인 하루를 위해 국고를 낭비하며 정무를 소홀히 할 필요가 없다는 황제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대신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일 년 중 하루일 뿐인 탄신일인데, 이설의 탄신일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코웃음을 치며 황제는 놓았던 붓을 들었다.
“알 바 아니다.”
“정말이십니까?”
“이설의 탄신일이든 나의 탄신일이든 저잣거리 어느 상인의 탄신일이든 그저 일 년 중 하루가 아니냐? 도대체 그깟 하루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이 난리야.”
황제가 잡은 붓을 들고 다시 서신을 써 내려가기 시작하자 차란이 살짝 당황했다. 예상하던 반응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천장 서까래에 몸을 숨긴 흑영은 물론 기둥과 내벽 사이에 은신하던 호위군들이 흥미롭게 두 사람을 관망했다.
“뭐, 그렇기야 하지요.”
차란이 이렇게 싱겁게 물러설 리가 없는데.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때 황제만은 확신했다. 아직 차란이 꺼내지 않은 뭔가가 더 있을 거라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내일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것이 있겠습니까?”
“……내일?”
“그저 루 소의 마마의 탄신일일 뿐이겠지요.”
황제가 다시 붓을 내려놓았다. 짜증이 가신 얼굴은 그 어떤 정무를 볼 때보다 진지하다. 차란은 이제야 제가 바라던 황제의 반응을 본 것 같아 흐뭇하게 웃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벌써 열흘 전부터 해국의 진귀한 물건들을 준비해 놓으셨다고 하지만 폐하는 그럴 필요가 없으실 줄 알고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쓸데없이 이럴 때는 예의바르고 단호한 차란이 뒤를 돌았다. 장문이 열리기 전까지도 황제는 묵묵부답이다. 다른 일은 몰라도 이설이 관계된 일에서 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제 예상대로 움직여주는 황제인데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를까.
드르르륵-
의아함에 잠시 자리에 멈춰 서 있던 차란이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등 뒤로 예상했던 그대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윤 내관, 밖에 있느냐!”
급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윤 내관을 비롯해 내일 하루 바빠질 궁인들의 모습이 선하다. 하지만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듯 차란은 유유히 집무실을 나섰다.
*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한가로운 조찬 뒤의 시간. 조찬치고는 거하게 차려진 한 상을 궁인들 성화에 못 이겨 배부르게 비워 낸 뒤 소야원 나무 등에 앉아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늘 그렇듯 오늘도 날이 좋다.
금국의 날씨는 매일매일 겪으면서도 매번 놀라울 정도로 모든 날들이 똑같이 맑고 쾌청하지만 유독 오늘따라 햇살은 더 따사롭고 하늘은 높고 푸르다. 마음만 조금 달리 먹었을 뿐인데 시야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
오늘은 이설의 탄신일이다. 이 중요한 사실을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며 어제쯤 온 궁인들에게 돌아가며 핀잔을 들어 여기저기 눈치가 보이던 참이다. 까맣게 잊고 있어 죄송하다며 기연과 유강까지 어젯밤 늦게 침소로 들어와 주 상궁에게 경질을 당하기도 했다. 이설은 주 상궁을 말리느라 되려 진땀을 뺐다.
연국에서는 왕족은 물론 평민들 역시 탄신일을 각자의 일 년에서 기일 중의 기일로 여기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지만 금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황제나 태자의 탄신일 정도가 아니라면 황족이라 해도 그의 탄신일은 조촐히 넘어가는 편이라고 들었다. 학운관에서 소운에게 열심히 금국의 문화를 공부해 둬서 다행이었다.
물론 이런 이유로 일부러 주변에 알리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사실 이설 역시 까맣게 잊고 지낸 것이 주된 이유라면 이유였다.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들의 날짜를 세는 것이 언제서부턴가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정신을 차려보면 반월이 엄지손톱의 끝처럼 얄쌍해져 있고, 다시 또 어느 밤이 되면 만월이 되어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아침부터 육전에 기름진 전들을 잔뜩 먹어 소화가 더디다. 어제저녁에서야 이설의 탄신일을 알게 된 궁인들이 부랴부랴 준비한 오늘 아침의 진수성찬은 이설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양이었다. 금국 사람들의 식사 양이란, 겪어도 겪어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소화도 시킬 겸 소야원 끝에서 끝을 왔다 갔다 걸어 다니던 이설에게 기연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찾아왔다.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한 뒤에야 나무 등위에 나란히 앉았다.
“훈련 감독은 어쩌고 이 시간에 다 찾아왔지?”
기연은 얼마 전 수습 근위병으로 훈련을 받는 유강을 찾아가 검술 지도를 해 줬던 것이 금군 소부대 수장에게 눈에 띄어 훈련병들을 상대로 검술 지도를 해 주는 중이었다. 호위무사 직책으로 이설을 따라 금국까지 왔지만 그동안 검집에서 검 한번 꺼내 볼 일 없는 단조로운 날들이 다반사였던 기연에게 하루 중 가장 활기찬 시간이었다.
“잠깐 정도는 괜찮습니다. 마마께서는 산책 중이셨나 봅니다.”
“응. 오늘따라 날씨가 더 좋은 것 같아서.”
“딱히 오늘따라 좋다기……, 예, 근래 들어 날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이설에게라도 아닌 걸 맞다고 입바른 소리 하는 법이 없는 기연일지라도 이 정도의 배려는 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후, 하고 길게 뱉은 이설이 영 꺼림칙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기연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기연은 그저 멋쩍게 어깨로 길게 내려온 머리끈만 만지작거렸다.
“못 보던 머리끈이네.”
“……예.”
“수가 참 예쁘게 잘 놓였구나.”
“그렇습니까?”
“근데 참 신기하네.”
“무엇이 말입니까?”
이설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기연의 머리끈에 손을 갖다 댔다.
“화홍이도 며칠 전에 원앙 자수 놓는 것을 봤었거든.”
머리끈 끝에 도톰하게 수놓아진 원앙새 두 마리를 만지작거리며 이설이 생긋 웃었다. 더위에 열이 올랐던 기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더 붉어지자 이번에는 이설이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변명의 기회를 엿보던 기연이 이내 포기하고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송구합니다. 허나 마마를 모시는 일에는 방해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옵소서.”
“송구할 일도 아니고, 너와 화홍이의 관계가 내게 방해가 되는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거라.”
‘하오나,’ 하며 괜한 말을 더 꺼내려는 기연에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더 듣고 싶지 않다는 이설의 신호라는 걸 아는 기연이 먼저 포기했다.
“그런데 이설 님.”
“……응?”
입궁한 뒤로는 기연에게 들어 본 적 없는 제 이름이 어색했다. 입궁 초반에는 기연도 옛날 버릇을 고치지 못해 이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일쑤였지만 주 상궁이며 다른 궁인들에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나기를 벌써 몇 번. 지금은 온 궁을 뒤져 봐도 이설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오지 황제뿐이었다.
“요즘 폐하와 사이가 무척 가까워지신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
“조찬도 항상 함께 드시고, 해가 지면 산책도 같이 나가시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는 뱃놀이도 다녀오셨고요.”
기연의 말이 맞다. 그제쯤까지는 매일 조찬을 함께 들었고, 이따금 황제의 정무가 일찍 끝마치는 날에는 해가 지고 난 뒤라도 능소화가 만개한 비은궁 담벼락을 따라 함께 걷기도 했다. 푸른 잎사귀와 다홍색 꽃으로 담벼락을 뒤덮은 능소화 덕분에 비은궁 담길은 황궁에서 가장 많은 궁인들이 오고 다니는 곳이 되었다.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보다는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둘 사이가 크게 달라진 건 없어. 폐하께서는 여전히 금의 황제이시고, 나는 그저 볼품없는 사내 후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