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86화
“소운이 아니더라도 천자를 가르칠 쓸 만한 학자들은 널렸으니, 설이 너도 아쉬워할 거 없다. 그만 인상 펴거라.”
이설의 얼굴에 드러난 우울함이 좋은 스승을 놓쳐 아쉬운 마음으로 생겨난 것이라 여기기라도 했는지 황제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하며 황제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내 다 소용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긴 한숨과 함께 고개만 가로 저었다.
태자를 보니 저보다도 침울한 얼굴로 호수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뽀얀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볼이 전보다 더 부풀어진 걸 보니 심통이라도 난 모양이다. 제 나이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이 귀엽다. 앞으로는 이런 모습을 볼 기회가 반 토막 나 버렸다.
“뱃놀이 내내 그런 얼굴을 할 건 아니겠지?”
“볕이 뜨거워 눈이 부셔 그런 것이니 부디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마침 볕이 점점 뜨거워져서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던 때였으니 황제에게 거짓을 고한 건 아니었다. 보기 싫게 찡그러져있을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풀었다. 태자가 눈이 많이 부시냐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딴 쓸모없는 것을 차양이라고 구해 오다니.”
혼잣말하는 황제의 분노가 누구에게 향해 있을지 짐작이 가는 바. 승상이나 되는 위치에 앉아 새벽부터 황제의 뱃놀이를 준비하느라 노고가 많았지만 황제에게 좋은 소리는 역시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차양이 만든 그늘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던 이설에게 황제가 손을 뻗었다. 멀리 주악 소리에 묻혀 잘 듣지 못해 한 번 더 되묻자 황제가 다시 손짓했다.
“내 옆에 와서 앉아.”
“신첩이 일어나면 배가 흔들릴 것입니다. 곧 그늘이 질 테니 괜찮습니다.”
“사람 한둘 일어나 움직인다고 배가 뒤집힐 것 같으면 세상천지 누가 뱃놀이를 하겠느냐? 잔말 말고 어서 이쪽으로 와.”
조금 전 태자가 몸을 이설 쪽으로 기울이기만 해도 무섭게 핀잔을 주던 황제가 저를 보는 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이설을 불렀다. 태자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화과자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황제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해 자리에서 조심히 일어났다. 태자처럼 작은 아이가 움직여도 좌우로 흔들리던 배는 이설이 걸음을 옮기자 한쪽으로 무겁게 기울어졌다.
“그저 흔들리는 것뿐이다. 겁먹지 말고 이쪽으로…….”
“앗……!”
“옳지, 잘했다.”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었다. 작은 보폭으로 세 걸음 정도.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는 이설이 가까워지자 황제가 이설의 팔목을 아래로 잡아 끌었다. 난폭하게 잡아당긴 것은 아니었지만 배도 흔들리는 데다가 바닥이 평평하지 못해 균형 잡기도 어려웠던 이설이 황제 위로 엎어졌다. 크고 두툼한 방석은 물론 황제의 몸 위로 넘어진 덕분에 다친 곳은 없었지만 놀란 마음에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지 않으셨어요?”
“네…… 네, 괜찮습니다. 조금 놀라서……. 송구합니다 폐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설마하니 꽃 한 송이 몸 위로 떨어졌다고 다쳤겠느냐?”
“예?”
“듣지 못했으면 됐다.”
당연히 듣지 못했을 리 없는 말이 귓가에 맴돌며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차라리 못들은 척을 해야 할 것 같아 태연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이미 달아오른 얼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황제가 제 의복 소매에 풀린 끈을 정리해 주느라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볕이 많이 뜨거웠느냐? 얼굴이 벌써 벌겋게 익었는데.”
“예? 아닙니다, 조금…… 더워서…….”
이설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황제는 이설의 볼에 손바닥을 대며 체온을 가늠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간간이 들리는 단어의 조합으로 유추해 보건데, 차란을 비난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이설을 제 옆 가까이로 끌어다 앉힌 황제가 배 앞머리에 앉아 있던 뱃사공을 불렀다. 나무 그늘이 있는 연못 가장자리로 배를 옮기라는 말에 뱃사공이 다시 노를 저었다. 묵직한 나룻배가 잔물결을 가르며 느릿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악공들의 연주 소리가 조금 더 멀어졌다.
“기대했던 뱃놀이가 그리 즐겁지 못해 유감이구나.”
“아닙니다. 기대했던 만큼 즐겁습니다.”
“너는 참 거짓말을 못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하는 이설에게 황제도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리고는 이설이 다시 부인을 하기 전에 덧붙였다.
“이 정도로 못하면 그냥 하지 않는 게 나을 텐데 말이야.”
“어느 안전이라고 신첩이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정말 기대했던……,”
“이러니 내가 또 속아 주는 수밖에.”
못미더운 눈치가 가득한 두 눈에 결국 웃음이 스며들었다. 오늘 황제를 만난 이례로 처음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황제 입장에서는 뱃놀이 내내 웃을 일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가암못에 급히 띄운 나룻배는 황제 기준에 너무 낡고 허름했고, 차란이 구해 온 품목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개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설이 ‘가져온 것’이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던 이설의 옆에 쫄랑쫄랑 붙어 따라오던 태자는 그야말로 불청객이었다. ‘소자도 함께 뱃놀이를 가도 되겠습니까, 아바마마?’ 하고 묻는 천진한 얼굴에 황제는 일말의 너그러움도 베풀지 않았다.
하지만 태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뻔뻔했고, 이설은 마음이 약했다. 대놓고 소봉궁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도 주눅이 들기는커녕 축 쳐진 눈을 이설에게 들이대며 칭얼거리기를 두어 번. 뭣도 모르는 이설이 태자도 같이 뱃놀이를 가면 안 되겠냐며 청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태자를 배에 태웠다. 덕분에 궁인들만 급히 태자 자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태자를 태운 나룻배는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기대하던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이설과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 볼까 싶으면 태자가 ‘그런데 마마’ 하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이설의 관심을 끌었다. 황제는 정말이지 태자가 이렇게까지 잔망스러운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또래에 비해 의젓하고 어른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어른들이 하는 양 상대를 가려 가며 제 태도를 바꾸는 영악함을 도무지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고작 해야 아홉 살 사내아이. 그것도 제 양자로 입적한 아들이며 그 이전에는 제 조카다. 근데 그런 태자가 특별할 것도 없는 제 후궁과 친밀하게 지내는 게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할 일인지 모르겠다. 물론 세간에는 이름을 새긴 정인이라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황제 한 사람 만큼은 이설을 그런 존재로 여기지도 않았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태자가 이설에게 부쩍 친한 척을 하는 데에 기분이 나빠야 할 이유가 없다.
“……테니 그 때는 꼭 소봉궁에서 조찬을 드시기로 약조하시는 겁니다?”
“조찬? 태자, 지금 내게 하는 말이었느냐?”
평소 버릇처럼 이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잠깐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태자의 명랑한 목소리를 듣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이설은 황제에게 어깨가 안겨 있는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멋쩍은 웃음으로 손부채질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마께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소자가 아바마마께 조찬 약조를 청하다니, 아바마마도 참.”
이설에게는 한번 보이지도 않았던 기가 찬다는 표정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누굴 닮은 고약한 버릇인지 조찬 드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태자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제게 조찬 약조를 청하는 줄 알고 의아해 되물었던 것인데 옆에 이설이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이설과 조찬을 들겠다고?”
“예.”
“안 될 텐데.”
여유가 넘쳐흐르는 다정한 목소리가 태자를 발끈하게 했다. ‘어째서입니까?’ 당돌한 어투가 평소 같았으면 황제에게 버릇이 없다 한 소리 들었을 테지만 어쩐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태자의 되바라진 태도를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설이는 이미 조찬 약조가 있거든.”
“……그게 정말입니까 마마?”
의심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초리가 이설을 향했다. 이설의 멋쩍은 웃음이 한층 짙어지자 황제도 따라 웃었다. 제 품 깊이 안긴 이설의 팔이 슬며시 황제의 허리를 감았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며 흔들리니 불안함에 저도 모르게 하는 행동일 테지만 황제는 그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는 않았다.
“예, 전하. 하지만 하루 정도는,”
“단 하루도 빠질 수 없는 조찬이다. 그렇지, 설아?”
귀가 녹아들어 갈 듯 다정한 목소리는 이설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넌지시 알려 준다. 평소에는 둔하기 짝이 없는 이설에게 아주 약간의 눈치가 생긴 모양이었다.
“……예. 예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조찬입니다.”
송구합니다, 하고 이어지는 말은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가지 흔들리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흐뭇하게 웃는 황제의 얼굴이 뾰로통 토라진 태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제 딴에는 화가 난 얼굴이겠지만 아홉 살배기 아이의 화난 표정이라고 해 봐야 저기까지다. 이설보다도 눈치가 빠른 아이이니 흘러가는 대화의 방향이나 의도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더 심통이 나 있을 테고.
아무렴 태자가 지금 얼마나 심통이 나있는지 무슨 상관일까 싶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이설이 티내지 않으려고 애는 쓰지만 별 소용도 없이 화들짝 놀라며 제 품으로 더 깊이 안겨 들었다. 차란이 봤다면 태자 전하를 상대로 무슨 유치한 짓을 하신 거냐고 주제넘게 한 소리 지껄였을지도 알고 있다. 그래도 기가 팍 죽어 입술이 대번에 튀어나온 태자를 보고 제 품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애쓰는 이설을 보게 됐으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황제는 기분 좋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