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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85)화 (85/300)

달의 황홀경

85화

“마마? 제가 방금 한 얘기 들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송목(松木) 나룻배와 회목(檜木) 나룻배 중 어느 쪽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물론 추목(楸木) 나룻배가 가장 좋을 테지만 여유가 없어 거기까지는 준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무슨 목재로 만들었든 나룻배가 다 같은 나룻배이지 종류를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일까. 아직 소운의 일이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와중에 차란까지 도통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는 것들을 물으니 퍽 난감해졌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이설에게 차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역시 추목으로 준비하는 게 좋으시겠지요?”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굳이 준비가 어렵다는 것을 억지로 원하고 싶지는 않아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나룻배 종류 같은 건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 승상께서 편하신 것으로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설의 대답을 듣고 차란은 마마께서는 마음씨도 너그러우시다며 좋은 소리를 했지만 이설은 그저 마음만 불편했다.

황제가 소운과 단둘이 나눌 사적인 이야기가 궁금해서 차란이 하는 말에 집중할 수가 없다. 소운이 다친 것에 대해서만이라도 물을까 말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이설이 결국 경솔하게 굴지 말자며 스스로를 타일렀을 때 쯤 차란이 다 식은 차로 입술을 적셨다.

“단소운 태감은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감께서 다치신 연유를 폐하와 승상께서는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차란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모호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흉이 있던 곳에 다시 상처가 난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별로 괜찮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빈말이라도 이설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괜찮을 거라고 대답해줄 줄 알았던 차란은 의외로 솔직했다. 이설의 대답을 적은 두루마리를 챙기며 무심하게 대답하는 얼굴에 장난기는 없었다.

“그러니 폐하께서 소운을 먼저 데리고 나가신 거겠지요.”

“혹시 태감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황제의 얼굴을 기억한다. 어렸을 적부터 친우 사이라고 들었고, 황족에게만 개방된 서고 출입을 허락할 정도로 돈독한 사이이니 쓸데없는 기우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황제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본인이 자처한 일입니다. 마마께서는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승상께서 폐하께 말씀 좀 잘해 주시면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폐하께요?”

이설의 말을 오해하기라도 한 건지 차란이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차란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던 걸까.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말을 정정하려 했지만 차란의 말이 더 빨랐다.

“폐하께서 소운에게 화가 나신 건 맞습니다만 그게 어디 저만 하겠습니까.”

“예?”

“폐하께서 소운을 먼저 데리고 나가신 건 저에게서 소운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뿐입니다. 부디 심려치 마시옵소서 마마.”

환하게 웃는 얼굴을 어떻게 봐도 억지로 짓는 미소다. 가지고 온 물건들을 챙겨 나가는 차란은 배웅하러 나오는 이설을 한사코 말리며 급히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침소에서 이설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내일 있을 뱃놀이를 막연히 기대했다.

*

햇살이 따뜻한 오후. 호숫가 한 쪽에 자리 잡은 악공들의 연주가 가암못 물결 위로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경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궁인들은 모두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멀리 물리고 수발을 들어 줄 최소한의 궁인들만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몸을 숨겼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가면 축 처진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며 아득한 소리를 내고 사라졌다.

호수 잔물결을 따라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나룻배 위에는 진수성찬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잔에 반쯤 채워진 술이 넘칠 듯 말 듯 찰랑거렸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때. 뱃놀이란 참 좋은 것이구나, 태평한 여유를 즐기기 가장 좋은 시간.

애석하게도, 지금 이 순간 이설은 당장에라도 호숫가에 몸을 던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부산스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좀 앉아 있거라. 배가 흔들리지 않느냐?”

“배가 흔들리는 것은 모두 아바마마 때문입니다.”

“뭐?”

“아바마마께서 자꾸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시려 하니 배가 흔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아바마마께서 움직일 때마다 배가 기울지 않습니까?”

“네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될 일 아니냐.”

“소자는 몸이 가벼워 어느 자리에 앉아 있어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망망한 호수 한가운데 떠있는 커다란 나룻배 하나. 그 위에 황제와 이설.

“……태자. 당장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앉아.”

그리고 태자가 함께였다.

오늘 낮.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뱃놀이를 나서려던 이설을 찾아온 태자가 이 사달의 시작이었다. 어딜 가시는 길이냐고 묻기에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어 가암못이라는 곳에 뱃놀이를 간다 말했고, 그 대답에 시무룩해진 태자를 보고 마음이 약해진 이설이 함께 가지 않겠냐며 권유했다. 태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설을 따라 나섰다.

가암못 버드나무 가지 아래에서 이설을 보고, 정확히는 이설 옆에 붙어 서 있는 태자를 보고 서슬 퍼런 눈을 번뜩이는 황제는 다시 생각해도 다리에 기운이 빠졌다.

허락 없이 동행하기는 하였지만 설마하니 황제가 이렇게까지 태자를 못마땅하게 여길 줄은 몰랐다. 배에 올라타기 전 소봉궁으로 돌아가라 애둘러 말한 것이 두 번, 대놓고 말한 것이 한 번. 태자는 세 번 모두 이설의 핑계를 대며 능청스럽게 넘어가며 함께 나룻배에 올라탔다.

혀와 귀를 녹이는 주악과 산해진미가 다 무슨 소용이람. 당장 어느 눈치를 살펴야 하나, 앉은 자리가 가시 방석이기만 한데. 차란이 수고스럽게 구해다 준 목화솜이 두툼한 방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

“보십시오 아바마마. 소자는 몸이 가볍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 위험하십니다.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작은 반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황제와 이설의 사이에 태자가 앉아 있었다. 황제를 아예 등지고 돌아간 몸은 틈만 나면 이설 쪽으로 기울어졌다. 덕분에 나룻배가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황제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기어코 자리에 일어선 태자가 발을 옮겨 이설의 옆 자리에 앉았다. 조심치 못한 동작에 배가 옆으로 기우뚱 기울어지자 이설이 다급한 마음에 태자의 몸을 당겨 끌어안았다.

“전하! 하마터면 배가 뒤집어질 뻔했습니다.”

“걱정마세요, 마마. 조금 흔들린 것뿐입니다.”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은 태자의 말에도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심스레 태자를 품에서 놓았다. 천진한 웃음이 이설을 안심시키며 장난이 심했다며 사과했다. 배가 뒤집어지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태자가 사르르 눈웃음 치는 것을 보니 또 금세 마음이 풀려 버렸다. 오랜만에 본 태자는 전보다 웃음이 더 많아져서 보기 좋았다.

“태자.”

마주 보고 웃는 두 사람 사이를 비집으며 황제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어깨 부상은 다 나았느냐?”

“예, 태의를 보내 주신 덕분에 일찌감치 다 나았습니다.”

“몸도 모두 회복했고 태감도 주안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글공부를 다시 시작해도 되겠구나.”

“예, 그렇지 않아도 스승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설 옆 자리에 딱 붙어 앉아 아이처럼 웃던 태자가 황제에게는 누구보다 의젓하고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이설에게 고개를 돌리며 천진하게 물었다.

“그럼 내일부터는 저희도 학운관에서 만날 수 있는 거지요?”

태자가 완쾌했고 소운이 돌아왔다면 이설도 다시 글공부를 할 수 있다. 요즘 서책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천자 공부에 대한 흥미가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하루 한 번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학운관을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꼭 글공부가 아니더라도 소운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좋아서 학운관은 꾸준히 나갈 생각이었다.

“만날 수 없어.”

이설과 태자, 두 사람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가르고 묘하게 싸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족의 이름에만 사용한다는 새로 배운 천자 29자를 태자에게 자랑하려고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황제와의 관계가 부쩍 친해졌지만 가끔씩 저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아닌 척 눈치를 보며 얼굴색을 살펴보면 열에 아홉은 서슬 퍼런 눈빛이 무심히 저를 보고 있다.

“학운관은 태자 네가 학문을 수련하는 곳이지 이설이 글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다.”

평소와 다른 점은 황제의 눈길이 향한 곳이 자신이 아니라 태자 쪽이었다는 것이다.

태자는 황제의 말과 표정에도 주눅 드는 기색 하나 없이 대꾸했다.

“허나 마마께서는 저와 이미 오랫동안 학운관에서 글공부를 하셨는걸요. 스승님께서도 함께 수학하는 동문이 있는 것이 더 좋다 말씀하셨고요.”

“수학 동문이라면 걱정 말거라. 네 또래의 적당한 아이를 찾아보고 있으니.”

“다른 이는 필요 없습니다. 소자는 루 소의 마마 한 분이면……,”

“태자.”

“……예.”

황제가 무슨 말을 해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대답하던 태자가 결국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황제의 태도가 더 크게 사나워지지는 않았지만 분위기상 제 고집이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한 눈치였다.

“이설은 나의 정인이자 후궁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네가 이설을 잘 따르는 마음은 이해하나 딱 거기 까지다.”

“예.”

딱딱한 대답과 함께 이설 쪽으로 심히 기울어졌던 태자의 몸이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멀뚱히 자리에 앉아 있는 이설은 자리가 껄끄러운 정도를 넘어서 이제는 숨 쉬는 것마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뱃놀이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째서 태자가 황제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며, 하물며 그 옆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는 건 또 뭐람.

“봐라. 네 괜한 고집 때문에 설이 마음만 불편해졌잖느냐?”

애써 티는 안 내려고 했지만 이런 상황이 익숙할 리 없는 이설의 얼굴이 울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태자를 봤다, 황제를 봤다 불안한 눈동자가 둘 곳 없이 헤매는 모습을 보며 황제가 태자에게 핀잔을 주었다. 방금 전 보다 싸늘한 기운이 한층 가신 데다가 잘만 들어 보면 되려 장난기마저 섞인 목소리였지만 태자도, 이설도 모두 웃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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