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84)화 (84/300)

달의 황홀경

84화

친척 어른의 부고로 인해 수도를 잠시 떠났던 소운이 오랜만에 황궁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황제를 뵙고 그 뒤 태자의 궁에 들렸다가 비은궁으로 곧장 찾아온 소운은 그새 안색이 심히 나빠져 있었다. 이설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부를 물었지만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괜찮다는 대답만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전에 선명하게 흉이 졌던 손목에 다시 흰 헝겊을 묶어 놓은 걸 보니 다시 상처가 생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찻잔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걸 보며 이설이 도리어 안절부절못했다.

“의원이라도 불러들일까요?”

“괜찮습니다. 괜한 걱정 만들어 드려 송구합니다.”

“괜한 걱정이 아니라 지금 태감 손목에 피가…….”

두껍게 감아 놓은 흰 헝겊 위로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제 피를 본 것도 아니면서 놀라 나자빠지려는 이설을 달래며 소운이 그 위를 손으로 가렸다. 억지로 웃는 게 분명한 얼굴이, 애써 아픈 티를 감추며 화제를 돌렸다.

“그간 천자 공부는 열심히 하셨습니까?”

“…예에, ……열심히는 못 했습니다.”

서책을 보느라 요 며칠 천자 공부를 게을리했다. 역시 천자 공부보다는 서책을 읽는 게 훨씬 재미있다. 하지만 이 얘기를 곧이곧대로 소운에게는 할 수 없어 말을 삼갔는데, 소운이 먼저 아는 척 말을 꺼냈다.

“최금서에는 흥미로운 서책들이 무척 많으니, 읽고 싶으신 게 있거든 다 읽어 보시는 게 좋습니다. 천자 공부야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요.”

“태감께서도 폐하의 서고에 출입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좋은 서책이 있거든 제게도 알려 주세요.”

흉이 깊이 지긴 했지만 상처는 없었던 손목에 왜 다시 피가 보이는 건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설이 수상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피하고자 하는 소운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수는 없는지라 일부러 못 본 척 시선을 돌리고 소운이 던진 화제를 쫓았다.

소운은 재미있게 읽었던 서책들의 제목을 성심성의껏 적어 주었다. 손목이 아픈 탓에 글씨가 삐뚤빼뚤한 것이, 평소 반듯한 글씨체와는 거리가 멀어 이설이 조금 웃었다. 소운은 태연한 척하긴 했지만 제 손으로 쓴 엉망진창 글씨가 약간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서고 관리에게 전해 주면 알아서 찾아 줄 것입니다.”

“앞에 두 권과 여기 한 권은 이미 읽은 것입니다.”

“별로 유명한 서책이 아닌데, 마마께서는 서책을 고르시는 안목도 높은 것 같습니다.”

소운에게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다. 황제에게 좋은 소리를 들었을 때와는 종류가 달랐다. 어렸을 적 학문을 배우던 스승님께 칭찬을 받을 때와 같은 뿌듯함이었다.

“안목이라면 제가 아니라 비 승상이 높은 것일 겁니다. 세 권 모두 비 승상께서 알려 주신 서책입니다.”

읽고 싶은 서책을 몇 권 부탁하고 나니 눈치 빠른 차란이 이설의 취향을 금세 파악했다. 구해줄 수 있는 서책은 제 상단을 통해 가져다줬고 황궁 서고에서 구할 수 있는 서책은 이설에게 귀띔해 줬다. 그렇게 알게 된 서책 세 권을 소운이 추천해 준 게 더 신기했다. 황궁 서고의 수많은 책들 중에 고른 몇 권이었는데.

차란의 말을 꺼낸 순간 이설은 또 아차 싶었다. 소운의 표정이 삽시간에 나빠졌다. 조심했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소운을 만나 잠시 경솔했다.

소운은 차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무척 온화하고 순화된 표현일뿐 사실은 싫어한다, 라는 감정에 더 가까웠다. 어쩌다 차란 얘기가 나오면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화제를 돌리는 게 일쑤고 황궁을 함께 걷다가 두어 번 차란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법도상 깍듯하게 인사만 나눠 했을 뿐 친우 사이에 생길 법한 친근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차란에게는 두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친우 사이라 들었는데 소운의 태도로만 보면 친분 없는 남남도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안타까운 건 차란 쪽이다. 소운이 쌩하니 지나가고 난 자리에 차란은 늘 어딘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설과 눈이 마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안부를 물은 뒤 사라졌다.

“네, 뭐….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소운이 차란의 얘기를 급히 마무리 지었다. 잠시 동안 지속되는 어색한 시간 사이로 주 상궁이 주전부리를 가지고 들어와 다행이었다.

“콩잎으로 만든 밀떡이군요.”

“예. 그, 금국 어느 지방에 명물이라며 전해 주셨는데 생각이 잘 나지 않네요.”

“추암 지방입니다. ……비 승상께서 전해 주셨군요.”

일부러 누가 전해 주었는지 말하지 않은 거였는데. 소운이 먼저 차란을 언급한 적은 처음이라 이설이 잠시 당황했다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운은 손에 든 밀떡을 모두 다 먹을 때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같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셔도 뭐 하나 맛있게 먹는 걸 본 적이 없는 소운은 주 상궁이 내주고 간 밀떡을 무척 맛있게 먹었다. 오물오물 씹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삼설이가 데친 호박을 먹는 것처럼 귀여웠다. 제 먹는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는 황제의 마음도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 모습이 삼설이나 소운만큼 귀여워 보였을 리 없기 때문에 이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마마, 황제 폐하께서 납시었습니다. 곧 침소로 드실 테니 준비 하시지요.”

장지문 밖에서 연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궁인들도 기별 없이 황제가 와도 예전만큼 당황하지는 않는다. 아직까지 예고 없이 찾아오는 황제에게 당황하는 건 이설뿐이다.

그제 늦은 저녁 황제가 보리감주를 따라 주며 뱃놀이에 데려가 주겠다 약조했다. 내심 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직접 청하기는 어려워 아닌 척 마음을 숨겼는데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내줘서 다행이었다.

연화의 기별 뒤 오래 지나지 않아 황제가 침소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언질이 있었는지 소운을 보고도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당황한 기색을 보인 건 도리어 소운과 이설 쪽이었다.

“비 승상께서도 함께 오실 줄 몰랐습니다.”

이설이 곁눈질로 소운의 표정을 살피며 차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 내일 뱃놀이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데에 마마의 의견이 필요할 것도 있고 드릴 것도 있어 겸사겸사 들렸습니다.”

“도대체 이런 곡괭이가 왜 필요한 것이냐?”

미묘하게 서로의 눈치를 보는 세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황제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불만스럽게 물었다. 차란이 들고 있는 헝겊으로 칭칭 동여맨 물건의 정체가 곡괭이인 모양이다. 일전에 이설이 차란에게 지나가는 말로 필요하다 말했던 것이었다.

“도월소 옆에 땅에 자갈돌이 많아 흙을 고르려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하느냐고.”

“……제 궁의 흙이니까요?”

답답함을 금치 못하는 황제를 보며 차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지고 온 물건을 구석 어디쯤에 내려놓으며 조심히 다루셔야 한다 신신당부를 했고 황제는 직접 다룰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세 분 담소 나누시지요.”

“같이 차라도 한잔 들고 가거라.”

적당히 자리를 뜰 눈치를 보던 소운이 말을 꺼냈지만 황제가 붙잡았다. 예의상 자리를 비켜 주려던 생각이 아니었는지 소운이 재청했다.

“제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네가 못 낄 자리는 또 뭐냐. 들고 가.”

황제가 두 번이나 권하는 자리를 소운도 박차고 나가지는 못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하긴 했지만 결국 자리에 앉아 주 상궁이 새로 채워 주는 차를 받았다.

차란이 뱃놀이에 필요한 품목 중 이설의 의견이 필요하다며 묻는 것은 비단 방석과 마 방석 중 어떤 것을 더 선호하는지, 차양은 둥근 것이 좋은지 네모 각진 것이 좋은지를 묻는 것 따위였다. 그리고 배 위에서 먹을 음식은 뭐가 좋을지, 좋아하는 과일은 뭔지, 차는 식전에 마시는 게 좋은지 식 후에 마시는 게 좋은지 끝없이 묻는 통에 이설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차란이 얼토당토않은 것을 물으면 황제라도 나서서 핀잔을 줄까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설이 어영부영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면 황제가 대신 답해 주는 게 고작이었다.

“식전에는 입맛을 돋우는 약초를 우린 차를 드시고 식후에는 향이 좋은 과실차로 준비할까요?”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식전 차는 필요 없다. 국화주나 잘 준비해 둬.”

“술도 마셔야 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뱃놀이에 모름지기 술이 빠지면 되겠냐며 코웃음을 치는 황제에게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자 차란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웃음을 짓다 머리를 쓸어넘기던 소운과 눈이 마주쳤다. 삽시간에 굳은 얼굴이 소운에게로 고정되었다. 대놓고 소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차란 때문에 황제도 자연스레 소운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일순 싸늘하게 식은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감겼다.

“소운.”

차란이 적어 놓은 목록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악공의 수가 다섯이 좋을지 일곱이 좋을지, 것보다 도대체 뱃놀이에 왜 악공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던 이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제가 이렇게 차갑게 소운을 불렀던 적이 없었다.

“손목을 다쳤구나.”

“…….”

“또 손목을 다쳤어.”

소운을 쳐다보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확히는 소운의 헝겊 감긴 손목을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소운은 대답하지 않았고 차란의 깊은 한숨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세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싸한 분위기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건 이설뿐이었다. 아무래도 소운이 손목을 다친 것이 황제와 차란에게는 굉장히 곤란하거나 또는 기분이 나쁜 일 중 하나인 듯싶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지금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세 사람이 얘기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줘야 하나 고민할 때쯤 황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운은 이만 나와 일어나지.”

“……예.”

“차란. 이설과 마저 얘기를 끝내고 돌아와라.”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난 소운은 황제의 싸늘한 태도에도 주눅 들지 않고 평소처럼 침착하게 뒤를 쫓았다.

“오늘 저녁은 혼자 들어야겠다.”

“예, 저는…, 아니 신첩은 괜찮으니 괘의치 마시옵소서.”

“내일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이설의 배웅을 받으며 황제가 침소를 나갔다. 이설에게는 애써 성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에서부터 이미 황제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작 소운은 의연한 태도로 이설에게 인사한 뒤 침소를 나갔다.

차란은 이설과 둘만 남게 되자 다시 평소의 서글한 미소를 얼굴 만면에 둘렀다. 소운이 왜 다쳤는지, 소운이 다친 게 왜 황제와 차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지, 황제는 소운과 무슨 이야기를 하러 저리 급히 나가신 건지, 궁금한 게 한 수레였지만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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