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83화
“폐하께서는 아직 비은궁에 계신가?”
“조금 전에 태금궁으로 돌아가셨어.”
“용케 밤을 안 보내신단 말이야.”
황제가 비은궁에서 밤을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하기도, 조금은 답답하기도 한 것처럼 차란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이설을 향한 황제의 대우는 확실히 다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후궁들에게 무정하기는 해도 이유 없는 박대는 이제껏 없었는데, 이설에게는 초야부터 소박을 당하게 했다. 그리고는 만날 때마다 말로 갖은 수모를 다 주더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무를 미루고서라도 보러 가는 사람이 되었다. 황제가 쌓인 상소문을 내팽개치고 집무실을 나서는 이유가 후궁, 그것도 사내 후궁이라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아마 믿지 않았을 거라고,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차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와중에 비은궁에서 밤은 보내지 않는다 하니, 차란은 그게 의문인 것이다. 우장절 기간 중에는 그래도 두어 번 비은궁에서 밤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우장절이 끝난 이후로 한동안 황제가 비은궁을 찾아가지 않긴 했었다. 얼추 그 즈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다.
“비은궁은 아직 금군이 들어갈 수 없나?”
“어.”
“너도?”
“복도까지만.”
흑영이 무뚝뚝하게 단답으로 대답했다. 제 시야에 황제를 담을 수 없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황제는 금군의 비은궁 출입을 금지했다. 가타부타 다른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이설이 금군만 보면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기 때문이라는 것을 황제의 궁인들 모두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호위 무사들 역시 이설의 침소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당했다. 어차피 천장이나 벽 뒤에 숨도 쉬지 않고 숨어 있으면 둔한 이설은 어차피 그 존재조차도 모를 사람들이었지만 황제는 단칼에 불허했다. 황명이라면 군말 없이 떠받드는 흑영도 썩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황명은 황명이었다.
“두 분이서 뭘 하시길래 너까지 불허인 거지. 이해가 안 되네.”
황제가 다른 후궁들과 합궁하는 날에도 흑영은 천장에 몸을 숨겨 황제를 호위했다. 황제가 가는 곳에 흑영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었는데, 그 예외가 된 곳이 비은궁 딱 한 곳이다.
정말 궁금하기는 했지만 딱히 대답을 듣고자 해서 물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들은 흑영이 툭 하니 던지듯 대답을 했다.
“그림을 그리시더라고.”
“뭐?”
“폐하께서 루 소의 마마께 그림을 그려 주셨어.”
담담하게 말을 하면서도 흑영도 믿기지 않기는 한 모양이다. 복면 너머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 높낮이만 들어도 차란을 알 수 있었다. 흑영도 지금 자신이 봤던 광경이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은 심정일 것이다.
“폐하는 이제 그림 같은 거 안 그리시는데.”
“알아. 근데 루 소의 마마께 그려 주셨어.”
차란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흑영이 바로 반박했다. 이 정도로 깜짝 놀란 차란의 얼굴을 보는 건 조금 오랜만이다. 차란은 좀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황제가 더 짓궂게 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흑영이 생각해도 차란이 이 정도로 놀랄 만은 하다. 서화에 능한 황제지만 누군가에게 글을 써 주거나, 특히 그림을 그려 주는 일은 흔치 않았다. 황제가 직접 그린 그림은 국익이 되는 공로를 세운 신료들에게 하사품을 전달할 때나 그려졌다. 그나마도 내키지 않아 하는 황제를 차란이 반나절 동안 어르고 달래 겨우 얻을 수 있는 한 장이었다.
“마마가 그리신 걸 네가 잘못 본 거 아냐?”
“루 소의 마마는……,”
어지간해서는 말끝을 흐리는 법이 없는 흑영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생각 중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재촉하지는 않았다. 잠시 뒤 흑영이 입을 열었다.
“루 소의 마마는 그림을 무척 못 그리고. 마마의 그림일 리가 없다.”
흑영이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혹시, 라며 말을 꺼낼 기회조차 만들지 못했다. 어쨌든 흑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제가 그림을 그려 이설에게 준 것이 된다.
역시, 이설만은 대우가 다르다.
*
지난밤 황제가 이설에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는, 기가 차는 얘기를 흑영에게 전해 들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진 거라는 낭설을 떠올렸다가 이게 무슨 불온한 생각이냐며 머리를 털었던 게 오늘 아침이다.
그리고 지금, 황제를 알현한 지 일다경 만에 차란은 다시 불온해질 위기에 처했다.
“뱃놀이를, 말씀이십니까?”
“도대체 몇 번을 되묻는 것이냐? 그래 뱃놀이 말이다.”
같은 대답을 세 번이나 한 황제 역시 답답하긴 하겠지만 차란의 당혹감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갑자기 폐하께서 뱃놀이를 준비하라 하시니 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어 그렇습니다.”
“제대로 들은 게 맞으니 그만 되물어라.”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뱃놀이란 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그 뱃놀이가 맞사옵니까?”
“뭐?”
“가령 배에서 하는 사냥이라든가 말입니다.”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묻는 차란은 보이는 그대로 진심이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뱃놀이’를 황제가 준비하라 이를 리가 없다. 황제가 생각하는 뱃놀이는 분명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른 놀이일 것이다. 어쩌면 산에서 잡은 짐승들을 물속에 던져 넣고 활을 쏴 잡아들이는 놀이일 수도 있다. 황제의 사냥 방식은 아니었지만 황제가 뱃놀이를 하는 것보다는 납득하기 쉬웠다.
오늘도 역시나 차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황제의 얼굴 위로 아침부터 짜증이 드리웠다. 뱃놀이를 준비하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명이라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윤 내관도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되물어 이미 기분이 나빴던 참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거라.”
“그럼 설마……,”
“가암못에 적당한 나룻배나 하나 띄어 놓아라. 이 때쯤이면 가암못 버드나무 절경이 딱 보기 좋을 때지.”
“그 보기 좋은 버드나무가 보기 흉물스럽다며 다 베어 버리라고 명하셨던 게 불과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었느냐?”
베었다고 대답하면 당장 베어 낸 나무를 도로 붙여 놓으라고 할 기세로 황제가 물었다. 그래서 차란은 더 기가 막혀졌다.
“영선사 가감역관(假監役官: 토목 영선(營繕)을 맡아 보던 종9품의 관직)이 사흘 밤낮을 빌고 빈 덕분에 버드나무는 아직 멀쩡합니다.”
“그래?”
황궁 조경에 평생을 바친 늙은 관리가 버드나무 수십 그루를 살려 보겠다고 사흘 밤낮 동안 황제를 찾아와 빌고 또 빌었다. 어차피 가암못은 평소에 황제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 있는 연못도 아니었다. 어쩌다 우연히 그 주변을 지나치던 황제의 눈에 운 나쁘게 걸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제 눈에나 흉물이었지 다른 사람들 눈에는 혼자 보기 아까운 절경이었다.
“다행이군.”
“폐하 그나저나 뱃놀이는 갑자기 왜 명하십니까?”
기실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차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대답에는 한 치의 틀림이 없다.
“뱃놀이를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기에, 내가 데려가 주겠다 했어.”
“……루 소의 마마 말씀이시지요?”
“그래.”
차란이 알만하다는 듯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들으면 황제가 원래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황제가 마지막으로 뱃놀이를 갔던 것은 즉위 훨씬 전이었다. 아무리 최근이라 해도 수 년은 더 전이었다는 말이다. 그나마도 선황의 약조를 대신 지켜 주기 위해 선 황후와 어린 태자를 데리고 억지로 나섰던 뱃놀이었다. 얼떨결에 같이 따라갔던 차란은 그 날 혼자 황제의 심기를 맞추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국은 배를 띄울 만한 큰 호수나 강이 없다더군.”
“네 연국은 국토가 다 산이니……, 그렇겠지요.”
“마침 가암못에 배를 띄우기가 좋아 다행이야.”
“가암못이야 뭐, 사시사철 뱃놀이 하기 좋은 곳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야 평생 가실 일 없으신 곳인 줄 알았습니다만.”
황제가 말을 하니 반응은 해 줘야 할 것 같아 대꾸는 해 주고 있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황제는 제 대답은 듣고 있지도 않다. 턱을 괴고 비스듬히 꺾인 머리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자세지만 표정은 여느 날과 무척 다르다.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에 전에 없던 생기가 생긴 것이, 암만 봐도 적응이 힘들었다.
황제는 내심 숨기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역시 고까운 티가 역력히 드러나는 차란을 눈치채고도 굳이 그 태도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차란이 저리 건방을 떠는 것이야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뱃놀이를 위해 차란이 구해다 줄 품목들이 길게 두루마리 한 장 분량이라 저 정도 건방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마침 윤 내관이 들어와 뱃놀이 때 필요한 품목들을 건네주자 차란이 경악했다. 꼴 보기 싫은 얼굴은 윤 내관에게 맡기고 황제는 고개를 틀어 창밖을 내다봤다. 멀리 손톱만 한 크기로 솟아오른 나무 한 그루 보이는 곳이 비은궁이다. 저 나무 덕에 황궁 어디에 있어도 비은궁을 찾기가 수월했다.
“폐하 여기 적혀 있는 것들을 모두 구하려면 적어도 열흘은 더 걸릴 것입니다.”
“열흘이나 걸릴 것 같았으면 네게 시키지도 않았지.”
“소신이 나서니 열흘이지, 다른 이들에게 맡기면 한 달도 빠듯할 겁니다.”
“그래, 그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자신감으로 이틀 뒤까지 내 적어 놓은 품목들을 빠짐없이 구해다 놓아라.”
황제의 얼굴을 한 번, 황제가 손수 적어놓은 품목들을 한 번. 아연실색한 얼굴이 다시 윤 내관을 향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비 승상 영감.”
불똥이 저에게라도 튈까 싶었는지 윤 내관은 꼬리를 단박에 자르고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차란은 잠시 어쩔 줄을 몰라 하는가 싶더니 이내 황제의 양해를 구하고 저 구석진 자리에 앉아 급히 구할 수 있는 품목들부터 차례차례 분류하기 시작했다.
물에 젖지 않는 가죽신과 목화솜이 두툼하게 들어간 비단 방석 따위 구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저 호들갑을 피우는 것인지. 황제의 혀 차는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지만 차란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어제 늦은 저녁 이설이 은근슬쩍 황궁을 나가 보고 싶다고 운을 뗐다. 금국은 연국과 무척 달라 이것이 알고 싶고, 저것이 보고 싶고, 쫑알쫑알 말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홀짝거리던 보리단주에 취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비실비실 안 그렇게 생겨서 술은 또 왜 그렇게 잘 마시는지 모르겠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구석이 하나씩 생기니 지루할 틈이 없다.
늘 불만 없이 처리하던 정무들도 이제 다 지겹다. 비은궁 후원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이설과 감주나 나눠 마시고 싶다.
그래, 감주 좋군.
“차란.”
“……예.”
좋지 못한 분위기를 감지한 차란이 대답하지 말까, 잠깐 고민하다 역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국화주도 한 병 추가해라.”
“…….”
“아니, 넉넉하게 세 병쯤이 좋겠어.”
이설이 꽤 술을 잘 마신단 말이지.
혼잣말이 혼잣말 같지 않게 목소리가 너무 컸다. 황당함에 대답을 잃을 차란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다 기둥 위에 몸을 숨긴 황제의 호위군과 마주쳤다. 복면에 감춘 얼굴은 안 봐도 뻔하다.
황제가 새삼 황제 같지 않아진 요즘 같은 날들로 보자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