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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80)화 (80/300)

달의 황홀경

80화

차를 다 마신 우 미인이 창밖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칭찬을 늘어놓았다. 고향 생각을 하며 감상에 잠긴 우 미인에게 후원도 구경해 보겠느냐 물으니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이설을 따라나섰다. 이설의 침소를 통하지 않고 궁을 돌아 걸어 들어온 소야원은 이제 담장을 따라 꽃들이 만개하여 우 미인을 어린아이처럼 들뜨게 만들었다.

“제 궁에도 작은 후원이 있습니다. 틈나는 대로 꽃씨를 심어 두긴 했지만 어쩐지 이렇게까지 잘 자라지는 않던데, 마마께서는 솜씨가 무척 좋은 것 같습니다.”

“금국은 날이 덥고 해가 뜨거워서 북쪽에서 흔한 꽃씨를 심어 봤자 잘 자라지 않습니다.”

“그럼 무슨 꽃을 심어야 내년 이맘때쯤이면 저도 이렇게 만개한 꽃밭을 가지게 될까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우 미인을 보자 이설도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애정을 준 나무와 꽃들이 잘 자라는 걸 보면서 비은궁의 궁인들도 정원을 가꾸는 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긴 했지만 역시 근본적으로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보여 주는 애정과는 달랐다.

이런 날씨에는 어떤 씨앗을 심어 어떻게 가꾸는 것이 좋은지 조근조근 설명하는 이설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우 미인이 그 옆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였다.

“마마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우장절이 끝난 뒤에는 해가 넘어갈 때까지 비가 거의 오지 않습니다. 한밤중에 이슬비 정도로는 꽃이 자라는 데 어림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수로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놀라 되묻는 우 미인에게 덤불을 들쳐 수로로 난 길을 보여 주었다. 어디로 연결되었냐고 묻기에 앞뜰에 커다란 연못, 도월소와 이어져 있다 대답하니 그제야 이 궁의 만발한 꽃과 울창한 나무들을 이해한 눈치다. 그러다 제 궁에는 수로가 없어 이런 정원은 꿈도 꿀 수 없을 거라 금세 시무룩해지는 걸 보니 이설은 제가 다 실망스러워졌다.

“시간 나는 대로 자주 놀러 오세요, 우 미인.”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도 마마께 귀찮은 일은 아니실까 염려가 되는데요.”

“귀찮기는요. 어차피 찾아오는 손님도 거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 폐하께서 매일같이 비은궁에 찾아오신다는 소식이 황궁에 파다 하……, ……송구합니다. 제가 또 경솔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활짝 핀 꽃의 코를 박고 향기를 맡던 우 미인이 흘러가던 말을 끊고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한껏 숙이는 모습을 보고 이설이 더 당황했다.

황제가 제 궁을 찾아오는 것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안 되는 비밀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 사실이 이미 황궁 바닥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틈만 나면 궁인들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찾아와 그 소문 덕분에 다른 궁인들이 자신들에게 감히 말도 못 붙인다며 신이나 했다.

차를 마실 때 주제넘은 말을 했다며 사과를 거듭하던 것보다 훨씬 안절부절못하는 우 미인을 어르고 달래 꽃가지 몇 개를 꺾어 주었다. 화병에 물을 담아 꽂아 두면 향기가 오랫동안 유지될 거라고 말해 줄 때까지도 우 미인은 웃지를 못했다.

끝내 어두운 안색을 지우지 못한 우 미인이 제 궁으로 돌아갔다. 대문 앞까지 배웅하려던 이설을 말리고 후원으로 왔던 길을 돌아 나갔다. 오랜만에 고향 얘기며, 새로운 소식들을 들어 즐거워진 이설의 얼굴 만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 미인에게 꺾어 주느라 상한 나뭇가지를 정리하기 위해 도구를 가지러 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놀라 나자빠질 뻔한 몸이 간신히 팔 할 쪽에 붙들려졌다.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이냐?”

“…아…, 그…… 폐하……?”

“그래, 네 폐하다.”

팔을 바짝 당긴 황제의 힘에 끌려가며 두 사람의 가슴팍이 거의 맞닿았다. 까딱하면 황제의 입술 언저리에 제 얼굴이 닿을 것 같아 상체를 뒤로 슬쩍 젖히자 곧 허리를 감은 팔의 힘이 약해졌다. 종종걸음으로 뒤로 물러나 인사를 하고 난 뒤 흰 의복에 또 흙이 묻은 곳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어린아이처럼 또 흙장난을 하고 있었냐며 핀잔을 받은 적이 이전에 몇 번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이냐 묻지 않았어?”

꼭 대답을 들어야 할 심산인지 황제가 재차 물었다. 적당히 둘러댈까 하다가 거짓을 고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금방 우 미인이 다녀가며 오랜만에 연국 소식을 전해 들어 기분이 좋았나 봅니다.”

“오랜만? 보름에 한 번씩 서신을 주고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 쪽에서 서신을 전해 줄 뿐 연국에서 받는 서신은 없습니다. ……헌데 그건 어찌 알고 계시는 겁니까?!”

황제의 말대로 보름에 한 번씩 연국으로 서신을 보내고 있다. 특별한 내용은 없고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할 것 없다는 내용 정도였다.

의도적으로 숨겨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서신은 언제나 기연이 밖에 나가 황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에게 전달하여 연국에 도착했다. 서신을 전달하는 이도 그때그때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이설이 보름마다 연국으로 서신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기연과 주 상궁 두 사람뿐이었다.

그동안 거짓말을 해 왔던 것은 아니지만 그걸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이설이 화들짝 놀라 묻자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 궁에 사는 후궁이 보름마다 고국으로 은밀히 서신을 보내는데 여간 수상해야 말이지.”

“수상한 내용을 적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저 제 사소한 하루 일상을 적은 서신일 뿐입니다.”

“알아. 읽어 봤거든.”

“예?”

“말했잖느냐.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고.”

“…….”

“금국 사내들은 모두 여인의 의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보기 영 민망스럽다던데. 어디, 지금 나를 보는 것도 영 민망스러우냐?”

사색이 된 이설에게 황제가 치렁한 금색 용포 자락을 흔들었다.

황제가 지금 저를 어떻게 놀리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설은 지금까지 연국으로 보냈던 서신들의 내용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얼추 기억나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모든 내용을 지금에 와서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짓궂음이 가득한 황제의 얼굴에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지만 이설은 당장 그런 사소한 것을 알아차릴 만한 정신이 없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서신이라 생각하여 금국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두어 줄 써 보낸 적이 분명 있었다. 내용이 아마,

“그리고 여기 황궁의 위계질서가 앞뒤 없이 너무 꽉 막혀 있다는 내용도 아주 잘 읽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게 사실이라면 짐은 네 말버릇부터 진즉 고쳐 주었을 테니.”

“저는 그런 의미로 적은…… 아니, 그게 그……, 신첩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저…….”

황제에게 매번 말실수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면서도, 신첩이라는 말은 저와는 도무지 어울리는 것 같지가 않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때에는 그래도 신경이라도 더 썼었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아무 말씀 없으시기에 개의치 않으신가 했는데, 역시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던 게 분명하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연국은 궁내의 법도가 많이 유한 편이기는 했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입장에서 보기에 황궁의 법도는 지나치게 엄격해서 가끔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많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금국은 연국과 달리 신분 간의 계급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제 잘못이 자명하여 더 이상 둘러댈 말이 없었다. 황궁을 욕보인 죄를 먼저 사죄해야 할지 아니면 후궁 된 신분에 ‘신첩’이라는 단어 쓰는 것을 꺼려 했던 오만함을 먼저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송구합니다.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랬던 것 같구나.”

바닥으로 고개를 푹 숙인 이설은 입꼬리가 올라선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황제는 금방이라도 바닥에 무릎이라고 꿇어앉을 기세인 이설의 팔을 잡아챘다. 더 놀려 줄까 가학심을 돋우는 구부정한 어깨가 흠칫 놀라 곧게 펴졌다.

“뭘 그리 놀라?”

“갑자기 잡으셔서…….”

“그러니까, 앞으로는 손대기 전에 네 허락을 구하고 잡으라 이 말이로구나.”

“절대 아닙니다. 폐하께서 제 몸에 손을 대고자 하신다면 언제든 그리하셔도 됩니다. 신첩의 허락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방금 그 말이 어떻게 들릴 줄 알고.”

뚫어져라 이설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결국 하, 하고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은궁 대문 앞에서 황제는 어느 후궁을 만났다. 저를 보고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반가운 기색 하나 없이 적당히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전한 뒤 급히 자리를 뜨는 그 후궁이 누군지 황제는 몰랐다.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이름조차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여인이 비은궁에서 나왔다는 것에 있었다.

후궁들끼리 서로의 궁을 드나들며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든 궁중 모략을 꾸미든 알 바 아니지만 그 후궁들 중 하나가 이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기분 좋게 찾아온 비은궁이었는데 대문턱을 넘기도 전에 짜증이 났다.

후원에 아직 혼자 있다는 이설을 보러 갔을 때까지도 짜증 난 기분은 여전했다. 뭐 하나 저한테 도움 되는 것 없는 다른 후궁들을 제 궁에 불러다가 무슨 수모를 당한 건지 기가 차 호통이라도 치려고 했다. 후원에 있다길래 어디 또 나무 아래 구석에서 온갖 청승은 다 떨며 앉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는 걱정이었다.

좀 전에 나간 그 후궁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지금 저와 달리 한눈에 봐도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은 꽃내음에 취해 황제가 뒤로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황제도 일순간 짜증 났던 마음이 풀려 방금 나간 그 후궁과는 무슨 얘기를 나눈 것이냐 엄히 물으려던 것을 관뒀다. 그리고 황제는 그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골리면 골리는 대로 모두 걸려 넘어오는 이설의 반응은 날이 갈수록 재밌어지고 있었다.

“예?”

“설아, 너는 되도록이면 생각을 오래 한 뒤에 말을 하는 게 좋겠다.”

황제가 꾸짖는 제 경솔한 언행을 반성하며 이설이 우울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했다.

“가져다준 서책은 다 읽었느냐?”

“아직 두 권 더 남았습니다.”

“어제는 당장 못 읽으면 죽을 것처럼 굴기에 기껏 전사본을 가져다줬더니, 어째서.”

“갑자기 우 미인께서 찾아오는 바람에 미처 다 읽지 못했습니다. 오늘 저녁까지는 모두 읽고 태워 없앨 테니 걱정 마시지요.”

“그러지 못할 거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읽으면 석반 전까지도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서책을 읽는 속도만큼은 빠르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이설이 자신만만하게 황제에게 반박했다. 약속한 시각보다 일찍 온 황제는 아마 차 한 잔 정도만 마시고 돌아갈 것이다. 그럼 석반 전까지 쉬지 않고 읽으면 서책 두 권쯤은 거뜬히 읽을 수 있다.

드물게 이설이 단호한 태도로 말하는 것을 보고도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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