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79화
차란의 생각과 달리 황제는 제 나름대로 감정을 잘 추스르고 있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딴 상자 따위 몇 번이고 집어 던져 버리고 싶었다. 딱 차란의 이마 정중앙을 향해서.
“맞으면 죽지는 않겠지만 많이 아플 겁니다. 그러니 던지지는 말아 주십시오, 폐하.”
황제가 살벌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며 상자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척하면 척이다. 황제가 저걸 던진 이상에야 피할 수는 없으니 미리 청이라도 드리는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상대의 화를 더 돋운다는 걸 알고는 있다.
아니나 다를까 가뜩이나 살벌한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슬슬 퇴청할 때가 되었나 싶었다.
“그럼 신은 이만……,”
“나가라.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
퇴청하겠다는 인사조차 마치지 못한 차란이 밖으로 쫓겨나듯 나갔다. 문이 닫힌 뒤에는 오늘도 어디 한 군데 얻어터지거나 잘린 곳 없이 무사히 퇴청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니 윤 내관이 다가와 인자하게 말을 건넸다. ‘오늘도 무탈히 퇴청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남이 했다면 저를 놀리는 게 아닌가 싶었겠지만, 윤 내관에게는 그런 간특한 의도가 없다. 그래서 차란도 진심을 담아 ‘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두 발로 걸어 나오긴 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아까 듣기로는 이따 저녁쯤 황제가 비은궁으로 간다고 했던 것 같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고, 황제는 지금 이설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다. 아니, 저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이설이 원인이다. 그리고 제 생각이 맞다면, 황제는 이설과 관련된 일에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편이 아니었다.
“밖에 윤 내관 있느냐!”
집무실 밖 복도까지 황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차란에게는 눈인사만 건넨 윤 내관이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윤 내관에게 내릴 명이야 안 들어도 뻔하다.
밖으로 나오는 길, 관리 두 사람이 황제에게 전할 상소문을 잔뜩 들고 지나쳐 가는 것을 보았다. 쓸모없는 짓이다. 황제는 곧 비은궁으로 떠날 테니까.
*
비은궁에 손님이 찾아왔다. 대문을 넘는 외부인이라고 해 봐야 황제가 가장 자주 찾아오는 귀빈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쩌다 한 번씩 오며 가며 들르는 차란이나 소운이 전부였던 곳에 처음으로 새로운 얼굴이 문턱을 넘었다.
“서책을 읽고 계시다 들었는데,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마침 차나 들며 머리를 식히려던 참이었는데 우 미인께서 딱 적당한 때에 오셨습니다.”
그냥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 만면에 드러난 우 미인을 안심시키며 이설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새 차를 마시며 다음 서책을 보려던 참이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좀 더 빨리 기별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 불찰이옵니다.”
“아닙니다. 제 궁인이 기별 전하는 걸 깜빡 잊었으니 따지고 보면 제 불찰이지요.”
서로 자기 불찰이다 하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간소한 다과상이 차려지고 화홍이 들어와 거듭 사과를 했다. 이른 아침 우 미인의 사람이 보낸 기별을 화홍이 주 상궁이나 이설에게는 전하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맞이하는 이 하나 없이 비은궁을 찾아왔을 우 미인의 심정을 생각하면 무척 미안했지만 다행히 우 미인은 개의치 않아 했다.
비은궁을 찾는 손님들과 하는 얘기는 대부분 내용이 정해져 있다. 황제와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얘기를 하며 서로의 취향이나 하루 일과를 조금씩 나눠 가는 중이고 차란과는 황궁 돌아가는 소소한 얘기를 들었다. 소운과는 서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거나 어떤 의문에 대한 해답, 또는 사실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게 주였다.
이렇다 보니 고향에 대한 얘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유항산 절벽 끝에 앵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지, 만설지로 향하는 좁은 골짜기에서 눈발이 흩날려 넘어오기 시작했는지, 일 년에 딱 한 번만 찾아오는 해국 상단이 이번에는 또 어떤 신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연국 국경을 넘었는지. 궁금한 것만 많을 뿐 소식을 들을 곳도 없었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연국에서 함께 온 유강은 요즘 낮 동안 황궁 수습 근위병들과 훈련을 받는 중이라 오후 늦게 궁으로 들어오면 앓는 소리를 하다가 잠에 곯아떨어졌고 기연은 기연대로 일이 바빴다.
이 와중에 우 미인이 찾아왔다. 하찮은 성의라며 직접 만든 약과를 꺼내 놓았을 때부터 이미 마음이 들떴다. 연국에서 차와 함께 늘상 먹던 약과와 같은 맛이 났다.
아직 부족 사람들과 간간이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우 미인은 연국과 그 국경 근처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크게 기뻐할 일도, 걱정할 일도 없는 사소한 것들이 전부였지만 만설지로 가는 골짜기로 눈발이 흩날려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우 미인께서는 입궁한 지 두 해가 조금 안 되셨군요.”
“예. 그런데 마음은 벌써 수십 해나 흐른 것 같습니다.”
“살던 곳이 그립지는 않으십니까?”
“그립지만 어쩌겠습니까. 저희 부족의 선택에 대한 대가인걸요.”
부족의 흥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연고 하나 없는 황궁에 들어왔으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싶었지만 생각 외로 우 미인은 황궁 생활에 나름 잘 적응한 듯싶었다. 처음에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게 무척 곤욕스러웠는데 지내다 보니 그것도 다 익숙해지기 나름이라며, 아직도 금국 음식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설을 위로했다.
“그나저나 루 소의 마마.”
“예.”
“한낱 미인 첩지를 받은 제게는 말씀을 낮추셔도 됩니다.”
“품계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어차피 다 같은 폐하의 후궁인 것을요.”
“어찌 다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힘없는 북방 이민족 족장의 둘째 딸이고, 마마께서는 연국의 왕족이신데요. 마마께서는 출신부터 다르시지요.”
소속된 나라도 없이 일정 주기마다 거주 지역을 옮겨 다녀야 하는 북방 이민족보다야 사정이 좀 낫기야 하겠지만 금국과 비교했을 때 연국도 국력을 운운하며 왕족 출신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빳빳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금 매장량이 높아 국고가 닳는 일이 없고, 이를 탐내는 나라들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위치나 지형이 아닌 것에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있겠지만, 비교 대상이 금국일 때는 말이 달랐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마마,”
갑자기 어려운 얘기를 꺼내려는 듯 우 미인의 태도가 짐짓 조심스러워졌다.
“양 소원 마마를 그리 어려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잠깐 긴장했던 이설이 우 미인의 말을 듣고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주제넘은 말을 드렸다며 우 미인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이설이 괜찮다 몇 번이나 말했다.
“저는 그저 양 소원 마마보다 루 소의 마마께서 품계도 더 높으시고 출신도 좋으시니, 양 소원 마마께서 하시는 말에 일일이 마음 불편해할 필요가 없다 말씀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하니,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 그대로, 우 미인이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우 미인이 보기에도 자신이 양 소원에게 오죽 기가 죽어 있었으랴. 걱정해서 하는 말인 것을 알기에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다만 반성은 하고 있다.
이설의 마음 불편하지 말라고 말을 해 놓고서는 우 미인이 되려 마음이 불편해 좌불안석이기에 화제를 돌려 우 미인의 부족 얘기를 물었다. 고향 얘기를 꺼내니 우 미인도 다시 얼굴이 화색이 돌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근래의 소식을 물으니 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듣자 하니 다른 이민족과의 오래된 영토 싸움으로 거주지를 잃은 우 미인의 부족에게 금국이 영토를 제공하고 군대를 보내 국경선을 지켜 줬단다. 부족의 평화와 안전을 얻은 대가로 우 미인은 일평생을 황궁에서 지내야 했고, 부족민들은 추운 북쪽 땅에서 싸워 살아남는 방법과 기술을 금국 병사들에게 전수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소수의 부족민들을 상대로 금국 병사들의 비인간적인 행패가 생기기도 하고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우 미인은 황궁에서 아무런 힘이 없으니 해결해 줄 방법이 없어 근래 들어 근심만 쌓인다고 했다.
“폐하께 말씀을 드려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제 근심이라도 된 듯 한껏 걱정스러운 눈빛과 함께 건네는 이설의 제안에 우 미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닙니까?”
“폐하께서는 아마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실 겁니까. 뭣보다 제가 폐하께 이런 청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을 거고요.”
“…….”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는 초야 이후 폐하를 따로 뵌 적이 없습니다.”
말은 부끄럽다 하였지만 부끄러운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그 사실을 더 다행으로 여기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건 저희 부족의 문제입니다. 폐하께 이런 사사로운 청까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우 미인의 얘기를 듣고 나니 이전에 비은궁에 식량 조달이 끊겼을 때 어떻게 해서든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아등바등했던 일이 얼마나 제 고집이었는지 알 것 같다. 황제가 후궁들에게 무심할지언정 사욕을 위한 청도 아닌 것에 도움을 주지 않을 만큼 박하지는 않다.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이 토착민들에게 불경한 짓을 하는 것은 황제의 기준으로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 미인이 황제에게 직접 청하지 못하는 마음 또한 이해한다. 황제의 후궁이라고는 하나 초야 이후로는 단둘이 만나 본 적도 없는 그저 타인일 뿐이다. 거절당할 거라는 확신이 분명한데, 그걸 알면서 황제에게 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도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보고 있으니, 곧 나아질 것입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이래 봬도 연국의 왕족이 아니겠습니까.”
애써 웃는 우 미인에게 이설도 가볍게 농을 하며 웃었다. 대단한 권력이랄 것도 없고 이제는 금국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훗날 연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 되찾을 신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