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78화
“본서원 궁인이라면 상전 눈 밖에 날까 노심초사할 일도 없고, 녹봉도 높은 편이라 들었는데.”
“예, 다들 못가서 안달 난 곳입니다. 근데 그런 곳을 제 발로 걸어 나왔다 하니,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승은이라도 입어볼 심산이었나 보지.”
황제가 가볍게 농을 하며 손에 쥔 세필 붓을 옆으로 휙 던졌다. 차란은 그 농을 받아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신이 장담하건대 궁녀들 중 그런 기대를 품은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황제는 궁녀에게 관심이 없다. 사실 궁녀든 후궁이든 여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사내인 데다가 심지어 황제이기까지 하며, 손만 뻗으면 눈이 멀 것 같은 경국지색의 미인들이 온통 차고 넘쳤지만 경사방에서 정해 준 날짜의 합궁일이 아니라면 황제가 여인을 안는 일은 거의 전무했다. 한두 달도 아니고 벌써 몇 년째 그런 날들이 지속되니, 궁녀들 중 감히 승은을 입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이는 아주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죽은 궁녀도 알았을 것 같으냐?”
“본서원 궁인이었다면 당연히 알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참 곤란하게 됐구나.”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성의 없는 황제의 태도가 믿기지 않는 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차란이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예전부터 황궁 법도를 잘 지키는 편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가끔은 차란이 저를 진짜 황제로 생각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지적하지는 않는다. 황제 자신도 이따금 제가 황제라는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어째서, 라는 의문이 들곤 했다.
황제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한 궁녀가 죽었다. 황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날, 같은 장소에서. 우연이라 하기에는 그 궁녀가 그날 나덕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고, 정해진 일이었다고 하기에는 두 사건 사이에 관계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답은 이제 다른 쪽에 있다.
“나와 설이를 쫓던 자들의 정체는, 아직인가?”
어느 날 서부턴가 황제는 이설을 ‘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차란은 그게 너무 기가 막히면서도 소름이 끼치고, 동시에 의문이 들고, 하여간 여러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서 아예 이 기분들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송구하오나 찾아낸 단서가 부족하여 조사에 진전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필 비가 쏟아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황제는 차란의 무능함을 탓하는 대신 날씨의 무정함에 비난을 보냈다.
“폐하 어깨에 꽂히셨던 화살은 가죽이 두꺼운 짐승들을 사냥할 때 쓰이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금국에서는 흔히 사용되지 않지만 회국이나 편국, 아니면 북쪽 이민족들 사이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화살입니다. 원한다면 금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고요.”
“독시였다. 촉에 묻은 독은 살펴봤느냐?”
“촉에 묻는 독으로는 어떤 독초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합니다. 폐하께서 중독되셨을 때 증상이라도 보았다면 얼추 짐작은 할 수 있었겠지만……,”
“……할 수 있었겠지만?”
“루 소의 마마께서 처치를 지나치게 잘해 주신 덕에 폐하께서 황궁에 돌아오셨을 때 중독 증세는 거의 없으셨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인지, 다행 중 불행인 것인지 모르겠군.”
아무리 법도에 미숙하고 아무도 황제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곧잘 하는 차란이라지만, 이 정도까지의 농을 할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다. 이설이 처치를 잘해 황제가 살아 돌아왔으니 이걸 어느 이유이든 간에 불행이라 말할 거리는 되지 못했다.
“다행히 그날 나덕산 반대편 하산 길에서 낯선 이들이 내려오는 것을 봤다는 목격이 있어 해당 부분을 조사 중입니다.”
“별로 쓸모 있는 목격담은 아닐 것 같지만, 별수 없지.”
“폐하께서는 정말 그자들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긴 하십니까?”
황제는 내내 태도가 너무 안일했다. 제 어깨에 독시를 꽃아 사경을 헤매게 한 자들을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씩 조사는 잘 되어 가고 있는지 묻는 때가 있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차란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 또는 차란을 더 이상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물어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제는 지금 차란이 수면과 맞바꾸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이 일에 눈곱만치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차란이 알고 있는 황제라면 이럴 수가 없는데.
차란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그게 믿어지지가 않아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꼭 황제에게 확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걸 묻는구나.”
“찾으면……, 그자들을 찾으면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질문을 한 직후 황제를 보자마자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직전의 고통이 뭔지 알려 줄까 해. 차라리 죽여 달라 빌고 빌 때까지.”
황제가 웃었다.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한 얼굴이 세상 그 무엇보다 해사하게 웃는데 설레기는커녕 등골이 오싹해졌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온몸을 덜덜 떨 정도로 괴로워했던 것에 비하면 별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어쩔 수 없지.”
황제 본인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온몸을 덜덜 떨 정도로 괴로워했다’라는 문장 어디에도 황제에게 어울리는 부분이 없다. 짐작 가는 바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는 바가 있어 더는 묻지도 않았다.
황제는 무섭다. 냉정함도, 너그러움도 모두 적당히 정도를 지키는 듯 보이지만 그건 그저 황제가 어느 일에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심을 쏟지 않으니 화가 날 것도, 기쁠 것도 없다. 그렇기에 구태여 제 성정을 모두 드러내는 일이 없는 것이었다. 황제는 사실 보이는 것보다 더 냉정하고 자비가 없었다.
금국 황제의 생사를 위협했다는 사실은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일단 찾아내기만 한다면 이런 이유든 저런 이유든 그자들은 좋은 꼴로 죽지는 못할 것이다.
“비은궁에는 언제 가실 참이십니까?”
“네가 알 게 뭐냐.”
아름답게 웃고 있던 얼굴이 깨진 도자기의 단면처럼 날카로워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마마께 드릴 물건이 있어 페하께 전해 드리려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불쾌하시다면 신이 직접 비은궁에 찾아가 전해 드리고 이만 퇴청하겠습니다.”
“내놔라.”
황제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집무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차란이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주는 사람도, 받아야 할 사람도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황제가 벌컥 상자 덮개를 열어젖혔다.
“이게 무엇이냐?”
“머리카락을 묶으실 때 사용하는 것이라 합니다.”
황제가 상자 안에 든 물건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폭에 길이는 1자(尺) 정도 될 듯싶은 비단 조각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비단 조각을 선물이랍시고 상자에 담아 건네는 차란을 황제가 하찮게 바라봤다. 그 눈빛의 의미를 차란도 파악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유명한 상단의 비단으로 만든 머리끈이랍니다. 색이 곱다고 소문이 자자하길래 집에서 하나 슬쩍 했습니다.”
색이 고운 건 모르겠지만 연한 옥빛이 이설의 머리카락과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다.
그래, 머리카락.
한동안 이설을 한밤중에 만나는 일이 없어 잠시 잊고 있었다. 애초에 이설에게 처음 흥미가 생겼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실이 이설을 남들보다 더 특별하게 보이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검은 밤 달빛 아래에서 이설이 빛나든 빛나지 않든 황제는 여전히 이설에게 관심이 갔다.
그래서 어제저녁 비은궁에서 이설을 한참 동안 기다리는 인내를, 그리고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흙바닥에 쪼그려 앉아 호미질을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서고 출입을 허락해 준 것인데 종일 서책만 읽으며, 식사까지 여기서 할 줄 알았겠는가. 소운이 그랬을 때는 몸 상하니 적당히 하거라, 하고 말았던 일인데 어제 같은 모습으로 있던 이설을 보니 황당한 건 둘째 치고 화가 치밀어 오르니,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금군을 시켜 이설을 비은궁까지 호위하라 명할 때까지 기분이 그런 상태라 미처 달빛 아래의 이설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했다.
아마 어제도 이설은 은은한 달빛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 같다. 명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설이 서고에 틀어박혀 있는 바람에 함께 보낼 시간이 사라졌고, 지난번 대낮에 그런 화를 당했으면서도 늦은 밤까지 비은궁 밖에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그런 걸 따지고 잴 여유가 없었다.
아무렴 어쩌겠단 말이지.
손에 쥔 비단 조각을 상자 안에 휙 던져 집어넣으며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설이 그런 요상한 재주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이제는 아무 상관없다. 심지어 본인은 물론 주변인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재주다. 해가 되는 것도 아닌 것에 내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본 그 모습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슬쩍 한 게 이거 하나뿐이냐?”
“예?”
상자 덮개를 닫아 옆으로 미뤄 두고 황제가 물었다. 두 번 묻는 귀찮은 짓을 시키지 말라는 눈빛이 차란에게 곧게 향했다. 차란은 잠깐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 품속에서 똑같은 비단 머리끈을 꺼내 황제에게 건넸다. 얕은수를 썼다고 면박이나 당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너무 한심해서 당장 죽일 수도 있겠다 싶은 얼굴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
“결국 이게 목적이었군.”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루 소의 마마께 신세 진 일도 있고 하니 드리는 거지요.”
“신세? 네가 이설에게 신세를 졌다고?”
“화병에 꽃을 담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건 그 답례로 드리는 겁니다.”
처참히 구겨지는 표정을 보고 이 말은 괜히 했나 후회했다. 감정 기복이 있는 편도 아니고 그게 얼굴에 쉽게 드러나는 분이 아닌데 비은궁 안주인에 관련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새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