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77화
때마침 장지문 너머에서 윤 내관이 황제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특별한 인사 없이 황제가 곧 장지문 밖으로 나가고, ‘태사령(太史令) 조근감에게 독대는 내일로 미루겠다 전하여라.’라는 목소리가 똑똑히 귀에 박혔다.
멀어져 가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고서 다시 바깥에서 기별이 왔다. 누가 기별을 넣었는지도 모르고 들어오라 답하니 주 상궁이 다과상을 내왔다. 탁자 위에 차와 말린 과일들을 차려 놓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서책들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다 읽으신 후에는 반드시 태워야 한다고, 태금궁 내관이 신신당부하였습니다.”
“걱정 말게. 그리할 테니.”
“위험하니 직접 태우지는 않는 게 좋습니다.”
주 상궁이 진지하게 하는 말에 이설은 어린아이도 아닌데 별걸 다 걱정한다며 쓰게 웃었다.
상만 차려주고 나갈 줄 알았던 주 상궁이 한쪽에 서서 빤히 서책들을 내려다봤다. 관심 있다면 읽어 보라 권하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마께만 허락된 서책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권하지 마시지요.”
주 상궁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터라, 그저 서책일 뿐이니 그리 엄격하게 굴 것 없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제게만 허락해 준 서책이다. 무슨 수로 하룻밤 새에 이 많은 양을 전사하여 가져다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따뜻하게 식은 차를 입에 댄 채로 이설은 서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괜스레 웃음이 나는 얼굴을 찻잔으로 감추지만 잘 가려지지 않는 것 같다. 주 상궁이 나가면 애써 좋은 마음을 감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관리 세 사람이 밤새도록 이것들을 전사하였다 합니다.”
금방 나갈 줄 알았던 주 상궁이 찻잔에 차를 더 따르며 불쑥 말을 꺼냈다. 응?, 하고 올려다보는 이설을 보며 다시 말한다.
“태금궁 내관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최금서 관리 세 사람이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꼬박 새워 만든 전사본이라고요.”
“왜 굳이 그렇게까지……?”
“황명이 그러하니 별수 있었겠습니까.”
눈이 마주친 주 상궁이 살풋 웃음을 지었다. 눈가에 얕게 진 주름이 더 깊게 패자 평소 엄격하고 진중하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주 상궁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 어느 때의 웃는 얼굴보다 자연스러워서, 별것도 아닌 표정 차이에 주 상궁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 상궁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저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이설이 잠시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가 다시 되돌렸을 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할 말을 다 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 상궁은 그 뒤 곧바로 침소를 나갔다. 찾지 않는 이상 들어오지 않겠다는 말은 이설이 하루 종일 서책만 읽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알았다는 대답을 듣고 주 상궁이 나간 뒤 침소는 다시 고요해졌다.
홀로 서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기 좋은 시간이다.
*
“태사령의 알현 요청을 내일로 미루셨다고 하던……,”
“사실이다.”
“…….”
“우장절이 좀 일찍 찾아온 게 무슨 대단한 흉조라고 황궁 제례까지 지내야 한단 말이냐?”
경연이 끝나고 태금궁의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 황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차란은 여느 때와 같이 피곤이 짙게 늘어진 얼굴로 그 뒤를 쫓았다. ‘날씨가 좋구나’ 하고 먼저 운을 뗀 황제에게 놀라 까무러칠 뻔한 것도 잠깐. 근래의 황제는 간혹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으니 차란도 이제 이 모습에 제법 익숙해질 때가 됐다.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황제와 함께 걷는 것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말을 건넨다는 것이 역효과이긴 했다. 단번에 말을 자르고 제게 성을 내는 것을 보니 평소의 황제가 맞긴 하다.
“요즘 좀 잠잠하다 싶더니 또 헛소리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
다시 생각해 봐도 제게 알현을 요청하는 사유가 어처구니없었는지 황제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걸핏하면 제례를 핑계로 황궁 재산을 낭비하는 태상(太常:황궁의 종묘와 제사를 주관)이 곱게 보이지가 않는데 그중에서도 수장 격 되는 태사령은 사실 황제 손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래도 금년 우장절은 이상하리만큼 일찍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제례는 한번 지내 보시는 게 어떠실런지.”
“귀찮은 일 벌일 생각 말고 네 하는 일이나 신경 써라.”
“신의 일이야 무척 잘하고 있습니다.”
“그래?”
황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줄줄이 따라오던 긴 궁인들의 행렬이 일제히 멈춰 섰다. 의미심장한 표정이 천천히 차란을 향했다.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고, 눈은 평소보다 약간 가늘어졌다. 좋지 못한 낌새를 감지한 차란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짐의 어깨에 화살을 박아 놓은 그 작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
“네가 정말 일을 잘하고 있다면 지금쯤 그자들이 내 눈앞에 있어야 할 텐데.”
“송구하옵니다. 당장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 송구하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지.”
별안간 혼잣말을 하다 피식 웃음을 흘린 황제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차란은 그 뒤를 다시 따르며 일찍 퇴청하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
황제는 차란이 아직 황궁에 남은 것을 후회하거나 말거나 하등 관심조차 없었다. 오늘은 쓸모가 없을 예정이니 이만 퇴청하라는 말은 이미 여러 차례 했는데도 따라붙은 건 차란 본인의 의지였다.
황궁의 담과 담 사이를 걷기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 이설에게 산책을 불허한 것이 조금 마음이 쓰였지만 또 궁 밖에 나가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니 차라리 나가지 않는 게 이설에게는 더 나을 성싶었다. 도대체가 궁 밖에만 나갔다 하면 별꼴을 다 겪고 돌아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비은궁에만 매일 가둬 놓을 수도 없고.
“폐하 굳이 이 시점에 말씀드리는 이유는,”
당분간은 조용히 할 줄 알았던 차란이 은근슬쩍 말을 붙였다. 듣지 않으려 해도 바로 뒤에서 말을 거니 안 들릴 수가 없다.
“신의 유능함을 폐하께 상기시켜 드리고자 함입니다만.”
“그냥 할 말만 해라, 할 말만.”
황제가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며칠 전 루 소의 마마께 화를 입힌 짐승은, 어차피 말씀드려도 폐하께서는 모르실 테니 누군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폐하의 후궁 마마 중 한 분이 새끼 때부터 데려와 키우던 개였습니다.”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열 걸음쯤 말없이 걷던 황제가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히 답했다.
“말 못 하는 짐승은 죄가 없지.”
“……그럼 누구에게 그 죄를 물을까요.”
대답이 뻔히 정해져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상대가 후궁이니만큼 황제의 대답을 확실히 듣고 난 뒤에야 차란이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그 후궁이 적당하겠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쫓아 걸어오고 있던 윤 내관이 황제의 말을 들었다. 근처에 있던 내관을 옆으로 불러 귓속말로 말을 전하자 그 내관이 무리를 이탈해 왔던 길을 종종걸음으로 되돌아갔다. 힐끗 뒤를 확인한 차란이 허탈하게 웃음을 뱉었다. 전각에 남는 방이 또 하나 생기겠군.
그 뒤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사실 차란만 황제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면 두 사람 간의 대화는 거의 없는 게 보통이었다. 태금궁 대문을 지나서까지도 제 뒤를 따르는 차란을 쫓아내지 않고, 황제는 차란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섰다. 평소처럼 어떤 차를 내어드릴까 묻는 윤 내관에게 부를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한 뒤 문을 닫았다.
“왜. 또 네 유능함을 과시할 거리가 남았느냐?”
“예.”
“그럼 어디 해 보거라.”
누가 봐도 당장 한숨 자야 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퇴청하라 그리 일러도 여기까지 쫓아온 것을 보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우선 그날 나덕산에서 발견된 시신의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내 궁의 궁녀라 들은 것 같은데.”
“예, 폐하를 모시던 궁녀였습니다. 다만 그 전에 소속되어 있던 곳이 문제입니다.”
낯빛이 그새 어두워진 차란이 황제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장난기 없는 표정이 담고 있는 사태의 진중함이 전해졌다.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하라고 재촉하려던 황제를 눈치채고 차란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석 달 전까지 본서원(本栖原)에서 명패를 관리하던 궁녀였다 합니다.”
“본서원의 궁녀였다고?”
“……예.”
통렬하게 묻는 황제에게 대답하기 전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본서원은 황족들의 이름을 관리하는 곳이다. 역대 모든 황족들의 이름과 아명이 그곳 장부에, 그리고 명패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나 알아서는 안 되는 귀한 이름들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니만큼 출입 제한이 황궁 그 어느 곳보다 엄격하다. 그래서 소속된 궁인들 역시 선별이 까다롭고 그 수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소속이 정해지지 않은 견습 궁녀들 사이에서는 선호도가 좋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아무나 알 수 없는 황족의 이름을 알 수 있다는 특권과 상전의 비위를 맞춰 모시는 일에 비하면 일의 강도가 약한 편이었고, 그에 비해 녹봉은 월등히 높기 때문이었다.
“본서원이라…….”
황제가 세필 붓 끝을 집무 탁자 위에 탁, 탁, 느리게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황제는 제 이름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불러 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이름은 귀하게 여길래야 귀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가끔은 자신에게 이름이 있는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 차란이 저 피곤한 몰골에 퇴청까지 미루고 찾아와 독대를 요청하여 말을 전하는 까닭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차란의 태도만 봐도 이게 제법 큰일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석 달 전 태금궁 궁인 충원이 있을 때 자진하여 들어왔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