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76화
황궁에 들어온 뒤로 날이 갈수록 몸이 약해지고 있었다.
마음에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이따금 기연에게 무예를 가르쳐 달라 청할 때가 있었다. 길게는 한 달, 짧게는 나흘 정도 이어졌던 강무(무예를 강습하는 것)는 매번 이설이 지쳐 나가떨어지며 끝이 났다.
아무래도 그 ‘때’가 다시 찾아온 것 같다. 지난번 황제 앞에서 활시위도 힘껏 당기지 못해 겪었던 수모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 지금 같은 몸으로는 활시위를 당기기는커녕 활을 들 수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단향입니다.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거라.”
험하게 내려놓은 바람에 놋대야의 물이 찰랑찰랑 흔들리다 간신히 잔잔했을 무렵 단향이 들어왔다.
“조반상을 들일까 했는데, 기연 님이 마마께서 늦잠을 주무셨으니 조반을 드시지 않을 거라고 하셔서요. 상을 무를까요?”
제 늦잠 버릇을 잘 알고 있는 기연이다. 잠을 푹 자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간단한 다과 정도면 충분했다.
“조반은 됐고, 지난번에 밖에서 사 온 차 한 잔이면 될 것 같다.”
“같이 드실 약과도 두어 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별로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거절했다가는 또 식사를 걸렀다 호된 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알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화홍이 두고 간 놋대야를 단향이 챙기며 고시랑거렸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놋대야를 들어 올리는 단향을 보며 얼른 건강해져야겠다, 다짐했다.
“근데 단향아.”
“예, 마마.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혹시 자는 동안……, 폐하께서 다녀가시지 않았느냐?”
황제가 조례 전 비은궁에 들르는 시간은 조반 후 차를 내올 때쯤이다. 그때쯤이면 황제가 기별 없이 나타나 ‘오늘도 조반을 거른 것은 아닌지 확인하러 왔다’ 하고 짓궂게 묻고는 함께 차를 마시다 떠났다.
조반 때가 한참 지났다는 것을 보니 황제가 보통 때처럼 다녀갔어야 할 시간도 이미 지났을지 모른다. 아직 자고 있는 저를 게으르다 혀를 차신 것은 아닌지, 아니면 황제가 뻔히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태평하게 꿈속을 헤매는 저를 방자하다 역정이 나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오늘 폐하께서는 대전으로 바로 향하셨나 봅니다.”
그렇다고 아예 찾아오지도 않으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이는 것도 아니구나.
매일 아침 찾아오시겠다 약조를 해 주었던 것도 아닌데 막상 이리 찾아오지 않으시니 실망을 금치 않을 수가 없다. 잠이 덜 깬 얼굴 위로 우울한 그늘이 내려앉았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이설을 보지 못한 단향은 놋대야를 챙기며 금방 차를 내오겠다 전한 뒤 침소를 나갔다. 복도에서 화홍을 만나기라도 했는지, 왜 자꾸 놋대야 챙기는 걸 까먹는 것이냐며 면박을 주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다 곧 사라졌다. 주 상궁이라도 만났는가 보다.
주 상궁에게 이 안색을 보였다가는 당장에라도 의원을 데려올 것이다. 정무가 바빠 오늘은 오지 않으셨겠지. 애써 기분을 달래며 세숫물에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뒤로 넘겼다. 길게 뱉은 한숨과 함께 침소에 들어가게 해 달라 허락을 요청하는 주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간밤에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웃고 있었는데, 어찌 안색이 좋지 않다 묻는 것일까. 역시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다.
억지로 짓던 웃음을 놓으며 이설이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간만에 늦잠을 잤더니 몸이 좀 늘어지는 것 같네. 불편한 곳은 없고.”
보통 때 같았으면 그래도 의원을 불러 진맥을 짚어 보자 했을 주 상궁인데 오늘은 더 꼬치꼬치 캐묻는 것 없이 그냥 알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환복부터 하시지요.”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환복은 천천히 하면 안 되겠는가?”
오늘은 비은궁 밖을 나갈 생각이 없다. 비은궁은커녕 침소 밖으로도 나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아픈 곳은 없는데 종일 침상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습으로 폐하를 맞으신다면 마마께서도 무척 곤란하실 테니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심한 목소리로 포단을 들추는 주 상궁의 행동이 무척 재빨랐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해 멀뚱히 앉아 있는 이설에게 주 상궁이 재차 말했다.
“궁 마당에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마께서 조금 전에 기침하셨다고 하니 환복할 시간만큼만 기다려주신다 하셨습니다.”
“뭐?”
“길게 기다리시지는 않겠다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바로 저 문으로 들어오셔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 환복부터 하시지요.”
주 상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의부터 벗어젖혔다. 평소에는 행동이 느긋하고 고상하던 주 상궁도 오늘은 누구 못지않게 빠른 손길로 이설의 시중을 도왔다.
자는 동안 너저분해진 머리카락은 당장 어떻게 구제할 방법이 없어 빗질로 정돈만 해 두었다. 긴 머리는 이래서 불편하다. 얼른 황제의 허락을 받아 짧게 자르고 싶은데 황제는 이설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다 운만 떼도 ‘불허한다’라며 싹을 잘랐다.
“루 소의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지금 안으로 드시겠습니다.”
“들어오시지요.”
평소 같았으면 기척도 없이 문부터 벌컥 열고 들어왔을 텐데 오늘은 늙은 내관의 기별이 먼저였다.
이설이 벗어 던져 놓은 침의를 급히 챙기며 주 상궁이 문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곧 장지문이 열리며 황제가 모습을 보였다.
뒤따라 온 이들에게 턱짓으로 침상 옆에 탁자를 가리키니 두 사람이 손에 들고 온 물건을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이설에게 인사했다. 한 사람은 초면이고 다른 한 사람은 황궁 일반 서고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두 사람 다 낯빛이 파리한 것이 며칠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운 것처럼 몰골이 좋지 못했다.
안색이 좋지 않다는 제 얼굴이 저들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역시 잠은 적당히 자는 게 좋겠지, 하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들었지만 큼큼, 하는 헛기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사람에게 떨어져 나간 시선이 황제에게 되돌아갔다.
“늦잠을 잤다던데.”
“예, 조금…….”
“이 시간까지 잤으면 조금이 아니지.”
농이실까, 아니면 조롱이실까.
“얼마나 더 늦게까지 자 봐야 네가 ‘조금’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도 못할까 싶은데,”
조롱이시려나.
“이설아?”
“……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늦잠의 여파가 머릿속을 몽롱하게 잠식하며 찾아왔다. 황제를 눈앞에 두고 생각이 딴 데 팔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고개를 저으면서도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 이설의 표정이 멍했다. 황제가 빤히 쳐다보고만 있어도 꿈뻑 꿈뻑 느릿하게 눈만 감았다 뜨기를 몇 번. 탁자 위에 놓인 물건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탁자 위에 이건 무엇이옵니까?”
“네 것이다.”
물어봐 주길 기다렸던 사람처럼 황제가 곧장 대답했다. 굳이 이곳까지 가지고 와서 여기 올려놓으셨으니 저를 주시려고 가져왔다는 건 대충 눈치채고는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서책이다. 일반 서책과 달리 종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이, 급하게 만든 티가 역력했다.
“서관의 관리도 반나절 동안 세 권 이상 전사하는 건 무리더군.”
“…….”
“일단 오늘까지는 버틸 만하겠지.”
“그러니까, 이게 무엇이기에…….”
“경연 중 잠깐 들른 것이다. 그만 가 봐야겠어.”
찾아와 앉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황제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는 이설은 황제가 손을 저어 말리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자세로 멈춰 있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황제 눈치를 보며 허접하게 약사로 제책되어 있는 책 표지를 두어 장 넘겨 보았다. 빳빳한 새 종이에 아직 먹색이 채 바래지도 않은 글씨가 빼곡했다. 버릇처럼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이설이 문득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직 나가지 않고 서 있던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 제가 최금서에서 읽고 있던 서책입니다.”
“안다.”
“분명 서고 밖으로 반출할 수 없다 들었습니다만.”
“네가 들은 게 맞다.”
“…….”
“네가 보던 서책은 서고에 그대로 꽂혀 있어.”
“그럼 이것은 무엇이옵니까?”
“전사본이다.”
전사본이 뭔지 몰라 눈이 동그래진 게 아닌데, 황제는 이설이 그 단어를 몰라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전사본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네가 보던 그 서책의 글자를 빠짐없이 옮겨 놓은 책이란 뜻이다.’ 얼핏 면박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목소리가 다정해 할 말을 잃었다.
“다 보거든 불에 태워 없애거라.”
“이 귀한 서책을 태워 없애란 말이십니까?”
“그 귀한 서책들은 본디 서고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것들이니 주저 말고 태워 없애.”
황제의 말뜻을 이해한 이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비은궁 바깥 산책은 허락하지만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해. 석반 전에는 돌아오도록 하고.”
“석반 전에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설에게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곧바로 뒤를 돌아서 나가려던 황제를 붙잡았다. 뒷말을 하기 전 마른침을 삼키는 이설을 보며 황제가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주겠으니 어디 대답해 보라는 것처럼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폐하를 만날 수 있을까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황제에게 오늘 저녁에도 어제처럼 찾아와 달라 애틋하게 청을 할 수 없었다. 에둘러 말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청을 했다.
“하루 정도 산책 나가지 않는다고 네 몸이 굳어 못 쓰게 되는 것도 아닐 테지.”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재차 요청하려던 때,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산책은 불허한다. 비은궁 밖으로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종일 여기 침소에서 이것들이나 읽거라.”
“…….”
“그러다 보면 내가 곧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