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75화
오랜만에 황제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시간을 또 이리 허무하게 보내 버렸다. 그저 운이 없는 건지 아니면 준비성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오늘 같은 상황을 한번 겪고 나니 다시 그 서고에 걸음을 해도 될지 고민이 됐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걸음 하지 말라, 하고 역정을 내던 황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그 심기를 어지럽힌 것은 맞는 것 같다. 황제가 이만 궁으로 돌아가 보라 할 때 다시 이곳을 찾아와도 괜찮을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루 소의 마마.”
“응, 무슨 일인가.”
이설의 누울 자리에 포단을 정리하며 주 상궁이 이설을 불렀다. 침수 준비를 하는 것은 보통 화홍인데 오늘은 주 상궁이 이 하찮은 일을 자처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제 아침 기암성 성주의 아내 되는 자가 쌀 여섯 가마와 비단 열두 필을 들고 찾아왔었습니다.”
“이곳을? 왜?”
“마마를 뵙고 싶어서요. 그리고 그 전날에는 감창사(監倉使:창고를 감찰하던 관리) 4품 관리가 경국 나진 지방에서 만든 가마를 보내기도 했고요.”
“가마? 감창사 관리가 내게 가마를 보냈다고?”
“예.”
“어째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마마를 뵙고자 해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같은 것을 재차 묻는 이설에게 주 상궁도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주 상궁의 대답을 듣고도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이설의 앞으로 주 상궁이 옮겨갔다. 이설 못지않게 피로가 내려앉은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이 둘뿐만이 아닙니다. 이전부터 이런 식의 알현 요청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빈손으로 오는 법은 없지요.”
“허나 나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는데.”
“제가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마마께서 일전에 그러라 하셨지 않습니까.”
차분히 대답하는 주 상궁의 말에 생각이 났다. 손조익의 알현 요청이 재차 이어지던 때였을 것이다. 누구든 제게 알현을 요청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거절하라고. 그때야 어차피 찾아오는 자가 거의 없을 때이기도 했고, 있다 하여도 좋은 마음으로 오는 이들은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에 그리 명한 것이었다.
“아, 그랬지. 그래 잘했네. 앞으로도 그런 요청들은 받지 말아.”
주 상궁이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으니 신경 쓸 것은 없을 것이다. 꾸준히 들어온다고는 하나 어차피 많은 요청도 아닐 테고, 지속적으로 들어올 일도 아닐 터.
하루가 피로했다. 그만 주 상궁을 물리고 일찍 침수에 들 생각이었다. 사실 이미 늦은 시간이긴 했다.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이설을 보면서도 주 상궁은 평소처럼 눈치 좋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헌데 그 요청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다고?”
드물게 한숨을 길게 내시며 걱정과 염려를 드러내는 주 상궁이 이어 말을 전했다.
“어제 마마께서 최금서에 계신 동안 찾아온 이만 일곱이었습니다. 수레 가득 비단을 싣고 온 자도 있었고, 목각함에 금붙이를 잔뜩 넣어 온 자도 있었습니다.”
“그게 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예. 그리고 오늘은 모두 아홉이었고요. 아마 내일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이 비단이며 금이며 하다못해 쌀가마까지 들고서 이곳을 찾아온다는 말인가?”
예, 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주 상궁은 농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가 찬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는 이설이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줄 생각인 건지, 주 상궁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알현 요청을 하며 약소한 성의 표현을 하는 것이야 특별할 것 없는 관례라지만 내다 바치는 품목들이 정도를 지나쳤다. 가벼운 안부 인사를 따위를 위한 알현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황궁에 들어온 지 벌써 수 달이 지났다. 이제 와서 안부 인사라니, 기가 차지. 어설프게나마 황궁 돌아가는 사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대충 그 목적들은 파악이 됐다.
“다들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군.”
“무엇을 말입니까, 마마.”
“내게서 무슨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기대를 하며 찾아오는 것이겠지.”
어딜 가나 존재하는 비열한 족속들의 하는 짓들은 참 뻔하다. 그 의도들이 너무 투명해서 둔하디둔한 저조차도 이렇게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이 왜 마마의 콩고물이라도 얻으려 하는지도 알고 계십니까?”
“나와 폐하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
“남들이 보기에는 후궁의 처소인 이곳에 폐하께서 매일 아침 들리시니, 오해를 살 만도 하지.”
“오해, 입니까?”
“물론 오해지. 하여간 다들 잘못 짚어도 제대로 잘못 짚었어.”
아첨하는 족속들을 싫어한다. 남들은 이설이 무르고 무뎌 싫고 좋고의 분간도 혼자 할 줄 모르는 흐리멍텅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설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싫은 것은 확실히 싫은 것이고, 좋은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구는 것들은 보통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제게 뭐라도 하나 얻을 게 있나 싶어 양손 가득히 성의를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틀렸다. 지금의 제게 그런 귀한 것들을 갖다 바쳐 봐야 얻을 게 하나 없다. 저가 폐하의 승은이라도 입었다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모두 어리석구나. 폐하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닌데. 이 상황을 알면 황제는 비웃을 것이다.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들며 걱정이 밀려왔다. 이 일은 황제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야 어찌어찌 황제의 귀까지 전해진다 하여도 그 치들에게서는 쌀 한 톨도 받을 수 없다. 받고 싶은 마음조차 추호도 없다.
“폐하께서 이 일을 모르시는 게 가장 좋지만, 주 상궁 말대로 하루에도 몇 번씩 수레에 쌀과 비단이 실려 들어온다면 그걸 숨기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
“……예, 그러하지요.”
어쩐지 그새 낯빛이 더 어두워진 주 상궁이 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표정 중 가장 짙은 것은 드물게도, 황당함이었지만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향하는 이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것들이 비은궁에 쌓여서는 안 돼. 나는 그자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고,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을 것이야.”
“…….”
“어차피 나에게는 그럴 힘도 없으니 말이야.”
처연하게 웃으며 이설은 침상 끄트머리에 앉았다. 주 상궁은 잠시 이설을 지켜보다 이내 다시 한번 한숨을 길게 내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를 포기하기라도 한 듯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할 말이 아직 남아 있기라도 한 분위기였다. 평소 같았으면 달리 할 말이 있다면 해 보라 물었겠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너무 피곤해서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주 상궁이 이만 나가 보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설이 먼저 주 상궁에게 나가 달라 청했을 것이다.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얼른 침수 드시지요.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자네도 오늘 고생 많았네. 나 때문에 주 상궁이 고생이 참 많아.”
그런 말씀 마시라는 말과 함께 주 상궁은 침소 곳곳을 돌며 켜진 등불을 모두 끄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걷는 주 상궁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다시 적막한 고요가 찾아왔다.
서고를 찾아온 황제를 만나 놀랐던 마음을 추스르는 한편, 저와 황제의 사이를 잘못 상상한 이들의 오해에 쓴웃음이 났다. 황제의 총애라니.
잘못 짚어도 정말이지 단단히, 아주 단단히 잘못 짚었다.
*
전날 몸이 많이 피곤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어지간히 늦잠을 자는 게 아니고서야 이설이 잠든 침전까지 들어와 일부러 잠을 깨우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오늘 그 드문 일이 일어났다. ‘마마, 해가 중천입니다. 이만 기침하시옵소서’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무척 조심스러워 단잠을 깨우는 방해가 짜증스럽지는 않았다.
“조반 때도 이미 한참 지났습니다. 혹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몸은 괜찮다.”
이설은 아직 잠에 덜 깨어 자꾸만 아래로 쓰러지려는 상체를 비척비척 일으켜 세워 앉았다. 화홍이 세숫물의 따뜻한 정도를 맞추며 걱정스레 묻기에 고개 저어 대답했다. 잠긴 목소리 탓에 화홍이 그 대답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의원이라도 불러올까요?”
“그럴 필요 없어. 아직 잠이…… 하암, …잠이 덜 깼나 보다.”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으신걸요. 요즘 같은 날씨에 밤바람을 맞으셨으니 고뿔에 걸리신 게 틀림없습니다.”
고뿔에 걸릴 것이 틀림없는 요즘 같은 날씨라 함은, 한밤중이 됐을 때나 잠깐 부는 서늘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그 날씨를 일컫는 것인가. 이설은 그때를 ‘산보하기 좋은 날씨’라고 불렀다.
“아니면 그때 다치신 목이 아직 다 낫지 않으신 걸까요?”
세숫물을 옮기다 갑자기 울상을 짓는 화홍에게 그런 건 절대 아니라 고개를 얼마나 저었는지 모른다. 너무 오랫동안 잤는지 머리가 약간 어지럽다. 간밤에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앉은 채로 허공에 시선을 댄 채 멍하니 있으니 화홍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괜찮대도 그러네. 그나저나 화홍이 네 비녀가 참 곱다. 새로 산 것이냐?”
“아이, 이것은…… 새로 산 것은 아니오라…,”
별안간 얼굴색이 붉어진 화홍이 머리에 꽂은 비녀를 가리며 뒤를 돌아섰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니면 칭찬받은 비녀를 감추고 싶어 하는 건지 잘 모르겠으나 이설의 의도대로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화홍은 “조반상을 내오겠습니다.” 하고 말한 뒤 서둘러 방을 나갔다.
세숫물이 담긴 놋대야도 치워 주지 않고 나가 버리는 바람에 이설이 손수 놋대야를 침상 아래로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들어도 이리 무거운 것을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손에 들어 허리에 끼어 옮겼다. 내가 약한 것이 아니라 여기 아이들이 강한 것이라, 스스로를 토닥거려 보지만 쓸모없는 위로다. 황궁에 들어온 뒤로 날이 갈수록 몸이 약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