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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74)화 (74/300)

달의 황홀경

74화

원래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닌 이상 밖을 돌아다니면 안 된다. 그동안은 경비 눈에 띄지 않거나, 이설을 알아본 경비들이 알아서 모른 척 눈감아 주었기에 별일이 없었지만 황제가 모른 척 넘어가 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적적할 때 찾아오라고 했지 내 언제 하루 종일 여기서 살라 하였어?”

“…….”

“듣자 하니 아예 석반을 여기서 먹고 있다 하던데, 사실이더냐?”

“이 서고에서 먹는 것은 아니고, 저기 서고 뒤에 정자에서…….”

“그걸 말이라고.”

혹여 서책이 상할까 염려하는 황제에게 다급히 변명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화를 내는 황제에게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한 것이 너무 명백하여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책을 가지고 궁에 돌아가 읽을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느냐?”

“해 봤습니다만, 이곳 서책은 절대 서고 밖으로 반출될 수 없다 하여…….”

“…….”

“송구합니다, 제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오래 있었지. 아주 오래 있었어.”

다시금 낮아진 황제의 목소리에 잔잔한 노기가 어렸지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래에 고정되어 있던 이설의 시선이 천천히 황제를 향했다. 평소 걸치는 화려한 색색의 정복이 아니라 연무복 차림이다. 이 차림으로 저 멀리 어둠 속에서 걸어왔으니 알아보지 못했을 만했다.

“종일 읽은 책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냐?”

다 읽은 뒤 옆으로 미뤄 둔 서책들 중 하나를 들어 보이며 황제가 물었다. 인술보감을 읽던 중 머리나 식힐 겸 가볍게 읽으려고 꺼내 둔 금국 신화서였다. 쓸모없는 서책도 많다던 황제의 말은 조금 심한 과장이었고, 굳이 이 서고에 있어야 하나 싶은 서책들도 간혹 눈에 띄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그건 그저 심심풀이로 읽은 것이고 오늘 본 것은 여기 이…….”

종일 열심히 읽던 인술보감 중 여섯 번째 권을 슬쩍 들어 표지를 보여 줬다가 다시 자리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생각해 보니 이것을 황제가 확인했다고 하여, 이리 훌륭한 서책을 보았냐고 기특하다 칭찬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총 열세 권이나 되는 보감인데, 이걸 다 볼 때까지 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느냐?”

“절대 아닙니다. 보던 것만 마무리 후 나머지는 내일 다시 와서 보려고 했습니다.”

사실 여섯 번째 권을 다 본 뒤에도 기연이나 연화가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일곱 번째 보감을 빼내어 들었을지도 모른다.

황제에게 거짓말을 하려니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아 슬쩍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오래 켜 둔 등불이 그리 밝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찌 이런 하찮은 거짓말도 다 티가 나는지.”

다행이 아니었나.

황제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다 들렸다. 거짓을 고했다 경을 치실까 겁이 나는 것보다 창피한 마음이 더 앞섰다.

“밖에 누구 없느냐!”

갑자기 내지른 고함에 깜짝 놀란 이설이 앉은 채로 몸을 흠칫 떨자 황제가 눈초리 무섭게 이설을 흘끔 쳐다봤다. 저에게 소리라도 치는 줄 알고 놀랐던 이설이 민망하게 웃었다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걸 깨닫고 입꼬리를 내렸다.

멀리 어둠 속에서 오늘 내내 모습을 감추느라 애썼던 관리라 종종걸음으로 급히 들어왔다.

“이곳 서고의 서책들은 바깥으로 반출이 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냐.”

“예. 여기 서책들은 이 서고 문턱을 넘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지?”

황족 외 신분은 들어오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된 곳의 서책이니, 반출도 허락되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한 것을 묻는 황제에게 관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답을 아예 하지 않자니 상대는 황제. 입을 뗐다가 닫았다가, 같은 입 모양만 하염없이 반복하는 관리가 안쓰럽기 시작했다. 괜히 저 때문에 불똥이 튀었다.

“원래 여기 서책들은 외부인에게……, 아니 그러니까, 폐하와 태자 전하 외에 다른 분들에게는 금지된 것들이온, ……아 물론 여기 루 소의 마마와 단 태감께는 이미 허락이 되긴 하셨지만 그래도 일단은…….”

황제와 이설을 번갈아 눈치를 보며 관리가 횡설수설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한 걸 보니 서고에 들어오기 전 이미 밖에서 황제에게 한바탕 큰소리를 들은 듯했다. 오늘 좀 경거망동한 언행을 보이기는 했지만 좋은 사람이다. 이설이 사내 후궁이라 얕잡아 보지도 않았고, 황제에게 총애받는 후궁이라 받아먹을 떡고물을 기대하며 아첨한 적도 없다. 괜히 저 때문에 처지가 곤란해진 게 미안스러워 다 제 탓이다, 하며 무릎이라도 꿇으려던 찰나 황제가 성가신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아들었다.”

“……예.”

“언제까지 거기 앉아 있을 셈이냐. 이만 일어나거라.”

황제 손짓에 입을 꾹 다문 관리가 뒤로 물러서자 어둠에 가려 마치 다시 황제와 단둘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황제가 말한 대로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한 이설은 곧 황제가 말한 의미를 깨닫고 황제의 앞에 섰다.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연한 땀 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이설은 이런 냄새를 사내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평생이 가도 제게는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서고를 나서는 문까지 책장 사이사이에 끼인 어둠을 걷는 동안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탁자 위 등불을 가지고 나왔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길지 않은 거리였고, 걷는 동안 황제가 어깨를 잡아 주며 ‘조심히 걷거라’ 하며 연신 말해 주었다.

서고 문턱을 넘고 나서야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이 등불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달려와 앞을 밝혀 주었다.

“발 조심하거라.”

턱 높은 계단을 먼저 내려가며 황제가 이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등불이 없어도 혼자 몇 번이나 아무렇지 않게 내려가던 곳이지만 이설도 사양 않고 황제의 손을 잡고 턱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동시에 주변 모든 궁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피했다.

서고 앞 흙 마당까지 내려와서야 황제는 손을 놓아주었다. 황제가 둘러본 주변에 있는 이설의 사람이라고는 연화와 기연뿐이라는 걸 확인한 뒤에는 표정이 심히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뒤에 서 있던 흑영을 불러들였다.

“네가 비은궁까지 함께 가거라.”

“폐하는 함께 가시지 않습니까?”

“볼일이 있다.”

“그럼 저도 폐하의 곁에 남겠습니다. 소의 마마의 밤길이 걱정되신다면 금군을 보내시지요.”

황명을 단호히 거절한 흑영은 황제가 다시 명을 내려도 대답을 번복할 듯 보이지는 않았다. 저 흉흉한 표정을 보고도 흔들림 없이 제 할 말을 다 하는 흑영을 보니, 저는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싶었다.

황명에 불복하는 흑영에게 무엄하다 경을 치는 대신 황제는 흑영의 말대로 금군의 수장을 불렀다. 다 같이 무예 훈련이라도 하고 왔는지, 하나같이 흑의를 입고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섬뜩하기도 했고, 듬직하기도 해서 혼란스러웠다. 한때 저들이 제 후원으로 들이닥쳤을 때는 분명 섬뜩하기만 했었는데.

“비은궁까지 루 소의를 호위하라.”

“존명.”

금군의 수장은 흑영과 달리 황명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이설의 뒤에 섰다. “궁까지 모시겠습니다.” 하는 목소리는 매우 믿음직스러웠지만 황궁 밖을 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호위를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수장이 황명을 받들며 남은 금군들도 이설의 뒤로 줄지어 모여 섰다.

“이 자들이 궁까지 데려다줄 테니, 딴 길로 새지 말고 곧장 궁으로 돌아가거라.”

딴 길로 새어 갈 곳이 어디 있다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것보다 황제가 함께 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했다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함께 비은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급격히 시무룩해진 표정의 이유를 오해했는지 황제가 혀를 찼다.

“왜, 정말 어디 들를 곳이라도 있었어? 어찌 그런 표정을 짓느냐?”

“아니, 아닙니다. 제가 이 황궁에 들를 곳이라니요…….”

사람 속도 모르는 황제에게 그렇지 않다 부정하며 고개도 가로저었지만 실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이만 궁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 이설에게 황제는 여전히 영 심기 불편한 얼굴로 잘 들어가라 인사말 한마디 없이 시선만 고정했다.

이설의 앞쪽으로 금군의 수장과 기연이 앞장서 걸었고 그 뒤를 남은 금군들이 뒤따랐다. 그 시커먼 사내들 사이에는 자그마한 연화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맞춰 쫓았다.

한참을 걸어 궁으로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지치고 정신이 피로했다. 비은궁 대문 앞을 지키고 있던 주 상궁과 아이들은 금군과 함께 나타난 이설을 보고 까무러치며 놀랐다.

금군은 이설이 비은궁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밖을 지키고 서 있다가 단향이 “마마께서 이제 침수 준비를 하십니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물러갔다. 사실 그때 이설은 대충 목욕을 마치고 침소에서 주 상궁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있었다.

“해가 질 때쯤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을 보내 마마께 알리려 하였는데, 폐하께서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내내 나를 기다리셨는가?”

“예. 차가 네 번이나 식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근데 사람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때가 되면 돌아올 테니 방해치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 때가 되면 돌아갔었어야 했다. 서책을 보는 것이 즐겁다지만 그게 어디 황제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의 즐거움만 같으랴.

조례를 하러 가는 길에 들러 잠깐 얼굴만 보는 황제라도 좋았다. 어디 앉아 보지도 못하고 도월소 옆에 서서 잠은 잘 잤느냐, 오늘은 무슨 그림을 그려 망칠 것이냐, 어제 천자는 몇 개나 외웠느냐, 따위의 사소한 담소를 나누는 게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황제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시간을 또 이리 허무하게 보내 버렸다. 그저 운이 없는 건지 아니면 준비성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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