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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72)화 (72/300)

달의 황홀경

72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은 스스로에 대한 과시도, 태자에 대한 겸손도 아니다. 황제의 엄지손가락 끝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돌아간다. 잊고 있던 골칫거리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미간에 움푹 팬 주름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진심으로 태자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타서의 율령은 태자만 한 나이의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애초에 윤상과 인륜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의 옳고 그름과 높고 낮음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소양이 필요하다. 근데 이 소양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글공부 몇 자 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 갈고닦은 학문과 지식들을 바탕으로 경험한 것들에 의해 쌓이는 것인데 고작해야 십 년도 채 살지 않은 태자에게 그런 것 따위를 바라는 건 애당초 무리다. 그러니 지금 애를 먹고 있는 거지.

사실 애를 먹고 있다는 표현도 무척 과장된 것이다. 다른 학문들에 비해 습득 속도가 조금 느릴 뿐. 솔직한 이설의 심정으로는, 태자 나이 때 이미 그 율령을 외우고도 남았다는 황제와 태감 쪽이 더 문제라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 와중에 나덕산에 사냥을 가자 떼를 쓰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태자께서는 떼를 쓰거나 하실 분이 아니신데…….”

태자가 ‘태자’라는 신분을 밝히기 전 ‘해도원’으로만 알았을 때라면 이설도 떼를 쓰는 태자를 충분히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진짜 태자는 누군가에게 떼를 쓰거나 어리광을 부리는 성정이 절대 아니었다. 이설에게 곤란한 것을 부탁할 때에도 단 한 번도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보채지 않았다. 그저 얼굴 만면에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고 말을 하고 있노라면 이설로서는 그 부탁을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꼭 울며 난동을 부려야만 떼를 쓴다고 하는 건 아니지. 그래도 네 앞에서는 자못 어른스러운 척을 잘도 하고 있는가 보구나.”

“영특하신 건 물론, 누구보다 속이 깊고 어른스러운 분이십니다. 기특하게 여겨 주십시오, 폐하.”

“…….”

“아, 외람된 소리를 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태자 전하를 황제에게 기특하게 여겨 달라는 말을 올리다니, 순간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보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있는 황제에게 황급히 사과하자 짧은 한숨이 토해지듯 전해진다.

“하찮은 것들에 일일이 송구해 할 필요 없다 하였는데도.”

“하찮지 않습니다. 주제넘었다 하셔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네 말의 어디가 주제넘었다는 말이냐. 태자를 영특하고 속이 깊다 칭찬하였고, 기특하게 여겨 달라 청을 하였을 뿐인데.”

“폐하께서 이미 그 누구보다 태자 전하를 아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 따위가 감히 청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전한 말 그대로, 황제가 태자를 무척 어여삐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을 정녕 하늘이 맺어 준 반려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황궁으로 들여온 것은 수태할 수 없는 사내의 몸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자신은 황후가 되었을 것이고, 황후가 된 자신에게서는 후사를 볼 수 없으므로 태자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씨앗은 싹도 틔울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황후가 될 만한 재목이 되지 못하여 소의 첩지에 그쳤지만 원치도 않는 사내를 후궁으로 맞으면서까지 태자를 지키고자 했던 황제이니, 아끼는 그 마음을 가늠할 만하다.

“주제넘지 않으니 사과할 필요 없다.”

“…….”

“필요 없다 하였어.”

황제의 말을 부인하며 재차 사과하려던 입이 대번에 닫혔다.

“한 번만 더 쓸데없는 것에 고집을 부리면 학운관 출입을 금할 것이다.”

잘못하였다 여긴 일에 사과를 한 것뿐인데 그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 억울한 마음에 울상이 된 이설에게 황제는 ‘농이었다’ 한마디 없이 이설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나뭇잎만 떼어 내 주었다.

*

함께 앉아 있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학운관 출입을 금하겠다는 엄포를 들은 뒤 말수가 현저히 줄어든 이설은 언제쯤에나 황제가 제게 일어나라 명하실까 고민 중이었다. 조반 후 내내 굶었던 터라 배가 조금 고프기도 했고 먼저 보낸 삼설이가 걱정되는 한편, 황제와 나란히 앉아 고요히 저녁노을을 구경하는 이 시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별채 지붕에 걸린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황제도 석반 들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괜찮을까 고민하던 중 다행히 황제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이설의 팔을 가볍게 당겼다.

“그만 일어나지.”

“네, 저도 이만 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 황제가 걸어 나가고 그 뒤를 이설이 졸졸 쫓았다. 아름다운 금원을 뒤로 하고 궁으로 되돌아와 걷는 복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등불이 놓여 있었다. 흔들거리는 붉은 불빛 사이를 걷는 황제의 모습이 노을 진 하늘에 떠 있는 태양 같았다. 누구든 제가 하는 생각을 들었더라면 아마 그도 그러하다 맞장구를 쳐 줬을 거라고 뿌듯해하며, 부지런히 황제를 쫓았다.

본궁 입구까지 나오는 황제의 배려에 감사했고, 태금궁의 대문까지 앞서 걸어나가는 황제에게 송구하다 말하고 싶었으나 또 하찮은 것에 머리를 조아린다 하실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가 태금궁을 뒤로하고도 계속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으니 황제를 불러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폐하, 어디를 가시는 길이옵니까?”

“…….”

“혹 제 궁을……, 비은궁으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저와 행선지가 다른 곳을 따라갈 수가 없어 물은 것이었는데 뒤를 돌아본 황제가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봐 걸음을 멈칫했다.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이었는데 황제는 너무 당연한 것을 물어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무시하고 다시 길을 가려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결국 걸음을 멈췄다.

“그럼 내가 이 시간에 어디를 간다고 생각했느냐?”

어디든 제 궁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나, 생각하는 곧이곧대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혹시 제 대답이 황제의 기분을 망쳐 가던 걸음의 방향을 바꿀까 염려됐다.

“대답하라 물은 것이었다.”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재촉하는 황제에게 이설이 대답했다.

“그제 궁인들이 궁 밖에 나갔다가 보리주를 사 왔습니다. 좋은 술은 아니지만 메밀전과 드시면 맛이 무척 좋습니다.”

그제인지 어제인지 아니면 그전의 어느 날인지도 사실 모르겠다. 저잣거리에 장 들어서는 걸 보고 싶다 조르던 유강이 주상궁 몰래 기어코 궁 밖에 나가 보리주와 주전부리를 잔뜩 사 가지고 들어왔다. 단내 나는 주전부리는 모두 아이들 손에 쥐여 주고 남은 것은 보리주 두어 병. 아직 마개도 열어 보지 않은 그 술이 왜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무슨 재료로 누가 어떻게 빚은 건지도 모르는 그 술을 황제에게 대접할 수는 없는데.

동문서답하는 이설을 꾸짖는 대신 황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설 너머로 손을 까딱 흔들자 멀지 않은 곳에서 쫓아오고 있던 내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왔다.

“비은궁에 급히 사람을 보내어 전하라.”

“예, 말씀하시옵소서 폐하.”

“비은궁의 주인이 보리주에 메밀전을 무척 먹고 싶다 하니 얼른 준비하라고.”

머리를 조아린 내관이 뒷걸음을 치며 물러났다. 어색하게 웃는 이설에게 황제가 손짓했다. 옆으로 고개를 까딱, 하는 의미를 알고 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황제의 옆에 나란히 선 이설이 웃으며 걸음을 맞췄다.

*

태자가 다쳤다. 마상에서 활시위를 겨누다 낙상하였다고 들었다. 말이 달리고 있던 중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지, 까딱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어깨와 팔을 다친 태자는 소봉궁 제 침소에서 꼼짝을 못하고 누워만 지내는 중이었다. 두 다리는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황명이 태자를 소봉궁에 가뒀다. 그깟 활쏘기 실력으로는 마상에서 활을 들 생각도 하지 말라는 황제의 명을 어긴 결과였으니, 태자도 할 말이 없었다.

덕분에 태자는 당분간 학운관에 걸음을 끊었고, 덩달아 이설도 학운관에 걸음할 일이 없어졌다. 소운은 태자의 침소에서 수업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막혀 있던 율령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하는 태자에게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했고, 태자는 마침 제 궁에 이설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좋아했지만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해가 가장 높은 곳에 떠오르며 비은궁 나무들의 이파리 사이사이로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그때. 이설이 하루 중 가장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네가 적당히 놀 만한 곳이 있으니 따라오거라.”

앞뜰에서 하릴없이 흙에 호미질을 하고 있는 이설을 일으켜 세우며 황제가 말했다. 태금궁에서 대전을 가는 길에 들렸다는 황제에게, 왜 이리 먼 길을 돌아 대전으로 가시는지 물을 틈이 없었다.

황제와 나란히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서고였다. 이설이 평소 가는 서고보다 크기는 조금 더 작았지만 그 앞을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한눈에 봐도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귀한 서책이 많거나, 아무 사람에게나 읽혀서는 안 되는 금서가 있거나.

황제를 따라 문턱을 넘어서는 이설에게 병사 둘의 시선이 쏠렸다. 이설을 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관리 하나가 저를 보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이 서고에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족만 들어올 수 있는 서고다.”

“그런데 제가 들어와도 괜찮으십니까?”

“소운 하나에 너 하나 더 들어온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지.”

“태감께서도 이곳에 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소운의 개인 서고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곳이야.”

서책들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 사이를 걸으며 황제가 웃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찾고 있는 서책이 있기라도 한지 검지로 서책 위를 훑으며 지나갔다. 황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설은 정리된 책의 제목들을 구경했다. 좌우에 책장 한 개씩만 봤을 뿐인데도 얼른 꺼내 읽고 싶은 서책들이 품에 한 아름이었다.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말고 읽고 싶은 게 있거든 꺼내 보거라.”

“정말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럼 내가 여기에 너를 왜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황당하다 웃는 얼굴이 뒤를 돌아보며 이설과 마주했다. 때마침 찾고 있던 서책을 골랐는지 황제가 빼내 든 서책을 이설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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