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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69)화 (69/300)

달의 황홀경

69화

“한 가지 드릴 청이 있습니다.”

“청?”

어깨 뒤로 넘어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황제가 이설이 한 말을 되물었다.

“금원을……, 금원에 출입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황제의 손이 멈칫하며 그대로 거두어졌다.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곳을 아무런 연유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출입하게 해 달라 청하였다. 무례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차피 자신은 황제의 기분을 살피며 에둘러 청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주제넘은 청이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후에 신첩에게 잘못을 묻는다 하셔도 모두 감수하겠습니다. 아주 잠깐만 들어갔다 나와도 괜찮습니다.”

황제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초조해진 이설이 구구절절 말을 읊으며 애원했다. 저도 모르게 황제에게 바짝 다가서며 고개를 더 뒤로 치켜올리며 시선을 높이자 황제가 한쪽 눈썹을 움찔했다.

“금원은 무슨 볼일로.”

말투가 그새 딱딱해진 황제를 눈치채지 못하고 이설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삼설이가 다쳐서……, 아니 그 제가 키우던 토끼가, 그 토끼가 다쳐서 담벼락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데…….”

“마마께서 돌보는 토끼가 궁으로 되돌아가던 중 갑자기 웬 짐승에게 공격을 받아 피를 잔뜩 흘리며 다쳤습니다. 겁을 먹은 토끼는 금원 담장에 난 구멍으로 도망을 쳤고요.”

횡설수설하는 이설을 대신하여 단향이 차분히 말을 대신했다.

황제만이 자신을 금원으로 데려가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 이설이 더 이상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황제에게 사정했다. 황제 옷자락이라도 붙잡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온갖 수심을 담은 눈동자에 물기까지 차오르기 시작하자 황제가 짧게 실소했다.

“기가 막히는군.”

낮게 내리깔리는 황제의 말은 가까이 선 이설만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며 애원하던 이설이 곧바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헛웃음 섞인 목소리를 듣고 나니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송구합니다.”

“그래, 당연히 송구해야지.”

기어들어 가는 이설의 목소리를 되받아치며 황제가 한 번 더 실소했다. 헛웃음 소리가 이번에는 좀 더 크게 들렸다. 곧바로 중얼거리듯 하는 혼잣말은 이설조차 듣지 못했다. 어깨가 더 웅그러지는 이설의 머리카락이 황제가 내쉰 한숨에 스르륵 뒤로 날렸다.

“따라오거라.”

“예?”

“따라오라 하였다.”

황제의 눈치를 보며 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가 보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황제가 뒤돌아서며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서도 다시 물었다. 흘끔 고개를 돌려 이설을 본 황제가 같은 말을 반복한 뒤 훌쩍 앞으로 걸어 나섰다. 그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는 이설에게 윤 내관이 ‘따라 들어오시라 하십니다’ 하고 나직이 말했다.

황제가 본궁 안으로 발을 들이고 나서야 이설이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이설 뒤로 황제의 궁인들이 발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함께했다. 이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뒤를 돌아보지만 않았더라면 긴 복도를 걷는 내내 황제와 둘뿐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궁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탐나는 것이라도 있더냐?”

앞만 보고 걷는 황제는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이설이 하는 행동을 정확히 짚어 내며 심드렁히 물었다. 이설이 아닙니다, 라고 부정하기도 전에 황제가 말했다.

“그만 두리번거리고 걷는 길이나 잘 외워 두거라.”

그리고 다시 황제가 말없이 걸었다. 느릿하게 걷는 걸음이 언젠가 제 걷는 속도를 맞춰 주었을 때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그 옆자리에서 걸어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이설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관두고 황제의 등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본궁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걷고 나서야 어느 문 앞에 다다랐다. 양쪽의 미닫이문이 맞닿은 경계에서 바깥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 직전 황제가 이설에게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점점 넓어지는 문틈 사이로 아스름하게 해가 지는 풍경이 펼쳐졌다.

“자, 금원이다.”

한 발자국만 내딛어도 밖으로 향하는 문턱에서 이설은 가만히 서 있었다.

“뭘 그리 보고 서 있느냐. 네가 저 미천한 문지기에게까지 애걸복걸하며 오고 싶어 했던 곳인데. 어서 나가 보지 않고 뭘 해.”

어쩐지 말투가 냉랭해진 황제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쭉 황제의 태도를 곱씹어 봤을 때는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라 괜한 걱정을 털어 버렸다. 저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 괴롭게 만든다는 걸 여러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멍하니 서 있는 이설을 바라보던 황제가 다른 한쪽 미닫이문도 반대쪽으로 밀어 버렸다. 더 넓어진 시야로 눈앞이 밝아졌다.

끝이 없이 이어진 담장을 보았을 때 그 안이 넓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넓은 부지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나무며 꽃이며, 풀까지.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운지, 이설은 갑자기 제가 지극정성으로 가꾼 소야원이 너무 볼품없게 느껴졌다.

“정말 신첩이 들어가도 되는 곳입니까?”

“허락해 달라 그리 사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까는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한적한 복도를 한참 걷는 동안 겨우 마음이 진정됐다. 그 뒤 찾아오는 부끄러움은 오로지 제 몫이었다. 걱정하는 마음만 앞서 앞뒤 분간을 못 하고 경우 없이 한 행동들이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경솔했다.

돌이켜 보면 제가 다 잘못한 것이 맞다. 주제넘은 청을 했고, 방법이 무례했으며 그 모습을 너무 많은 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황제가 그 앞에서 경을 쳤어도 할 말이 없었을 텐데, 황제는 이설을 크게 나무라는 대신 정말 이설의 청대로 금원으로 데려와 주었다.

저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는 이설에게 황제가 가벼이 손을 저었다.

“닷새 전 전연사에서 연못에 이끼를 치우겠다며 다녀갔다. 달포 전에는 영선사에서 별궁의 서까래를 보수하겠다며 다녀갔고, 그전에는 무너진 담을 수리하겠다며 며칠 내내 드나들었어.”

“…….”

“너 한 명이 더 들어온다고 해서 뭐가 큰 대수겠느냐.”

하기야 이 큰 후원이 아무런 관리도 없이 방치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의 말을 듣고서야 이설이 냉큼 문턱을 넘어섰다. 황제에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 인사를 전하며 어디든 둘러봐도 괜찮을지 조심스레 묻자 황제가 고개만 끄덕였다.

크기는 소야원보다 배로 넓은 곳이지만 다행히 잎 푸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거나 덤불이 무성하지는 않았다. 황제에게 한 번 더 양해를 구한 뒤 정신없이 주변을 찾아 헤매기를 한참. 담장과 맞닿아 있는 덤불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삼설이를 찾았다. 가지 사이로 손을 넣자 조금 반항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럴 힘도 없는지 축 늘어져서 이설의 품에 얌전히 안겨 들었다. 나덕산에서 처음 만났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궁에서 데리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흰 털에 피가 엉겨 붙어 얼마나 다친 건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피를 많이 흘려 걱정이었다. 어서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신없이 헤매느라 시간 가는 줄도, 처음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줄도 몰랐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해의 위치가 조금 더 낮아졌다.

“찾았느냐.”

다만 황제는 이설을 보내 준 자리에 아직 그대로 있었다.

“해가 져도 찾지 못할까 싶더니.”

탐탁지 않은 눈빛이 이설을 한 번, 그리고 안겨 있는 토끼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잠시 그 존재를 잊고 있었던 터라 황제가 아직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이설이 적잖게 당황했다. 삼설을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황제라는 부담감을 지게 됐다.

“폐하께서 궁에 계시는 줄 모르고 소란을 떨어 송구합니다.”

“…….”

“아니, 폐하께서 궁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 거라는 의미가 아니라…….”

황제가 눈썹을 움찔하는 것을 보고는 이설이 다급하게 말을 번복했다. 도리도리치는 고갯짓에 머리카락이 살랑거려 이마를 가렸다. 반만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머리 장식이 모두 풀려 버린 것 같다. 태금궁까지 뛰어오는 길에 풀린 건지, 금원에서 삼설을 찾다 풀린 건지, 어디서부터 이런 산발 꼴을 하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본 황제에게 이런 몰골밖에 보여 주지 못하니 괜히 속상했다. 황제에게 어떻게 해서든 곱게 보이고 싶어 가락지 하나라도 손가락에 더 끼워 넣는 여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궁에 계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굳은 표정이 펴질 줄 모르는 황제의 분위기에 울적해진 이설이 시무룩하게 웅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곧 찾아오신다 약조하셨으면서 그간 왜 그림자 한 번 내비치지 않으셨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런 투정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네가 내 궁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

“무슨 볼일이 있어 여기까지 왔나 했더니.”

기가 찬 듯한 목소리에 헛웃음이 섞여 흘렀다. 흘깃 시선을 주는 곳이 어디인지 이설도 눈치를 챘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살짝 웅크려 품에 안은 삼설을 황제 시야에서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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