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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68)화 (68/300)

달의 황홀경

68화

본적이 있는 얼굴이다. 분명 탄영당에서겠지. 미소 짓고 있으나 진심은 느껴지지 않는 저런 종류의 얼굴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는 완벽히 알 수 있다. 이런 치들에게는 더 이상 친절이라는 수고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그대 아랫것들의 불찰은 내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대의 불찰은…….“

아직 바닥에 엎어져 있는 연화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얼마 전 새로 지급받은 새 궁녀복이 그새 흙바닥에 쓸려 해졌다. 일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표정이 굳어 좋은 목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잊지 않을 테니.”

눈이 동그래진 채로 품에 검은 짐승만 꼭 끌어안은 여인을 스쳐지나 낯선 궁인들의 무리를 빠져나왔다. 뒤를 따라 연화와 단향이 쫓는다. 등 뒤에서 ‘루 소의 마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단향의 손에 밀려 넘어지며 발목을 다친 것 같다. 내딛는 오른발에 찌르르한 아픔이 올라왔다. 이 몸은 왜 맨날 아프고 다치는 걸까. 괜히 울컥해지는 마음을 누르고 삼설이가 따라 내달리던 담벼락을 짚고 걸었다. 

“마마 움직이지 마셔요! 제가 얼른 가마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가서 의원도 냉큼 데려와야 한다!”

단향에게 이설의 부축을 맡기며 연화가 자리를 떠나려 한다. 이설이 됐다 손을 저으며 담벼락 중간에 주저앉았다.

담벼락 아래는 수풀이 낮게 깔려 있다. 그 사이를 헤쳐 살펴보니 작은 짐승이 겨우 오고 다닐 정도의 구멍 하나가 보인다. 주변에 붉은 피는 이제 막 묻은 듯하다. 삼설이가 별안간 사라진 것은 이곳을 통해서일 것이다.

“여기 담장 너머는 누구의 궁인지 아느냐, 연화야.”

“삼설이라면 그냥 두세요. 어차피 이 안은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누구의 궁이기에?”

다른 궁들보다 담이 높은 걸 보면 하찮은 용도로 사용되는 곳은 아닐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다랗게 늘어진 것만 봐도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여차하면 담이라도 넘어 궁 안으로 들어갈 기세의 이설을 보고 연화가 안절부절 눈치를 봤다. 정말 담이라도 훌쩍 넘어가면 좋으련만 이설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고 그럴 만한 높이의 담도 아니었다. 어물쩍 대답을 망설이던 연화가 답답한지 단향이 끼어들었다.

“이 담장 너머는 금원(禁園)입니다.”

“그러니까, 이 궁의 주인이 누구냔 말이다.”

“아무도 못 들어가는 금원의 주인이 누구시겠습니까?”

단향이 되묻는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생각했던 그 궁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민도 잠깐이다. 손에 묻은 핏자국을 보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입구가 보이지도 않는 긴 담벼락을 따라 뛰어가기 시작하자 놀란 연화와 단향이 뒤를 쫓았다. 마마, 하며 부르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다가는 이내 두 아이도 힘에 부치는지 부지런히 뒤따라 달리기만 했다.

*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내내 삼설이 걱정에 쉴 틈이 없었다. 이제 겨우 주변 경계심을 낮추고 제 품에 잘도 안겨 들어오는 작은 짐승이 다쳤다. 흘린 피의 양으로 보면 가벼운 상처가 아닐 것이다. 밖으로 데려 나온 제 잘못이라, 스스로를 탓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숨이 가쁠 정도로 급히 뛰었지만 궁인들이 많이 오고 가는 황궁 중앙에서는 그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채신머리없다 손가락질받는 것은 무섭지 않지만 황궁의 법도를 어길 수는 없었다.

“마마, 태금궁 안까지는 몰라도 금원은 정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잰걸음으로 이설을 뒤따르며 연화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이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걸음만 빨리했다. 전 같았으면 한번 힐끗 보고 인사도 없이 지나쳤을 궁인이나 문무관들이 자꾸만 아는 체를 하는 것이 귀찮다.

오며 가며 태금궁 앞을 오고 다닌 적은 있지만 그 앞까지 가까이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 궁과 무척 가까운 궁이었지만 쉽게 오갈 수 있는 궁은 아니었으니까.

남다른 위용을 과시하는 궁의 외관은 여타 궁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럴 정신이 아닌데도 궁 입구에 선 이설은 그저 궁 하나가 주는 위압감에 눌려 걸음을 멈칫했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이 이설을 알아보고는 별다른 제지 없이 길을 터 주었다. 연화와 단향이 서로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막상 궁 안으로 들어온 뒤에는 금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몰라 갈 곳이 없었다. 연화와 단향이라고 알 리가 있나. 두 사람은 처음 들어온 태금궁이 마냥 신기하면서도 행여 기별도 없이 황제의 궁에 들어왔다 큰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어깨를 움츠렸다.

“금원은 폐하가 지내시는 본궁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마마께서는 절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연화가 뒤이어 하는 말은 들었으나 듣지 못했다. 대꾸할 틈도 없이 이설은 본궁 쪽으로 몸을 돌렸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이설을, 궁인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중 아무도 그 걸음을 막아서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본궁 앞까지가 끝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본궁 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팔을 들어 이설을 저지했다. 그 뒤 이설을 알아보고 머리를 한 번 조아리긴 했지만 막아선 팔이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본궁에 볼일이 있네.”

“황제 폐하께서 계시지 않은 본궁은 허락된 분들만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마마께서는……, 궁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이설의 피 묻은 손과 발을 본 병사가 말을 잠시 멈췄다 이었다. 당황스러운 눈빛이 이설의 어깨 뒤에 서 있는 단향과 연화에게 향했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네. 금원만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되니…….”

“금원이라니, 말도 마십시오, 마마. 금원은 황제 폐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무례하게 말을 끊으면서도 병사는 도리어 이설이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황당해했다. 다시 연화와 단향을 쳐다보는 눈빛이 마치, 왜 이런 말을 미리 이설에게 하지 않았는지 탓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연화가 거 보라는 듯 이설의 팔을 슬쩍 붙잡아 당겼지만 그 손을 뿌리치며 이설이 병사 앞으로 한 걸음 더 바짝 다가갔다.

“정말 잠깐이면 되네.”

“황제 폐하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곤란하니 어서 돌아가시지요.”

“마마 일단은 궁으로 돌아간 뒤 다음번에 폐하께 직접 청하시는 게 어떠할까요.”

태도가 영 공손치 못한 병사를 흘겨보며 연화가 이설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설이 움직이지 않고 완강히 버티니 차마 힘으로 잡아끌지는 못하고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단향은 이설에게로 주위의 관심이 쏟아지니 혹여 황제의 궁에서 큰일이라고 날까 초조하게 이설의 눈치를 봤다.

“그럼 내가 직접 들어가지 않아도 좋으니 다른 궁인이라도 들어갔다 나오면 안 되겠는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말을 이미 몇 번이나 들었지만, 이설로써는 쉽게 돌아설 수가 없었다. 품에 안으면 팔에 다 들어차지도 않는 작은 토끼다. 그 작은 것이 제 손에 피를 흠뻑 적실 정도로 다치고 겁에 질려 도망을 쳤는데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혹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게.”

“이 일로 문제가 생긴다면 마마가 책임을 지시기도 전에 제 목이 달아날 겁니다.”

실소를 흘리는 얼굴이 가벼운 조롱을 담아 이설을 내려다봤다. 눈치 빠른 연화만이 그 표정을 읽어 내고 야멸차게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이설을 내려다보던 눈이 연화에게 사납게 옮겨갔다.

“약조하겠네. 책임은 모두 내가 질 테니 잠시만이…….” 

초조함만 한 가득인 이설은 두 사람의 신경전을 보지 못했다. 다급해진 마음에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걸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순간 날카로운 창끝이 이설의 가슴팍을 향했다. 연화와 단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설의 앞을 막아섰다.

“이 이상 본궁 안으로 발을 들이신다면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

“이만 돌아가시지요.”

단호한 목소리는 길을 열어 줄 여지가 없다. 맥이 풀린 이설이 고개를 떨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받쳤다. 손바닥의 마른 핏자국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포기하고 되돌아갈 수가 없어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니 제 가슴팍에 겨눠진 창도 그대로다. 뒤로 물러나기 전까지는 거두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설도 고개 숙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이 소란스럽다. 아마 저 때문이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궁에 들어와서 허락되지도 않는 궁에 들어가겠다 억지를 부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람들이 발소리가 들린다. 주변으로 모여드는가 싶어 더 곤란해졌다. 이만 비은궁으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삼설이를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다. 함께 있던 연화와 단향이야 말로 계속 이곳에 있기가 난처했는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꾸만 이설을 부르며 슬쩍슬쩍 옷자락을 당겼다. 

하지만 하얀 털이 피에 젖어 도망가던 삼설이가 눈에 밟혀 차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청하겠네. 원하는 건 뭐든 다…….”

“…….”

“아……!”

“원하는 건 뭐든 어쩌겠다는 것이냐.”

“…….”

“설아.”

이마를 받치고 있던 손이 내려오며 허공 어딘가에 애매하게 멈췄다. 붉어진 눈시울이 놀란 듯 커져 정면을 응시했다.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이설의 손을 잡아 내려 주었다.

“물을 것이 너무 많아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

“다쳤느냐.”

“다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흘린 피가 아닙니다.”

“그럼 일단 됐다.”

잔뜩 굳어 험악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에 하마터면 이설은 여긴 어쩐 일로 찾아오셨는지 물을 뻔했다. 이곳에 황제의 궁이라는 걸 순간 잊었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황제라 들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는 이 시간에 황제가 태금궁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럼 그동안 어찌 한 번 찾아오지 않으셨나 울컥한 마음을 숨기며 황제를 불렀다. 폐하,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황제는 대답 없이 이설의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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