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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64)화 (64/300)

달의 황홀경

64화

“마마, 기연입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기에 서책을 덮으니 곧 기연이 기별했다. 이설의 허락 후 문턱을 넘어서는 기연은 아직 이설이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근래에 그랬던 것처럼 제가 왔다는 것을 기별 후 잠시 기다렸다 문을 열거나 아니면 이설이 직접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을 텐데, 이설은 그저 들어오라 짧게 대답하고 말 뿐이었다.

어제 오후부터 비은궁은 경사였다. 오랜 걱정이었던 이설이 마침내 목소리를 되찾았고, 곳간은 풍요로워졌으며 앞뜰에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보화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태금궁에서 온 함들을 궁 안으로 옮기는 것도 어제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고, 어떤 품목들을 받았는지 정리하는 것은 다음 날인 오늘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끝마쳤다.

어제부터 그 커다란 궤짝들을 옮기느라 수고한 기연이 기진맥진한 얼굴로 들어왔다.

“정리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주 상궁이 준비해 둔 방은 턱없이 모자라 일단 비단들은 모두 곳간 옆 칸에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 많은 줄은 몰랐는데.”

“비단만 해도 수십 필입니다.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기연이 복에 겨워 하는 농이 아닌 걸 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껏 힘을 쓰며 함들을 옮기는 아이들은 제 것도 아닌 값진 물건들에 연신 싱글벙글 이었지만, 기연은 아직까지도 영 마뜩잖은 태도를 일관했다. 황제가 선한 마음에 아무 이유 없이 이것들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이설 앞에서 대놓고 이리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설이 보기에 기연의 생각은 그랬다. 그리고 사실, 오늘 아침 유강이 와서 기연의 험담을 잔뜩 늘어놓으며 전해 준 말도 그러했다.

하지만 비은궁을 통틀어 그런 석연치 않은 의심을 품은 것은 기연 하나뿐인 듯했다. 심지어 주 상궁조차도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굳이 황제의 의중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기연만큼 의심의 눈초리를 품으며 다가올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미간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주 상궁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궁녀들은 말할 것도 없는 경사였다.

“궁 밖에 내다 판 것을 채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혼례 때 받았던 패물도 이보다는 적었을 것입니다.”

단언하건데 혼례를 하며 받았던 패물도 제법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보다도 많은 양이라니. 황제는 제게 보내 준 것들의 값어치를 알고도 덜 채워진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 말했던 것일까.

“역시 절반이라도 태금궁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이 나으려나.”

“그런 의미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심 심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이설에게 기연이 한숨을 토하며 대꾸했다. 황제의 하사품을 돌려보내는 결례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이설이 농 따위 통하지 않는 기연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목소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곧장 알리지 않은 일에 아직 기연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유강과 달리 기연은 이설에게 마냥 무르지만은 않았다.

아직 풀리지 않은 마음으로 뚱해 있는 기연과의 멋쩍은 대화를 끊고 연화가 탕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어제 황제의 명으로 다녀간 태의가 보내오는 탕약이었다. 늙은 태의가 어린 손주를 달래듯 인자한 말투로 몸에 좋은 약은 원래 쓴 법이라며 몇 번이나 반복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탕약은 끔찍할 만큼 쓰고 떫어, 단 것은 부러 찾지 않는 이설조차도 탕약 후에 꿀에 절인 과일을 한가득 입에 넣어야 했다.

“아픈 곳도 없는데 도대체 탕약은 왜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원기를 회복하시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내 원기는 이미 다 회복되었어.”

“목간 물바가지도 못 퍼 올리시는 마마께서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기연 못지않게 아직 토라진 연화가 톡 쏘아붙였다. 전 같았으면 무엄한 말버릇이라고 한마디 했을 기연이 잠자코만 있는 게 못내 억울하다.

찻잔도 아니고 사발에 가득 담겨 온 탕약을 흘끗 보고 길게 한숨을 한 번. 꿀에 갠 홍시를 옆에 들고 서 있는 연화가 얼른 드시라고 재촉한다. 눈을 질끈 감고 꿀꺽꿀꺽 단숨에 넘기고 사발을 내려놓자 빈손에 조막만 한 종지를 들려 준다. 곧바로 입에 가져다가 꿀꺽 삼켰지만 입안에 텁텁한 맛은 아직 그대로다.

“몸에 좋은 약은 원래 쓴 법입니다. 참고 드시면 회복에 다 도움이 되실 겁니다.”

괴로운 얼굴을 하고 찻물로 입안을 헹구는 이설을 본체만체하며 연화가 얄미운 소리를 남기고 나갔다. 기연조차도 그 맹랑한 말투에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가 이설과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굳혔다. 억울하다 정말. 삐죽이는 입술 끝에 묻은 홍시를 수파로 닦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마님. 화홍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침소로 들어온 화홍은 이설과 나란히 앉아있는 기연을 보고 놀란 눈치로 냉큼 시선을 이설에게로 돌렸다. 남들과 비교해서 절대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없는 이설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어색한 시선 처리였다. 흘끔 기연을 보니 이쪽도 반응이 아주 없지는 않다.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가도, 한편으로는 내내 아무 말 없던 기연에게 느끼는 서운함을 감추며 못 본 척 화홍을 들였다.

“탕약이라면 연화가 벌써 다녀갔다.”

이설이 조금 불만스러운 말투로 툴툴거렸다.

“그것이 아니오라, 객청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응접실로 모시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그게 좀…….”

흘리는 뒷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이라고는 늘 침소에만 머물다 가는 황제뿐인 비은궁이다. 응접실은 앞뜰에서 드나들기가 좋아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 두고 곳간처럼 사용하고 있다. 흙 묻은 호미며, 삽과 괭이들이 어질러진 곳에 손님을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번 손조익이 알현을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거절 후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화홍에게 바로 물었을 될 것을, 혼자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게 우 미인이었다. 어제 했던 말도 있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반가운 마음에 얼른 침소를 나서려는데 화홍이 말을 뒤이었다.

“태감 단소운 님께서 마마를 뵙고자 객청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감 단소운?”

“그……, 태자마마께 학문을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일전에 후원에서 폐하와 함께 오셨던…….”

그때의 일을 입에 담는 게 외람되기라도 하듯 화홍이 말끝을 흐리며 이설의 눈치를 봤다. 낯익은 이름이 아니기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이설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주춤했다.

황제가 금군을 이끌고 제 후원을 찾아왔던 날에 보았던 사내다. 태자의 스승이라고 하니 생각이 난다. 황제의 뒤에서 조용히 나타나 제게 아찔한 충격을 준 그 단정한 얼굴을 기억한다.

“기별 없이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시라며, 편하신 때에 오셔도 된다 말씀하셨습니다. 종일이라도 기다릴 모양이시던데. 다음에 찾아오시라 말씀 전할까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이설의 표정을 살피며 화홍이 물었다. 그 말 후에도 이설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의복을 정제하며 침소를 나섰다.

“아니, 지금 가겠다 고하여라.”

*

금국에 온 뒤로 황제를 제외하고 다른 이와 독대로 차를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리에 앉으라는 말에 허리부터 꾸벅 굽히는 예의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설이 괜찮다 손사래를 치며 먼저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 앉는 사내의 얼굴을, 이설이 조심스레 들여다봤다.

모나지 않게 단정한 얼굴에 고지식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딱 학자의 외양이다. 관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상투로 틀어 올린 머리는 나무랄 곳 없이 단정했다. 태자의 학문 스승이라는 자리가 이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이 말고 없을 것 같다.

태감 단소운입니다, 라는 말을 전하는 목소리가 이전에 후원에서 들었던 것과 겹치며 그때 생각이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볍게 웃으며 제 소개로 답하자 내내 무표정이었던 소운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건강상의 안부를 먼저 물으며 목소리가 돌아와 다행이라는 말이 무척 살갑게 들렸지만 그 뒤 낮아지는 목소리에 이설도 긴장했다.

“일전에 저와 후원에서 만나 뵌 적이 있는데, 혹시 아직 기억하십니까?”

“예, 기억합니다.”

“폐하께 고하기 전 마마를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 때문에 겪으신 고초에 감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내리깐 눈으로 전하는 사과에 그때 일을 들춰내어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다분히 진심을 토하는 마음이 느껴져 이설이 미소 띤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리어 제가 태감께 사과드려야 하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제 무지로 태감께서 얼마나 당황스러우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찮은 신분입니다. 부디 말씀 낮추어 주십시오.”

겸손한 말씨에 묻어나는 인자함이 상대의 나이대를 더 높아 보이게 만드는 느낌을 주긴 했지만 외양만 봤을 때는 딱 이설과 비슷한 나이쯤일 것이다. 태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일을 도맡아 할 정도면 학식도 무척 높다는 것인데, 많지 않은 나이에 태감의 자리까지 오른 소운에게 바로 말을 낮추는 일이 새삼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하겠다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슬쩍 웃음만 흘리고 마는 이설에게 소운도 그리해 달라 재촉하지 않고 곤란한 웃음으로 그저 넘기고 말았다.

“기별 없이 찾아온 연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그날의 일을 사과하는 것만이 찾아온 이유가 아니라는 것은 느낌상 알고 있었다. 본론을 꺼내려는 듯 자세를 좀 더 바르게 하는 소운에게 귀를 기울였다.

“태자 전하의 일 때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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