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63)화 (63/300)

달의 황홀경

63화

이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뒤쫓아 오던 궁인들은 누각 멀리 길게 늘어서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들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이쯤 황제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황제는 말이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이곳은 황궁이고 넌 내게 이름을 준 후궁인 것을.”

“…….”

“네가 그에 걸맞게 처신하는 수밖에.”

높낮이 없는 평이한 어조는 감정이 없다. 희미하게나마 묻어나는 유감의 뜻은 언뜻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다만 낮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전하는 의미를 눈치챘다.

이설은 무지하고 연약했다. 황궁 돌아가는 실정에 아는 바가 없었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지레 주눅이 들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제 위치 같은 건 고려해 본 적 없다. 황제가 저를 정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설도 스스로를 그렇게 대우했다. 황제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황제의 정인이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로.

황제의 입장을 헤아렸어야 했다. 황제의 하나뿐인 정인이라 세간에 알려진 이상 행동거지에 신경을 썼어야 했다. 외면받는 처지가 서글퍼 황제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말은 변명이다. 황제의 체면은 차치하고, 왕족으로서의 긍지도 없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오늘 너를 전장 한가운데에 던졌는데.”

“…….”

“어떻게, 이번에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긴 눈매의 꼬리가 살포시 접혀 들어간다. 다문 입매는 과하지 않게 완만한 호선을 그리며 입꼬리를 위로 뻗었다. 비난인지 조롱인지 알 길 없는 황제의 기분을 헤아리려 애쓰지는 않았다.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누군가 차가운 물을 머리 꼭대기에서 흘려보내는 듯 뿌옇게 흐렸던 정신이 서서히 선명해진다. 여태껏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렴풋 그 근원을 알 것 같다.

“차가 식겠다. 마저 들거라.”

다시 차를 음미하는 황제는 깊은 사색에 침잠하듯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애초에 이설에게 대답을 구하려 물은 것은 아니었는지 대답을 엄하게 다그치지도, 짓궂게 채근하지도 않았다. 이설은 황제가 권한대로 차를 더 들지는 못했다. 초점 없이 내던져진 시선은 황제의 손가락쯤을 향해 있었다. 무지몽매했던 지난날의 제 처세를 돌이켜 보는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어째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것일까.

어두운 표정을 들여다보던 황제가 짧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전 같았으면 무겁게 내려앉았을 마음을 다부지게 붙들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무겁게 감았다 뜨며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 겁먹을 표정을 할 것까지야.”

“…….”

“그래 내 농이 심했다. 네가 겁 많고 심약하다는 사실을 또 잊었…….”

“……폐하 저는,”

찻물에 젖은 입술이 달싹이며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까이 앉은 사람만 겨우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였지만 마주 앉은 상대에게 닿기에는 충분했다. 한동안 내내 부어 있던 목 안쪽이 공기의 진동으로 울리는 느낌이 생소했다.

“…아니, 신첩은 폐하께 누가 되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말을 해 보는 아이처럼 또박또박 이어 나가던 말은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그대로 끊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두어 걸음 만에 이설의 옆에 섰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설도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와 마주 섰다. 고개를 빗겨 올려 바라본 황제는 이설로서는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폐하……,”

“언제부터.”

“……예?”

“목소리는 언제부터 돌아온 건지 물었다.”

“비가… 그쳤던 날 아침부터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목구멍에서 간신히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간신히 대답했다. 황제가 만든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 숨은 몸 위로 시원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황제가 훌쩍 떠나고 우장절이 비로소 끝났던 아침, 이설은 침상 위에서 숨죽여 울던 중 목소리가 조금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마다 조금씩 소리를 내다 보니 어제저녁부터는 전처럼 말을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아직 목 안쪽의 부은 느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까짓 아픔쯤이야 참을 만한 정도다.

기연이나 유강은 물론, 주 상궁을 비롯한 다른 궁녀들에게도 아직 이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회복이 더뎌서 걱정이라 울상을 짓는 궁녀들을 보면서도 이설은 미안함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낫고 있다, 한마디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온 목소리를 제일 먼저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기에, 이설은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혼자 연습했다.

“아직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닙니다. 송구합…….”

“이리 가까이.”

“…….”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순식간에 허리에 휘감긴 팔에 끌려간 몸이 황제와 맞닿았다. 놀라 숙인 고개가 땅을 보고, 이마는 황제 어깨 언저리에 쿵 부딪혔다.

“계속 말해 보아라.”

귓가에 울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제 것과는 다르게 무척 부드럽게 들려 이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황제의 어깨자락에 이마를 문질렀다.

“아, 아직 듣기 좋은 목소리가 아니기에 송구하다 말씀드리려 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말할 것 없다. 무리하지 말거라.”

이설이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려 애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황제가 허리를 숙여 고개를 이설에게로 더 가까이 가져갔다.

“네 궁인들에게 물으니 아직 목이 다 낫지 않았다 하던데. 내게 거짓을 고하라, 네가 일렀느냐.”

“아닙니다. 제 궁인들도 아직 모르고 있는 일입니다.”

“…….”

“폐하께 가장 처음으로 말씀드리고 싶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에게 평소 하던 말버릇처럼 뒷말을 흘리려던 것을 인지하고 곧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서로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탓에 황제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얼굴을 보게 될까 봐 사실 조금 겁을 먹었다. 굳은 마음을 먹은 뒤에도 황제는 이설이 겁을 내는 유일한 한 명이라는 것이 변함없었다. 그 사실을 곧바로 깨달은 뒤에도 스스로가 한심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황제를 향한 감정은 그 어느 것 하나 억울한 것이 없다.

곧 허리께에 느껴지던 압박감이 느슨해진다. 황제가 놓아주는 것이라 여긴 이설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려 할 때였다. 머리에 내려앉은 무게감이 황제의 손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치장해 놓은 머리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황제의 손이 이설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시선도, 대화도 없는 고요한 시간이 잠시 흐르고 난 뒤에야 황제가 손을 거두었다.

“이만 처소로 돌아가 보아라. 곧 태의를 보낼 테니.”

“조반 후에 의녀가 이미 다녀갔습니다. 허나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

“태의를 보내겠다.”

노기 없는 단호한 목소리에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네, 하고 대답했다.

황제가 뒤로 물러서며 멀리 궁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손끝을 따라간 눈길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서 있는 궁인들로 향했다. 한눈에 봐도 놀라움을 듬뿍 안은 이설의 궁녀들이 잰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어도,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이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는 것을 대충은 눈치챈 듯 보였다. 놀란 두 눈이 이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보였지만 황제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만큼 철없는 아이들은 아니었다.

“곧 태의를 보낼 테니 처소로 모셔가거라.”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목소리의 온도가 낮아진 황제는 여전히 이설의 발그레진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럼 신첩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괜히 양쪽에 선 화홍과 연화의 눈치를 보며 말을 웅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설의 목소리를 들은 두 사람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 민망했다. 못 본 척 태연히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고 일어나자 가만히 이설만 들여다보고 있던 황제가 무던한 목소리로 이설을 붙잡았다.

“설아.”

“예, 폐하.”

“덜 채워진 것이 있다면 태금궁에 전하여라.”

“…….”

“어차피 넌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을 테지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뜻을 물을 틈도 주지 않고 이만 물러가라 손을 젓는다. 석연찮은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전각을 떠나며 이설은 힐끔 뒤를 한 번 더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황제는 여전히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얼굴일 뿐, 미목에 감춰진 마음은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이설이 전각에서 나오자 황제의 궁인들 선봉에 있던 차란이 이설을 지나치며 급히 황제에게 걸음 했다. 정면으로 부딪친 당혹스러운 얼굴에 이설이 더 놀라 차란의 인사를 받아 주지 못했다.

그 뒤 비은궁으로 향하는 내내 궁녀들의 성화가 이어졌다. 주 상궁이 있었더라면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탄영당을 나온 뒤 태금궁 내관의 전갈을 받고 그녀는 급히 비은궁으로 돌아갔다.

겸연쩍게 웃는 이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서운한 마음에 울먹이는 아이들을 겨우 달래 주며 궁에 도착했다. 푸른 잎사귀로 둘러쳐진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던 긴장이 한 겹 걷어졌다. 오롯이 제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놀라울 정도다.

담 안의 모든 것은 이설이 생각한 대로다. 제각각 크기의 나무도, 검은 밤 달을 그리는 호수와 그 위에 돌다리도, 그리고 이설이 얼기설기 형편없는 솜씨로 만든 붉은 비단 주머니를 아이들이 장난삼아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모습까지도.

그러나 오늘 아침까지도 단지 그뿐이었던 제 궁의 모습이 여느 날과 조금 달랐다.

“이설 님, 빨리 와서 여기 이것들 좀 보세요!”

여전히 이설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주 상궁에게 매번 면박을 면치 못하는 유강이 또 말실수를 했다. 하지만 그 옆에서 유강의 말을 듣고 서 있던 주 상궁은 문책 한번 하지 않고 점잖이 이설을 맞이했다. 크게 티 내지는 않으나 어쩐지 한껏 개운한 표정의 주 상궁을 한 번. 끝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녀의 어깨 너머 높이 쌓인 함들이었다.

의아함에 눈만 깜빡거리는 이설에게 주 상궁이 아뢰었다.

“모두 태금궁에서 온 것입니다.”

주 상궁이 먼저 일러 주기 전 눈치채고 있었다. 함 하나하나에 새겨진 봉황 음각과 금색 비단보가 그것들의 출처를 증명했다.

덜 채워진 것이 있다면 태금궁에 전하여라.

그 말은 이것을 두고 했었던 것인가. 그때 말을 해 줬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감사하다 말이라도 올렸을 텐데. 이전 같았으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황제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한 불안함은 전과 같지 않다.

이설을 먼저 보내며 황제는 조만간 비은궁을 찾아가겠다 언질을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 괜찮았다. 덜 채워진 한 가지는 더 이상 욕심이 나지 않는다. 조심스레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받았으니, 이거면 됐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