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61화
이설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도 일어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는 황제가 채근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암만 봐도 농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이설은 숙였던 고개를 빼꼼 들어 황제의 눈치를 봤다. 다시 봐도 황제는 이설에게 자리를 비켜 줄 모양이 아닌데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게 할 셈이냐. 어서 앉지 않고 뭘 해.”
도통 어디에 앉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어려운 과제 앞에 당면한 어린아이처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 상궁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도 황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다. 결국 결정한 게 황제 발치의 바닥이다.
찌걱거리는 나무 바닥 위에 무릎을 꿇으려 몸이 낮아지는 순간 갑자기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내 언제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으라 하였어.”
기가 찬 언성이 조금 높았다. 황제가 손을 뻗어 팔을 끌어당긴 바람에 상체가 엉거주춤하게 숙여진 자세로 황제 가까이에 닿았다.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해 앞으로 기울어지려 하기에 본능적으로 황제의 어깨를 짚었다. 일순 찡그려지는 황제의 얼굴을 보고 곧바로 손을 떼려고 했지만 팔을 당기는 힘에 맥없이 끌려왔다. 종잇장처럼 나풀거리는 몸은 황제가 밀고 당기는 힘으로 저 혼자 어딘가에 턱 하니 걸터앉아 이설을 당황하게 했다.
“여기.”
“……”
“여기가 네 자리라 하지 않았느냐, 설아.”
나른하게 질책하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흩어졌다.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은 앉은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이설이 놀라 배로 커진 눈을 옆으로 돌렸다. 한결 표정이 부드러워진 황제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허리를 끌어안지 않은 다른 한 손이 이설의 귀밑머리를 뒤로 넘겨 주었다. 남의 살이 닿는 생경한 감각에 정신을 차리고서야 자신이 어디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는지 깨달았다.
이설은 지금 황제의 허벅다리 위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네 자리를 여기 두고 왜 저런 어울리지도 않는 곳에 가 앉아 있었던 것이냐.”
“…….”
“미련하기는.”
낮은 목소리로 타박하는 황제의 말이 사실 잘 들리지 않는다. 이설은 지금 말 그대로 좌불안석이었다. 황제의 존체에 앉아 있는 마음이 오죽 불편하랴. 커진 눈동자로 황제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이 심정을 전할 길이 없어 속이 답답하다. 멋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제힘으로 벗어나기는 역부족이다. 황제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건 그 밤에 있었던 일만으로도 충분하다.
“저 자리가 탐나 앉아 있던 것이냐?”
가당치도 않은 것을 물으시기에 버릇처럼 이설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미 턱이 빠지게 놀라 있던 후궁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황제에게 고갯짓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세 살 어린아이도 알 만큼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그만큼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법도 중 하나였다.
모두가 황제의 눈치를 살피는 살폈지만 정작 황제는 불쾌한 기색 없이 이설의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렸다.
“항상 네 자리를 분명히 하거라. 나와 태자를 제외하고 이 금국에 너보다 더 높은 곳에 앉을 수 있는 자는 없다.”
“…….”
“알았느냐?”
이설이 이번에는 위아래로 세차게 끄덕였지만 사실 이 말도 귀담아듣지는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얼른 황제가 저를 놓아주어 이 몸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후궁들은 물론 황제를 모시는 궁인들까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표정들이 모두 자신에게 향해 있는 걸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땅에 겨우 닿는 발가락에 힘을 잔뜩 주고 황제에게 제 무게를 얹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설아.”
빳빳하게 굳었던 목 뒤로 따뜻한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모아 내리는 황제의 손가락이 맨살을 스친 모양이다. 경직될 줄 알았던 몸이 그 순간 긴장이 풀려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황제가 허리를 잡아 준 덕에 뒤로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황제 쪽으로 몸이 무너져 자세가 더 안정되었다.
이설이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황제가 슬쩍 미소 지으며 하얀 뺨을 쓸어내렸다.
“조반은 먹고 온 것이냐.”
한껏 너그러워진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이설이 황제 뒤에 선 궁인들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이리 납작한데.”
허리 한 바퀴를 가볍게 두른 손이 판판한 배 위를 슬며시 문질렀다. 이설이 어깨를 움츠러뜨렸지만 등 위를 가볍게 토닥이니 곧 힘없이 풀어졌다.
“가장 맛이 좋았던 것 세 가지만 말해 보아라.”
앞으로 불쑥 손바닥이 내밀어졌다.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이설이 난색을 표하며 바라봤지만 소용없다. 어서. 재촉하는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황제가 시킨 대로 할 일이었다. 단정히 정리된 손톱이 손바닥 위를 긁지 않게 조심하며 오늘 조반상에 찬으로 나온 음식 중 생각나는 것을 아무렇게나 써 내려갔다. 옆에 선 나이 든 내관의 주름 진 얼굴이 실색할 때마다 다 제 탓인 것 같아 몹시 민망했다.
육전에 손도 대지 않는 것을 벌써 몇 번이나 봤는데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며 다그치는 황제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서는 또 무슨 거짓을 지으려 머리를 굴리는 것이냐 타박도 들었다.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무릎에 앉아 혼이 나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제의 손이 하얀 목덜미에 닿았다. 불긋한 멍울이 아직 남아 있는 곳에 멈춘 손이 그 위를 지워 없애려는 듯 문질렀지만 더 붉어지기만 할 뿐이다. 이곳에 다시 황제의 손이 닿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다시 불온한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 외로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따뜻한 손의 열감이 어쩐지 기분 좋게 느껴졌다.
“혹 아직 아프거든,”
황제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이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픈 곳은 이제 없다. 단 한 곳, 아팠던 곳이 있었는데 조금 전 황제가 설아, 하고 불러 주었을 때 다 괜찮아졌다.
“……그럼 됐다.”
이설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챈 황제가 이내 말을 접었다.
황제의 왼쪽 어깨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의복에 가려져 있으니 상처가 얼마나 회복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황제가 손가락으로 이설의 턱 끝을 툭 건드렸다. 흠칫 놀란 이설이 고개를 돌렸다. 황제와 마주 보는 시선의 거리가 너무 짧다. 이제 보니 황제 눈가에 피곤이 짙게 내려앉은 듯했다.
“어깨 부상은 낫고 있다. 상처가 벌어져 회복이 좀 더딘 것만 빼면 걱정할 것 없어.”
“…….”
“그제부터 머리앓이가 생기는 것 같아 아침저녁으로 탕약을 먹고 있지만 별 차도는 없다. 아마 잠이 부족한 탓이겠지. 낫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 마음 쓸 것 없다.”
“…….”
“무정한 그대가 내 안부는 먼저 묻지 않기에.”
설핏 웃음기 어린 얼굴이 이설을 지긋이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 채로 눈 깜빡이기를 서너 번 정도. 좀처럼 먼저 눈 돌리지 않는 황제를 계속 바라보기가 쑥스러워 이설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갈 곳 잃은 눈동자가 하필 양 소원과 마주쳤다. 만면에 퍼졌던 과장된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다. 만난 이래로 가장 사나운 얼굴이 맹렬한 기세로 이설을 쏘아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매서운 눈길에 이설이 숨을 덜컥 들이마셨다가 괜히 사레가 들려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소매로 입을 가리고도 기침이 잦아들지 않자 멀리 주 상궁이 이설이 마시던 차를 들고 급히 다가왔지만 황제보다는 빠르지 못했다.
“자, 마시거라.”
황제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이설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제 손 하나 까딱 않고 이설은 황제가 입에 대 주는 찻물을 꼴깍꼴깍 목으로 넘겼다. 그 와중에도 자꾸만 기침을 토해 내니 찻잔이 흔들렸다. 찰랑이는 찻물이 아래로 넘쳐흘러 황제의 소맷자락을 적셨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이설이 고개를 뒤로 빼며 찻잔을 거부하고 나서야 젖은 소매를 아래로 가볍게 털어 내는 게 전부였다. 그 뒤 이설이 먹다 남긴 차를 대수롭지 않게 한입 맛보고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찻잎은 양 소원 그대가 내어온 것인가?”
이설을 무릎 위에 앉힌 뒤로 다른 이들에게 눈길 한번 안 주던 황제가 물었다. 양 소원은 굳었던 표정에 금세 화사한 미소를 그려 넣으며 기쁜 듯 대답했다.
“예. 폐하께서 그제 대전에서 제 부친이신 우장군 원후연에게 하사하셨던 찻잎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고르고 골라 주신 귀한 찻잎을 모두와 나눠 맛보고 싶은 마음에 신첩이 부친께 특별히…….”
“맛이 좋은 것 같으냐?”
길게 이어지는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듣는 이가 먼저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네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아 황궁으로 들어온 찻잎은 모두 대신들에게 하사하였는데.”
“…….”
“마음에 들면 같은 찻잎을 더 진상하라 명하마.”
이설이 멍하게 풀린 동공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황제 말대로 제 입맛에 맞는 차는 아니었다. 시큼한 맛이 나는 차는 좋아하지 않는다.
알았다는 듯 황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옆으로 밀쳐 두었다. 더 마시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나저나 성치 않은 몸으로 이깟 차나 마시러 여기까지 온 것은 네 미련한 고집 때문이겠지?”
이설에게 물었으나 실제로 시선이 향한 곳은 다시 양 소원이다.
“침전에서 꼼짝 않고 휴양 중인 소의를 별 목적도 없이 모여 차나 마시는 일에 일부러 불러낼 만큼 경우 없는 자는 없을 테니 말이야.”
“…….”
“……있어서도 안 되고.”
삽시간에 안색이 파리해진 양 소원이 처음으로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황제는 별 내색 없이 무던한 표정 그대로 이설에게 돌아왔다.
“그렇지 않은가?”
이설은 그냥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잔말 말고 긍정하라는 무언의 눈빛이 그리하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