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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56)화 (56/300)

달의 황홀경

56화

달이 밝은 밤, 황제는 외진 숲속 한 곳에 홀로 서 있었다.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그 주위에는 고만한 크기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려 있다. 모두 하나같이 잎이 하얗다. 비슷한 나무를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매번 고민해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고민은 아마 꿈에서 깬 뒤에는 모두 잊을 것이다.

그래, 지금 이곳은 꿈속이다. 황제는 시원한 바람이 가지고 오는 꽃향기를 맡으며 깨달았다. 자신은 조금 전 비은궁에서 이설을 품에 안은 채로 잠이 들었다. 이설에게는 지금 맡는 것과 비슷한 꽃향기가 났다.

오랜만에 꾼 꿈은 기억했던 것과 달라진 게 없다. 모든 감각은 이전과 동일하게 황제를 감싸 안았다. 이설과 함께 하루를 보내면 이 꿈을 꾸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왜 또다시 같은 꿈을 꾸게 된 걸까. 제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시 이설을 멀리할 생각은 없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풀숲 사이로 흐릿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 순간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수백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하얀 이파리가 주위를 흩날린다. 이때쯤 다시 깨닫는다. 이건 하얀 이파리가 아니라 꽃이다. 나뭇가지 위에 빼곡하게 피어난 것은 작고 하얀 꽃이다. 이 또한 다음 꿈을 꾸게 될 때면 잊을 일이다.

흩날리는 꽃잎에 정신이 쏠린 사이 멀리 흐릿하던 인영이 가까워졌다. 형체 또한 이제 또렷하다. 마주 선 두 사람의 거리는 열 보 남짓. 황제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생각이다. 지난번 뜻 모를 호기심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갔다가 꽃이 핀 나뭇가지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손목에 새겨진 이름을 발견했다. 그 뒤로 황제는 이 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노라, 그저 멀리서 저자를 바라보며 꿈에서 깨기만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

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모호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금쯤이면 깰 때가 되지 않았을까. 꿈에서 깨면 다시 잠들기 어렵겠지만 그다지 짜증 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쯤 이설은 제 품에서 쌕쌕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태평히 잠들어 있겠지. 번지는 미소를 마른 손으로 쓸어내려 지우고 맞은편에 서 있는 상대를 바라봤다.

그 순간 평소와 다른 것 같다 느꼈던 것은 서로 간의 거리였다. 열 보 남짓 떨어져 있던 상대는 어느새 반 이상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이 정도로 가까이서 본 것은 꽃가지를 받았던 날 이후 처음이다. 무슨 일인지 그날 상대와 무척 가까이 마주 섰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상대의 외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꽃가지를 건네주던 손이 무척 곱고 보드라웠던 것밖에는.

그쯤 멈출 줄 알았던 상대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아직 날리고 있는 꽃잎들에 드문드문 가려진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마침내 한 보 앞까지 다가온 상대는 희미하게 웃고 있다.

얼굴을 의식할 수가 없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낯이 익은 자인지, 낯선 자인지. 마주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도 알 수가 없다. 의식할 수 있는 건 바람이 불면 긴 머리카락이 꽃잎과 함께 흩날린다는 것과 그럴 때면 향긋한 꽃향기가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게 할 만큼 진하게 풍긴다는 것뿐이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 위로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닿는 볼은 부드럽고 서늘하다. 볼 위에 제 손 위로 고운 손 하나가 겹쳐졌다.

“……가세요.”

상대에게서 처음 듣는 목소리다. 낯선 목소리는 아니지만 곧장 생각나는 이도 없다. 그리고 그 순간 마주한 이가 사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웃고 있다는 것 말고는 여전히 얼굴 생김새가 의식되지 않는다.

“지금 가셔야 해요.”

“……어딜….”

“……지금 가서 불러 주세요.”

꿈속에서 제 목소리는 잠에서 막 깬 사람처럼 목이 잠겼다. 사내는 황제에게 대답하지 않고 지금 가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황제는 곧 사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손에 닿았다. 무심결에 닦아 주려던 손을 사내가 얼굴에서 떼어 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기다리고 있어요.”

“…….”

“가서 불러 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주세요.”

유약한 목소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뒷말을 마저 듣지 못했다. 다시 바람이 불며 흰 꽃잎이 휘몰아치고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너무 요란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고 온전히 듣지도 못한 말을 재차 물으려는 순간 너무 많은 꽃잎이 시야를 가렸다. 찡그린 눈을 감으며 얼굴 주위에 손을 젓다가 곧 바람이 멎은 듯해 다시 눈을 뜬 순간 주위는 암흑이다.

“……젠장.”

이름을 받은 뒤로 다짐했다. 반복되는 그 꿈에서 다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매번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면, 적어도 사내가 제게 먼저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그자가 사내라는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니. 아직 꿈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지만 바보 같은 짓이란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지난밤 이설을 품에 안고 잠들었던 비은궁의 침소가 맞다.

그리고 그 순간 황제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분명 옆에 두고 잔 이설이 자리에 없다. 간밤에 기름이 다 떨어졌는지 등불이 모두 꺼져 주위가 너무 어두웠다. 눈에 어둠에 적응하는 것을 기다릴 수는 없다. 깊은 밤, 잠을 자다 말고 어디로 사라진 건지 불길한 걱정이 알길 없이 밀려왔다.

요 며칠 마음을 너무 안일하게 먹었다. 주변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 것도 모두 제 탓이었다. 수족처럼 뒤를 따르는 금위군을 보면 이설이 지레 겁을 먹는다는 걸 깨닫고 흑영을 제외한 모든 호위병을 침소 멀리에 세워 놓았다. 게다가 오늘은 흑영조차 침소 밖에서 은복하라 일러두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서둘러 침상을 내려와 침소 밖으로 나가는 장지문을 향해 걸어갈 때였다. 얇은 침의로 찬바람이 끼쳐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황제가 장지문 앞에서 멈춰 섰다.

며칠째 열린 적 없던 후원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보통 날이면 그 문을 열어 두는 것만으로도 그림 같은 후원의 경치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날의 경치도 오늘만큼 황홀하지는 않았으리라.

먹구름 뒤로 모습을 내민 만월, 그 아래 물먹은 꽃과 나무, 그리고 환하게 빛나는 이설만큼 황홀한 광경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그림이었다.

그날 금잔화 밭에서 봤던 것을 잘못 보았다거나, 오해하였다거나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제가 본 것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뒤로 몇 번이나 어두운 곳에서 본 이설은 그때처럼 빛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크게 마음 쓰지는 않았다. 이설이 무슨 요사스러운 재주를 가지고 있든 이제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젯밤 만월이 뜬 밤에도 빛나지 않던 이설에게 실망스럽지 않았다. 이설은 그런 재주가 없어도 황제 스스로 인정했던 대로 어여뻤으니까.

앞으로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모습이 다시 그대로다. 은은한 달빛 아래에 아슴푸레 빛나는 이설이 서 있다.

“……연이설.”

떨어진 거리를 생각하면 이설에게 닿을 소리는 아니었다. 황제가 조용히 읊조리며 이설에게 향했다. 구태여 발소리를 죽인 것도 아닌데 이설은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는지 황제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설아.”

제법 가까워진 거리에도 이설은 여전히 황제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금잔화 밭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평소의 어두운 잿빛이 아니라 달빛의 빛나는 은사와 같았다. 문득 제 왼쪽 손목에 새겨진 이름이 이설의 머리카락으로 징금수를 놓은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설아.”

생에 이런 다정한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있나 싶을 만한 목소리였지만 아직도 이설은 멀리 정면만을 응시했다. 어딜 보고 있는 거지.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설아.”

떨어진 거리는 이제 한 보. 이마저도 듣지 못한다면 어깨를 잡아 돌려세울 생각이었다. 다행히 뻗은 손이 어깨에 닿기 전 이설이 몸을 돌렸다. 동시에 둘 사이를 가르는 바람이 이설의 머리카락을 한바탕 헤집어 놓고 사라졌다. 어깨를 돌려세우려던 손은 뺨에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 주고도 뺨 위에 잠시 남아 있었다. 검회색 눈동자가 빤히 저를 올려다보지만 평소처럼 겁먹은 기색은 없다.

“설아.”

폐하?

목이 온전했다면 으레 나왔을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물기 젖은 입술만 작게 움직였다. 동시에 커진 눈이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그제야 이설의 이름을 처음 불러봤다는 걸 깨달았다.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을 애써 숨기지 않으며 황제는 이설의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이설아, 하고 다시 부르는 소리에 이설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그리고 곧 예 폐하, 하고 소리 없이 움직이는 붉은 입술이, 휘어지는 두 눈이,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발그레 꽃물이 드는 양 볼이 어여쁘다.

약조는 이제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

황제는 붉은 연지 흔적이 남아 있는 입술 위로 급히 제 입술을 맞대었다.

다른 이의 몸이 닿아 본 적이 없는 젖은 입술은 아무런 저항 없이 무방비하게 벌어진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입술을 받아 내느라 목이 완전히 뒤로 넘어간 이설의 목을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한 팔은 이설의 허리에 둘렀다. 밀착된 몸은 한 치의 틈도 없이 황제가 힘을 줄 때마다 더 가까워진다. 급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설의 입술이 닿은 순간 침착함 같은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벌어진 입술에서 흐르는 침마저도 다디단 꿀처럼 아까워 모두 핥아 올렸다.

입안을 휘젓는 황제의 혀가 사라지고서야 겨우 더운 숨을 뱉은 이설은 곧장 목에 닿는 뜨거운 입술에 놀라 다시 어깨를 바짝 웅크렸다.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남기는 붉은 자국이 진해질 때마다 이설이 덜덜 떠는 손으로 황제의 침의를 꽉 붙들었다. 귓가에 닿는 더운 바람은 이설이 뱉는 열띤 신음의 대신일 거라 생각하니 등허리를 타고 내려간 흥분된 감각이 아랫도리를 묵직하게 했다.

툭 불거져 나온 쇄골 위에 얼굴을 묻고 입술 자국을 남기자 녹진하게 안긴 몸에 온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아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이설은 제 두 다리로 더는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알아차렸는지 황제에게 와락 안겨 들며 목을 끌어안았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이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맞닿은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한다. 침의 한쪽을 끌어 내리며 어깨 옆에 이를 세워 박자 목에 두른 팔 힘이 조금 세졌다. 웅크린 몸이 제 품에서 덜덜 떠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황제는 그쯤 이성의 끈이 툭 하니 풀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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