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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55)화 (55/300)

달의 황홀경

55화

*

이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주변이 고요한 밤이었다. 어쩌면 새벽이거나, 그 사이의 모호한 경계 일 수도 있다.

등불에 눈이 부실 거라는 생각과 달리 침소는 아무런 불빛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 자는 사이 등불의 기름이 다 떨어진 모양이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눈은 얼마 안 있어 근처의 사물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적응해 갔다. 이설이 처음 제 가까이에서 본 것은 황제였다.

잠들기 전 제 허리를 끌어당기던 단단한 팔은 어느새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왼손은 제 이름과 같은 징금수가 놓인 곳이다. 슬쩍 들어 본다면 잠에 빠진 황제는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시선과 주의는 온통 눈앞에 황제에게로만 향했다.

어두운 곳에서도 황제는 눈이 부시다. 이 아름다운 사람이 오늘 제게 어여쁘다 해 준 말이 아직까지도 귓가를 맴돌며 얼굴을 붉히게 한다. 남들이 제게 그런 소리를 하면 괜히 낯간지러워 머쓱하게 뺨만 긁고 마는 정도였는데, 황제 말의 여파는 그보다 훨씬 강했다.

지긋이 황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설이 제 허리 위의 황제의 팔을 조심스럽게 치워 냈다. 침상 위를 조용히 빠져나오며 황제 몸 위로 포단을 다시 잘 덮어 주고 발소리를 죽여 후원 문으로 나갔다. 비는 거의 그쳤고 바람 한 점 없다. 공기가 차긴 하지만 상쾌하기도 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뱉기를 두어 번 반복하니 이제야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온통 빗물에 젖은 후원에서는 풀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위로 쏟아지는 달빛은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기라도 하듯 밝고 따뜻하다. 달구경 하기 좋은 날이다.

바로 방금 전 꿈을 꾸었다. 이전에 황제와 처음 만났던 날에 꾼 꿈과 같은 꿈이었다. 오늘처럼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이설은 봉황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깃털 하나하나가 타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봉황이었다. 처음 본 날만큼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봉황은 아름다웠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경외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봉황이 건네주려는 깃털을 선뜻 받지 못했다.

처음 꾸었던 꿈 그대로, 봉황과 오랫동안 마주 보고 서 있었을 뿐 이설은 아무것도 얻지도, 주지도 못한 채 꿈에서 깨어났다.

금국에서는 봉황을 시조로 모시며 영물로 추앙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긴 했지만 제 꿈과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궁금한 것은 봉황이 왜 제게 불꽃이 타오르는 깃털을 주려고 한 것인지, 왜 자신은 그 봉황이 무척 아름답다 생각하면서도 선뜻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것인지 그것뿐이다. 그리고 왜 이 꿈만은 유독 잠에서 깨어나도 생생한 건지도.

하기야, 지금은 꿈 따위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황궁에서 버티는 나날이 늘어갈수록 걱정이 늘어난다. 황제가 제게 웃어 줄수록, 다정하게 말을 건넬수록 근심이 쌓인다. 상처받을 거라는 불안감, 가진 것보다 더한 걸 기대하다가 얻게 될 실망감은 황제와 함께 있으면서도 늘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다.

폐하께서 약조한 대로 언젠가 이 황궁을 나가는 날이 온다면 나는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까. 폐하께서 옆에 안 계셔도 나는 괜찮을까.

아직 오지 않은 먼 훗날의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는 것을 자책해 보기도 하지만 그때를 상상하면 초조함에 밤잠을 이룰 수조차 없다. 황제에게 대놓고 박대당하던 시절에 이 약조를 들었을 때는 내심 기대하는 마음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곱씹어 보니 그런 마음일랑 한 톨도 들지 않는다. 사람이란 게 자기 사정 맞춰 멋대로 생각하기 십상이라는 걸 알았지만 설마하니 자신이 이렇게 경솔하게 생각을 뒤집어 댈 줄은 몰랐다.

황제와 이렇게 가깝게 지낼 수만 있다면 조금만 더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고 싶다. 황제 곁에 조금만 더 머물 수 있다면.

아, 역시 이것은 연심인가. 단순히 호정이라 여기기에는 여타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렴풋 생각하고 있던 마음이라 크게 놀랍지도 않다. 예사스럽게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그 낮고 무던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살갑게 불러 주면 어떨까, 하는 사소한 바람을 혼자 꿈꿔 보았을 때부터.

“……이설아.”

바로 지금처럼 꿈결에나 들을 수 있는 저 다정한 목소리로 황제가 제 이름을 불러 준다면.

“…설아.”

그때는 정말 이 궁을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은데.

*

황제는 아침나절부터 종일 이유 없이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필시 어제 오후쯤 윤 내관이 은밀히 전달한 상소가 문제인 게 분명했다. 한시 빨리 확인해 봐야 할 상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서둘러 비은궁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쯤 이설은 화선지에 홍매화를 막 그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제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며 하얀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을 감당하지 못해 당황깨나 한 모양이었다. 그 구경이 재밌어 저녁 늦게까지 떠날 수가 없었다.

처참한 몰골의 홍매화는 우스갯소리로도 잘 그렸다 칭찬하기는 어려웠다. 글은 곧잘 쓰는 거 같더니,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나 보다. 이설의 앞에서는 대놓고 혀를 찼지만 비은궁 담장이 멀어졌을 때까지도 황제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해 윤 내관의 의아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상소문을 모두 읽었을 때는 밤이 늦어 비은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시각쯤이면 이설도 잠들었을 거라고, 사나흘 밤의 일로 알고 있었다. 어딘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황제는 오랜만에 제 침소에서 홀로 침수에 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뜬 아침이었다. 밤잠 한 번 안 설치고 깊이 잠들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몸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신경도 여간 날카로워진 게 아니라, 기침하셨냐며 들어온 윤 내관에게 여태 깨우지 않고 뭘 했느냐며 괜한 짜증을 냈다.

그래서 어젯밤 잠들기 전 읽던 상소문이 문제라고 여겼다. 북방 이민족의 침략이 잦아지며 생기는 문제들이 하나둘 황궁에까지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차란에게 맡겨 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골치 아픈 일이 제 손에 또 늘었다. 가뜩이나 우장절이 끝나면 밀려 있던 정사들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해 바쁠 터였다. 한동안은 비은궁에 걸음 할 여유도 없을 것이다.

태금궁에 들린 김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상소들을 몇 가지 처리하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더 늦었다가는 석반도 함께 들지 못할 것 같아 황제는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궁을 나섰다. 윤 내관은 황제가 먼저 봐 줄 상소문 두어 개를 품에 들고 있었지만 흉흉한 기세로 급히 궁을 나서는 황제를 감히 불러 세울 수가 없었다.

온갖 불편한 기분을 안고 비은궁에 들어선 황제는 익숙한 풀냄새를 맡고서야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래 봤자 남들 눈에는 냉한 표정뿐이겠지만 침소를 향해 복도를 걷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저를 보고 종종걸음으로 나와 맞이하는 이설은 여전히 보얗고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순진한 눈을 하고 제 앞에 서서 숙이는 머리에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은 나비 모양의 금비녀였다. 의미를 알고 꽂은 게 아닌 줄은 알았지만 같잖은 농에 크게 동요하는 눈빛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제 손바닥에 글을 쓰며 살갗이 닿을 때마다 얼굴 붉히는 모습을 보면 다른 후궁들과 뭐가 다를까 싶다가도, 침상에서 손끝 하나 닿을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 말만 하지 않을 뿐이지 저에게는 죽어도 안기고 싶지 않다고 온몸으로 소란을 떠는 것 같다.

그래서 여태 안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다. 사내를 안아 본 적이 없어 마음이 동하지 않다 하기에 이설은 보통 사내 같지가 않았다. 활쏘기 실력이 형편없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손마저도 금국의 여인들보다 곱고 보드라웠다. 자잘하게 생긴 상처들은 모두 금국에 온 뒤로 얻은 것이리라.

보통 사내와 다른 것이 어디 손뿐이랴.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도, 사뿐히 걸어 다니는 낭창낭창한 몸짓도, 아래로 내리뜬 눈에 슬쩍 짓는 미소며, 이따금 발그레해지는 두 볼까지. 여인의 태가 나는 것도 아니면서 완연한 사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건 살며 본 이들 중에 이설이 처음이었다. 차라리 다 자라지 못한 아이라고 했으면 이해라도 했을 텐데 황제가 기억하기로는 저보다 고작 한 살 어린 성년이다.

이설이 원치 않아도 안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안았을 것이다. 안고 싶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당한 술기운이 올라 느릿하게 깜빡이는 순진한 눈망울이 저를 쳐다볼 때면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황제는 이설이 잠들 때까지 조용히 잿빛 머리카락만 내내 쓸어내렸다.

‘역시 이편이 더 어여쁘지.’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정신도 온전했고 등불이 평소보다 덜 밝았을 뿐이지 시야도 또렷했다. 어제 홍매화를 그리는 이설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이설이 제법 어여쁜 것 같다고. 한 며칠 잘 먹었다고 벌써 살이 오르지는 않았을 테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리숭한 생각이었다. 말해 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이설에게 그런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다.

머리를 내려 주는 동안 이설이 입궁 한 날의 초야가 떠올랐다. 그날, 늦은 저녁 제게 조심스레 비은궁의 루 소의 마마께서 기다리고 있다 전하는 윤 내관의 말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이 내려 준 머리를 하고 얌전히 앉아 있는 이설은 정말로 어여뻤다.

이설을 품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살며 단 한 번도 후궁을 안고 싶다 생각한 적 없었고 여인이든 사내든 누군가에게 색욕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경사방 늙은이들의 성화만 아니었다면 후궁전을 찾는 일도 평생 없었을 것이다.

‘취한 건 네 쪽인 것 같구나. 이리 오거라.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어서 잠들어야겠다.’

그래도 이설을 안을 생각은 여전히 없었다. 손만 대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 샌님에게 안지 않겠다 약조했으니 지켜야 했다. 그래서 이설의 핑계를 대며 급히 잠자리에 들었다. 이설이 심히 취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설은 황제가 권하는 잔은 언제나 군말 없이 마셨고, 그 바람에 혼자 꾸벅꾸벅 졸거나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기는 했어도 주벽을 보이거나 추태를 부리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품에 안은 이설에게서는 달큰한 꽃향이 났다. 나긋하게 안겨 오는 몸은 긴장으로 잔뜩 굳었지만 곧 힘이 빠졌다. 금세 잠이라도 들은 모양인지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고르다. 품에 더 가까이 안으려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려다가 괜히 잠을 깨울까 싶어 관뒀다. 더 가까이 붙었다간 참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그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손에 살짝 깍지를 끼는 것에 만족했다.

잠결에 이설이 몸을 뒤척이며 황제의 품을 파고들었다. 황제는 눈 감은 채로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이설의 마른 등을 토닥토닥 쓸어내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어젯밤 윤 내관이 급히 전달해 온 상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침나절 내내 기분이 불쾌했던 것은 이설 때문이었다.

지난밤 이설이 제 곁에 없었던 것.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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