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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53)화 (53/300)

달의 황홀경

53화

*

“마마, 제발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이 비녀 하나만 더 꽂으셔요.”

“비녀 하나에 연지면 됩니다. 다른 건 정말 바라지도 않습니다!”

침상에 걸터앉은 이설은 오후 내내 고개만 젓는 중이다. 목이 좌우 어느 쪽으로든 뚝 분질러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것도 잠깐. 차라리 그러기를 바란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이설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녀들은 이설 발밑에 앉아 우는 얼굴로 한참 애걸복걸이다.

“폐하께서 곧 돌아오십니다. 그 전에 이 비녀 하나만. 딱 이것 하나만도 아니 되십니까, 마마?”

이설은 다시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에 꽂힌 비녀를 손으로 툭툭 건드린 뒤 연화 앞으로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내밀었다. 짐짓 과단한 얼굴이 말하기를 지금 꽂은 비녀 세 개면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함부로 이설의 몸에 손을 대고 억지로 비녀를 꽂을 수 없는 궁녀들만 완강한 태도에 속이 타들어 갔다. 주 상궁이 자리는 비웠기 때문에 말로 이설을 설득할 사람이 없어 곤란하다.

황제는 비은궁에서 세 번의 밤을 보낸 뒤 어제 이른 저녁 태금궁으로 돌아갔다. 급한 상소가 올라왔다는 윤 내관의 말에도 꿈쩍도 않고 자리에 버티다 이설과 석반을 들고 나서야 떠난 것이다. 궁 앞까지 배웅을 나가려는 이설을 물리고 황제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침소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아마 이전 날의 아침처럼 처마 아래에서 기다리지 말라는 말일 거라 생각하며 이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함께 보낸 사흘은 즐거웠다. 특별히 대화가 오고간 것도 아니고 황제가 묻는 말에 길지 않게 대답하는 것뿐이었지만 이설은 황제가 아무 이유 없이 제게 말을 걸어 주는 게 좋았다. 똑같은 서책을 도대체 몇 번이나 읽는 것이냐는 질책 따위라도.

함께 잤던 첫날밤을 제외하고는 기억에 남을 만한 일도 없었다. 황제는 약속대로 이설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황제의 손이 닿는 것은 길게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전부였다. 황제는 이설이 옆에 누우면 한참 동안 그 머리카락을 만져 보곤 했다. 이설은 아직도 어깨를 넘어선 긴 머리가 불편했지만 황제가 제 몸에 유일하게 다정한 손길을 주는 것이기에 참아 보려 애썼다.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고작 단잠 세 개라니, 마마도 참 너무하십니다.”

“폐하께서 속으로 저희를 얼마나 무능하고 게으르다 혀를 차시겠어요!”

속으로만 혀를 차시는 분은 아닐 텐데…….

모두들 답답한 속을 토로하는 와중에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다른 후궁전의 마마들은 폐하를 모실 때 치장에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아십니까?”

“그만큼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이 꽃비녀 하나만, 딱 하나만 더 꽂으시면 됩니다. 마마, 제발요.”

무엇을 권하든 초지일관으로 고개를 젓던 이설이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찡그렸다 풀었다. 탄영당에서 봤던 황제의 아름다운 후궁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분칠한 고운 얼굴과 그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할 온갖 화려한 장신구들. 그네들 꾸민 치장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할 게 분명한 제 모습이 면경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황제가 익숙해할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쪽은 아닌 것 같다. 황제를 모시는 후궁이 몸치장을 게을리하는 것은 성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이설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패물함에 비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연화에게 내밀자 표정이 더없이 밝아진다.

“꽃비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군요! 마마라면 이 나비 비녀도 무척 잘 어울리실 겁니다.”

눈에 띈 금비녀 중 가장 작은 걸 고른다는 게 나비였던 건가. 이러나저러나 연화가 내밀던 술이 달린 꽃비녀보다는 눈에 덜 띨 테니 불만은 없다. 그리고 탄영당에서 만난 후궁들이 저마다 이런 나비 모양의 비슷비슷한 금비녀를 꽂고 있는 걸 보았다. 금국의 여인들이 애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비녀인 것 같다.

아이들이 저들끼리 주고받는 시선에 참지 못하는 웃음이 오가는 걸 보니 뭐가 그리 신나는가 싶다가도, 모시는 상전이 황제의 눈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오죽할까 싶어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 바라는 황제의 관심은 제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일 테니.

목에 닿는 한 올도 없이 틀어 올린 머리에 마지막 비녀가 쑥 꽂힌다. 무게감은 좀 있지만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이 없으니 기분이 한결 산뜻해졌다. 긴 머리카락이 마냥 거추장스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단정한 머리를 만들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가락지며 팔찌며, 침소에서 신고 있는 신까지 바꿔 가며 호들갑을 떨던 아이들이 한참 뒤에야 침소를 나갔다. 아이들은 이설이 황제와 단둘이 있는 동안의 일이 몹시 궁금한 눈치였지만 직접 묻지는 않았다. 아마 주 상궁의 불호령이 있었을 테지. 황제가 비은궁에서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도 아이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가고 나서야 면경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말끔히 머리를 넘겨 훤히 드러난 얼굴은 사내의 것인데 틀어 올린 머리 장식은 여인이 하는 양 화려하다. 금국에서는 사내도 이런 치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익히 들었으나 역시 아직은 어색하다. 입술 위에 붉게 칠한 연지는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이런다고 해서 황제의 눈에 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면경에 비친 제 얼굴의 눈, 코, 입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보다 문밖 기별에 놀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보내 먼저 기별을 주고 오실 분은 아니니 갑자기 찾아오실 줄은 알았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다.

양쪽으로 장지문이 넓게 열리고 황제가 들어온다. 겨우 반나절쯤 못 봤을 뿐인데 한참 만에야 보는 사람처럼 반가움이 앞서고 몸은 긴장된다. 손을 꼭 쥐었다가 아직 면경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야?”

“…….”

“다른 후궁들처럼 내 앞에 나와 머리를 숙이거나 부복하여 나를 맞아 볼 생각은 해 본 적 없느냐?”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설이 한달음에 황제 앞으로 잰걸음 했다.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허리를 숙이니 끝자락이 젖은 장포가 눈에 들어온다. 비에 젖으셔서 기분이 안 좋으신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목덜미로 서늘한 손이 감겨 오기에 놀라 허리를 세웠다.

“머리를 올렸군.”

목을 훑고 올라간 손이 턱을 감싸 쥐었다.

“연지도 발랐고.”

“…….”

“금나비 비녀까지.”

“…….”

“오늘 밤 내게 안기겠다는 의지인가?”

*

연지 바른 입술 새로 가벼운 바람이 새어 나갔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고개를 젓고 싶은데 황제 손에 단단히 고정된 턱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하릴없이 눈만 깜빡였다. 꺾인 고개가 한없이 높은 곳을 보고 있으니 황제가 저보다 몇 촌(寸)은 더 크다는 게 실감된다.

“……아니면 아닌 게지 또 그런 표정을 짓기는.”

탁. 황제의 손이 맥없이 떨어지자 이설의 고개도 아래로 뚝 떨어졌다. 또 겁먹은 표정을 지었던 건가. 황제가 저를 지나쳐 가는 것을 보고 몰래 손에 든 면경에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볼품없기에 부질없이 아랫입술만 잘근 씹었다.

황제를 뒤따라 맞은편에 앉으면서도 내심 우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면경에 얼굴은 괜히 비추어 봤나 보다. 것보다 비녀며 연지며, 분칠까지. 치장은 뭐 하러 했나 싶다.

“무거울 텐데.”

황제는 자리에 앉자마자 팔걸이에 몸을 기울이고 편히 앉은 자세였다. 삐뚜름하게 꺾인 고개를 손으로 가볍게 받치니 그 아래로 새카만 머리카락이 쏟아진다.

“금비녀는 크기는 작아도 꽤 무게가 나가거든.”

“…….”

“오늘도 서책을 보며 졸았다간 정말 네 모가지가 똑 분질러질 수도 있겠어.”

이설을 넌지시 바라보는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진다. 황제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서는 걸 보며 이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옮겼다. 여전히 가볍게 진 미소로, 황제는 이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헌데 면경은 뭣 하러 붙들고 있는 것이냐? 손 볼 곳이 아직 더 남았느냐?”

“…….”

“객청이라도 가 있다 일다경쯤 뒤에 다시 찾아와 주랴?”

미소 띤 얼굴 때문인지 평소보다 말투가 가볍고 소탈하다. 돌이켜 보면 어제와 그저께도 황제는 지금과 비슷했던 것 같다. 함께 있느라 매번 신경이 곤두서 있어 잘 느끼지 못했는데 황제는 이제 이설과 있어도 가끔씩 웃음을 짓고, 농을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 스스럼이 없다.

“대답해 보거라.”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의자를 옮겨 이설 가까이 앉았다. 아까는 맡지 못했던 바깥바람 냄새와 비 냄새가 들숨에 훅 밀려들어 온다.

“면경은 왜 들고 서 있는지, 입술에 연지는 왜 이렇게 진하게 바른 것인지, 그리고 이 비녀는…,”

황제가 이설이 꽂은 비녀 하나를 쑥 잡아 뺐다. 단잠 세 개가 아직 꽂혀 있어 머리가 풀어지지는 않았다.

“이 금나비 비녀는 누가 꽂아 준 것인지.”

황제가 뽑은 것은 이설이 골랐던 나비가 달린 금비녀였다. 황제 말대로 금비녀 무게가 제법 나갔는지 머리 위 무게감이 한결 가셨다.

비녀가 잘못된 걸까 생각하는 중에 제 앞으로 황제가 손을 쓱 내밀었다. 정확히는 펼친 손바닥이.

“대답은 여기에.”

그제 오후였나. 창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창 아래 모아 둔 종이가 흠뻑 젖은 일이 있었다. 화홍이 종이를 구하러 간 사이 황제에게 빨리 대답해 주고 싶은 나머지 제 팔 안쪽에 목탄필로 글을 쓴 것이 화근이었다. 황제는 당연히 황당해했고, 이설은 그 앞에 서서 어색하게 눈치만 봤다.

무슨 경망스러운 행동을 한 것이냐 경을 칠 줄 알았던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궁녀를 들여 젖은 수파를 들여오라 명했다. 미지근하게 젖은 수파로 이설의 팔을 말없이 닦고는 제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설에게 황제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방금 뭘 잘못하였는지 여기에 적어 보아라.’

황제의 옥수에 목탄필로 검은 칠을 하라니 아무리 황명이라지만 그럴 수 있을까. 그제야 행동의 경솔함을 깨달은 이설이 제 처지를 돌이켜 봤다. 황제의 후궁은 머리카락조차도 허락 없이 함부로 잘라서는 안 되는 법이거늘, 그 몸에 목탄필로 글을 적어 놓았으니 뭣 모르고 한 행동이라기에도 너무 채신없었다.

‘어서.’

채근하는 황제였지만 명한 대로 목탄필로 옥수를 더럽힐 수는 없었다. 난처함에 고민하던 이설은 결국 목탄필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하얗고 마른 손가락 하나가 조심스럽게 황제의 손바닥 위를 움직였다. 황제의 옥수는 며칠 전 봤던 흑영이라는 호위 무사의 손만큼이나 굳은살과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송구한 마음과 경솔했던 행동을 뉘우치는 글을 적었다. 혹 이것 역시 경망한 짓이었을까 걱정이 들었던 것은, 글을 다 적은 후에도 황제가 말없이 저를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황제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이설은 그렇게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 순간에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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