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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52)화 (52/300)

달의 황홀경

52화

어두운 방을 밝힌 등불 그림자가 벽에서 너울거린다. 그림자를 따라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이던 이설이 몸을 뒤로 벌렁 눕혔다가 잘 정리된 포단이 흐트러진 걸 알고 얼른 일어나 다시 넓게 펼쳤다. 이설의 손으로는 아무리 두드려도 단향이 했던 것처럼 솜이 봉긋 솟아오르지가 않는다.

‘밤이 깊어 오늘은 비은궁에서 자고 가겠다.’

꾸벅꾸벅 잠이 쏟아지던 정신이 찬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놀라 깨어났다. 눈을 번쩍 뜨는 이설을 두고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간으로 향했다. 황제가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태금궁 궁인들은 눈치 좋게 황제가 침수에 들 수 있는 준비를 이곳에 마쳤다. 아니, 눈치가 좋은 건 태금궁 궁인이 아니라 차란일지도 모른다. 황제가 나간 뒤 장지문 밖에서 윤 내관과 나누는 대화에서 ‘비 승상께서 떠나시기 전 언질 주셨습니다’ 하는 말을 들었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궁녀들이 들어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은 부리나케 술상을 치우고 이설을 침의로 환복 시키고 머리카락 끝에 향유를 찍어 바르고 침상에 새 포단을 깔았다. 황제가 밤을 보낸다는 생각에 정신이 멍해질 새도 없었다. 동분서주하는 화홍에게 기연이는 어디 있냐 물었을 때는 난데없이 따끔한 질책도 들었다.

‘초야 전 침전에 외간 남자라뇨, 마마! 기연 님은 찾지도 마십시오!’

아까 언월도에 대해 황제에게 대답하지 못했던 것을 묻고 싶었을 뿐인데…….

일전에 상전을 모시는 것에 대해 황제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아이들은 단단히 벼르던 일이기라도 한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누가 보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던 것처럼 누구 하나 당황하는 사람이 없다. 다들 바쁜 와중에 멍하니 앉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려 애쓰는 건 이설 혼자다.

모두가 부산스러운 가운데 태금궁 궁녀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께서 곧 오십니다. 그 말에 아이들이 우르르 침소를 나갔다. 제일 마지막에 나간 주 상궁은 근심 어린 얼굴로 ‘연국에서 배웠던 것을 모두 기억하시지요, 마마?’ 하고 물은 뒤 이설이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렇게만 하시면 된다 하며 떠났다.

구겨진 포단을 정리하느라 애쓰던 이설의 귀로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별다른 기별도 없이 장지문이 벌컥 열리고 황제가 성큼성큼 들어온다. 평소 입던 의복보다도 대충 걸쳐 입은 침의가 아무렇게나 벌어져 있었다.

“꾸벅꾸벅 잘도 졸더니, 먼저 자지 않고 뭐 하고 있느냐?”

침상 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이설을 보며 황제가 대뜸 물었다. 무안을 주려 하는 말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것은, 서너 발자국 멀리 어두운 등불이 닿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황제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무뚝뚝하고 별 기분은 느껴지지 않는다.

침상에서 일어나 한쪽에 서자 황제가 천천히 걸어왔다. 너울거리는 등불 그림자가 비친 황제의 옥안은 어두운 곳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네 궁인들이 쓸데없는 수선을 떨었군.”

연지 바른 이설의 입술을 바라보며 황제가 혼잣말했다. 이쯤 거리라면 머리카락 끝에 향유를 바른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

“너도 네 궁인들처럼 내게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이냐?”

넌지시 묻는 황제에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슨 의중으로 묻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설은 지금 이 순간 황제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내일 아침 해가 밝았을 때 모든 것이 오늘과 같이 무사태평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설이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보며 황제가 쓰게 일소했다.

“나와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너무 강경한데.”

후궁 된 도리로 감히 황제와의 잠자리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비록 후계자를 볼 수 없는 사내의 몸일지라도 황제와의 동침에 고개 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황제의 지적에 크게 놀라며 이설이 다시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흔들리는 등불 그림자 아래에 황제는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느슨하게 풀어 헤친 침의 너머로 물기 젖은 맨가슴이 드러나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럼.”

“…….”

“오늘 밤 나와 초야를 치르겠다는 말이냐?”

다시 고개를 저으려니 황제와의 잠자리를 거절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니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같은 사내에게 안기는 것도, 그 사내가 황제인 것도, 모두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여기며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부딪힌 현실은 다르다. 맨가슴을 들여다보는 것도 어려워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감추는 주제에 황제에게 안길 수 있다 생각을 했다니 경솔했다. 이미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지는 두려움이 발끝에서 머리끝을 타고 올라온다.

“……울겠군, 울겠어.”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이설을 스쳐 지나가며 황제가 중얼거렸다. 멍하니 서 있다가 뒤돌아보니 황제는 침상에 앉아 있었다. 한쪽 포단을 휙 들추며 황제가 눈짓했다.

“거기 서서 밤을 새울 생각인가?”

“…….”

“이리 올라오거라.”

“…….”

“……안지 않을 테니 이리 올라와.”

황제가 세 번이나 말한 뒤에야 이설은 쭈뼛거리며 침상으로 올라갔다. 펄럭이는 포단이 황제에게 누가 되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몸을 뉘었다. 이설이 눕자 황제가 제 쪽에 있던 등불을 꺼 버려서 침소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침상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댄 황제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걸 알아챘지만 못 본 척 눈을 꼭 감았다. 빨리 잠이 들고 깨어나면 아침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이미 달아난 잠이 쉽게 찾아올 리가 없다. 고요한 주위 덕분에 소리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다. 황제가 속삭이는 듯 중얼거리는 말이 선연히 들린다.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게 아니란 말이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만지는 게 느껴진다. 감은 눈에 힘을 주고 꼼짝도 못 하기를 잠깐. 곧 황제가 손을 거두고 몸을 뉘는 기척이 느껴졌다. 침상이 넓으니 구태여 제 옆에 붙어 눕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히 몸을 움직여 모로 눕고 몸을 웅크렸다. 혹여 숨소리가 황제의 침수에 방해가 될까 조심스럽다.

그 상태로 수를 이백여든쯤까지 세었던 것 같다. 부스럭하는 포단 구겨지는 소리도 이제 들리지 않는다. 이쯤 황제가 침수에 들었을 거라 확신한 이설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진다.

“잠이 오지 않아?”

저와 멀리 떨어져 누워 잠들었을 거라 생각했던 황제는 멀리 있지도, 아직 침수에 들지도 않았다. 손 뻗으면 바로 닿을 옆에서 손에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누워 이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라 여길 만큼 하마터면 볼썽사납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잠들면 내가 억지로 안기라도 할까 봐?”

어줍게 고개를 젓는 것과 동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이 누워 있는 황제가 신경 쓰여 몸을 꾸물꾸물 뒤로 움직였다. 침상 가장자리에 다다랐음이 얼핏 느껴진다.

“더 가면 떨어질 텐데.”

“…….”

“오늘 밤 침전 바닥에서 잠들 생각이라면 계속 그렇게 물러나 보거라.”

어렴풋 웃음이 섞인 목소리인 것 같긴 한데 주변이 어두워 황제가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황제가 말한 대로 침전 바닥에서 잠들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몸을 다시 안쪽으로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옮겼다. 물색없이 하는 행동이 창피하기도 하고 유심히 쳐다보고만 있는 황제의 의중도 모르겠고, 이 와중에 정신만 또랑또랑하고 잠은 오지 않아 속이 타들어 간다.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들켰는데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아 뜬 눈은 그대로 두고 시선만 내리깔았다. 이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쓸어내리는 손의 소매가 위로 걷어 올려져 손목이 훤히 드러났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이름이 보일 것 같아 마음 졸였다. 가리고 다닐 때는 무척 서운하던 것이 막상 거리낌 없이 드러나니 매번 시설 둘 곳 찾기만 어려워졌다.

“정말 내가 안을까 봐 걱정스러워 잠들지 못하는 게냐?”

이설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아주 잠깐이었다.

“그럼 왜 아직 잠들지 못한 것이냐.”

“…….”

“오늘은 오수(午睡: 낮잠)에 들지도 않았는데 피곤하지 않아?”

황제와 한곳에 있으면서 오수에 들었던 적은 없다. 일전에 서책을 보며 꾸벅꾸벅 졸았던 일을 말하는 것일 거다. 그만 좀 잊어 주시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며 속으로 하는 원망이 황제에게도 들렸나 보다.

“내가 농을 던진 게 언짢기라도 한 얼굴이구나.”

아무렴 황제에게 언짢을 리가 있나. 밖으로 꺼내면 먼지 한 톨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작은 원망이다. 원망이라는 말도 과하다. 혼자 부리는 투정에 더 가까웠다.

누군가와 가까이 앉는 것과 서는 것 그리고 나란히 눕는 것은 천지 차이다. 오늘 이설은 황제와 이 세 가지를 모두 해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가슴이 떨렸던 적은 없었다. 손끝 하나 닿은 것도 없는데 온몸은 왜 이리 긴장되고 열이 오르는 건지.

오늘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혼자 지내던 하루도 이렇게 길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이것들을 아무 생각 없이 당연스레 받아들이기에 이설은 생각이 너무 많았고, 황제는 어려운 사람이다. 정신없던 오늘 하루의 끝이 황제와의 동침이라니, 지금 무슨 정신으로 여기 누워 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뜬 눈으로 잠든 것처럼 혼자 생각에 잠겼던 이설이 황제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별 것 아니었다는 의미로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을 못 한다는 핑계로 매번 어물쩍 넘어가는구나.”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황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대답하기 난처한 것을 물을 때마다 이설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고개를 젓곤 했는데, 그럴 때면 다들 내심 답답해하면서도 더는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말을 하지 못하는 지금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꽤 괜찮은 비기일지도 모르겠다.

“괘씸해도 별수 없군.”

다른 이들과 달리 황제는 답답하고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크게 힐난하지도 않는다.

황제도 이제 침수에 들 생각인지 손에 괴었던 머리를 내렸다. 포단을 덮고 이설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에 저를 보시는가 싶어 긴장했지만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이설 너머 등불쯤인 듯하다. 불이 밝아 신경 쓰이시는가 싶어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았다.

“어두운 게 무서워 그러는 것이냐?”

역시 불이 밝은 게 거슬렸던 것 같다. 입궁 후 며칠 밤은 새 궁이 익숙하지가 않아 불 밝은 때가 아니고서는 잠들기가 어려웠던 적이 있었다. 이제 그럴 일은 없지만 굳이 궁녀들이 놓아둔 등불을 치우라 말한 적은 없었다. 밝으나 어두우나 잠들기에 상관은 없다. 황제가 원치 않는다면 불을 꺼도 괜찮다.

이설은 대답 대신 등불을 끄기 위해 몸을 돌렸다. 손을 짚어 상체를 일으키려는 찰나, 황제가 이설의 몸을 껴안아 당기며 침상에 도로 눕혔다.

“됐다, 그냥 두어라.”

“…….”

“잠들면 그만인 것을.”

경직된 몸 위로 포단이 덮였다. 얇은 침의 위로 닿았던 황제의 단단한 팔의 감촉이 아직 생생하다.

“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 약조할 테니 어서 자거라.”

말과는 달리 이마를 덮은 이설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긴 뒤 황제는 눈을 감았다. 황제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옥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려 손을 뻗을까 했지만 결국 닿지는 못했다. 머뭇거리던 손은 포단을 당겨 황제 어깨에 놓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아름다운 황제와 처음 지새우는 밤은 빗소리만 촉촉하게 젖어 든다. 주 상궁이 근심하는 일도, 아이들이 벼르던 일도, 그리고 이설을 긴장하게 만들던 일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함께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언젠가 황궁을 나가고 금국을 떠나는 날이 온다 해도 가져갈 기억이 이렇게 하나씩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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