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51화
“…….”
“계속 먹지 않고 뭘 하느냐.”
황제가 손으로 막아선 걸 계속 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제 앞으로 돌아온 복숭아를 보고 잠깐 망설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거절하지는 못했다. 한 조각, 두 조각, 먹는 사이 슬쩍 눈을 돌리면 황제가 턱을 괴고 나른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먹는 모습을 타인에게 관찰당하듯 보여지는 것은 생각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다. 상대가 황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맛이 좋은 복숭아라 해도 이미 배가 부른 뒤에 먹을 수 있는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복숭아 조각이 소복이 남았지만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황제도 귀한 것을 남겼다며 쓴소리를 더하지는 않았다. 턱을 괸 손을 풀고 허리를 세우자 이설은 또 바짝 긴장했지만 이 또한 황제가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걸 금세 깨닫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남은 건 토끼나 주거라.”
조금 전 활 쏘는 연습을 할 때 피운 소란에 깬 토끼는 화홍을 불러다 침소 밖으로 내보냈다. 황제의 말대로 토끼를 주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비가 그치면 곳곳에서 진상품이 올라올 것이다. 이맘때쯤 올라오는 과일들은 제법 맛이 좋지.”
“…….”
“올해는 우장절이 빨라 수확을 제때 했을지 모르겠지만, 먹고 싶은 과일이 있다면 태금궁에 전하거라.”
“…….”
“보내 줄 테니.”
금국은 다양한 과일을 특산으로 하는 곳이 많고 그 맛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나라 곳곳에 햇빛이 잘 들고 강수도 적절하니 과일뿐만 아니라 땅에서 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 자란다 들었다. 그중에서도 황제에게 진상될 것을 고르고 고른 것이니 뭐든 맛이 좋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 좋은 것을 보내 준다는 걸 내심 기뻐만 하기는 힘들다. 황제는 어려운 사람이고, 단순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하기에는 둘 사이에 거리가 멀었다. 물론 처음 만났을 즈음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역시 황제는 황제다.
황제의 호의는 뒷일을 걱정하게 만든다.
“연국에서는 포도가 귀하다 들었는데.”
연국은 포도나무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대부분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들여오고 있고 그나마도 왕실에 큰 연회가 있을 때나 맛볼 수 있는 과일이다. 연국의 폐쇄 정책은 타 국과의 무역 품목에도 제한을 두어 생필품이 아니고서는 쉽게 구하기가 어렵다. 이는 왕실 또한 예외가 없다.
“포도 철은 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보통은 모두 소봉궁으로 보내는 것인데, 올해는 태자가 나눠 먹는 덕을 배울 수 있겠구나.”
좋아하기는 하지만 태자의 몫으로 들어가는 것을 탐낼 생각은 없다.
[괜찮습니다. 태자 전하께 모두 드리겠습니다.]
“태자라면 제 몫으로 받은 것도 모두 네게 주고 싶어 할 거다.”
“…….”
“하향주도 네게 주지 않았느냐.”
황제가 멀리 놓아둔 술병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태자의 외가에서 만든 술이다. 나와 소운을 제하고는 아무도 준 적이 없는 것인데 네게는 선뜻 내어주는구나.”
“…….”
“그깟 포도라고 못 내어줄 것도 없겠지.”
내키지 않는 말을 뱉는 것처럼 황제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매번 아니꼬운 듯 태자를 말해도 사실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찧은 약초를 바른 손바닥 위에 입바람을 불어 준 것도 태자에게 으레 해 주던 것일 거다. 아마 태자의 까진 살갗에 직접 처치를 해 준 것도 황제일 거라고, 능숙하게 천을 감던 모습을 떠올리며 짐작했다.
포도 생각에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간다. 배가 이렇게 부른데 또 입맛이 도는 게 신기하다.
밖에 있던 연화를 불러다 남은 복숭아를 주고 나눠 먹으라 하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토끼의 몫으로는 두어 조각이면 충분하다.
전처럼 침소를 둘러보던 황제는 어젯밤 기연이 두고 간 언월도에 관심을 보였다. 자루가 짧고 칼의 몸체가 넓지 않은 형태가 일반적인 언월도와 달라 흥미를 끈 모양이다. 가볍게 검을 휘둘러 보고는 이설에게 검에 대해 몇 가지 물었으나 정작 이설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의 언월도와 모습이 다르다는 것도 어제 기연이 검을 닦으며 말해 준 것을 여태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황제는 침소 구석에서 찾은 그 검이 마음에 든 것인지 한참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설은 기연이 검에 대해 들려주곤 했던 이야기를 모두 성의 없이 듣고 잊어버린 사실을 후회 중이었다. 좀 더 귀담아들어 뒀다가 황제에게 알려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검술은 배워 본 적 없겠지?”
언월도를 가볍게 휘두르며 황제가 물었다. 사내이며, 왕족으로 태어났으니 검술이야 기본 소양으로 익히기는 했지만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실력이다. 황제의 짐작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가는 또 아까와 같은 사달이 날 테니 대답을 신중히 해야 한다.
이설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수긍했다.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어둑해질 때쯤이 되면 태금궁으로 돌아가던 황제는 아직 이설과 함께이다. 창밖을 보며 날이 어두워진 것을 분명 확인하였는데도 떠날 채비는 하지 않고 바람이 차다며 창만 닫았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하향주를 가져와 탁자 위에 놓는다.
“한잔하겠느냐?”
당황하여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절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설도 사실 황제가 궁으로 돌아가면 잠들기 전 한 잔 맛을 볼까 기대하던 것이었다.
밖에 궁녀를 시켜 따뜻하게 데워 온 술과 안주 몇 가지로 좌상에 술상이 간소하게 차려졌다. 날이 좋았다면 술상 옆에 창을 열어 아름답게 가꾼 후원의 경치를 구경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
황제는 제 잔에 술을 따르려던 주상궁을 물렸다. 밖으로 나가기 전 주 상궁이 황제 몰래 이설에게 눈짓을 한다. 알아차리기 어렵지는 않다. 주 상궁이 밖으로 물러나자 이설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깨가 닿지 않게, 하지만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한 곳에 무릎을 꿇고 앉는 모습을 황제의 시선이 좇는다. 그 뒤 이설이 술병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황제가 이설의 손을 붙잡는 게 더 빨랐다.
“네게 술 시중을 들라 한 적은 없는데.”
황제가 밀어낸 손이 허공을 어색하게 맴돌다 무릎 위로 내려왔다. 시중드는 궁인이 옆에 없으니 후궁인 이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 괜히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자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이설을 옆에 두고 황제는 스스로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노랗고 맑은 액체가 잔에 채워지며 향긋한 꽃향이 금세 퍼졌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이설에게 황제가 잔을 내밀었다.
“기미 해 보거라.”
웃음 띤 목소리에 괜스레 안도하며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두 손 가득 따뜻함을 느끼며 잔을 입에 가져다 대니 향이 더욱 진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 사이로 더운술이 흘러온다. 꼴깍꼴깍 넘어가는 술이 달아 멈추지도 않고 느릿느릿 한 잔을 다 비웠다. 잔을 내려놓자 황당함에 그지없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하―. 기가 차 실소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기미 하라 하였지, 술에 취하라 하였느냐?”
“…….”
“한 잔 가득 따라 놓은 것인데, 보아라.”
황제가 이설의 손에서 채간 술잔을 뒤집어 아래로 탈탈 털었다. 잔에 남은 한두 방울만이 황제 의복 위로 또르르 떨어졌다.
“깨끗이도 비웠구나.”
말미에 혀를 차는 황제는 정말로 기가 막힌 모양이다. 기어코 터지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설은 이설대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입궁 전 주 상궁이 침이 닳도록 신신당부했던 것이 하필 이제야 생각이 났다.
황제 폐하와 함께 술을 마실 때는 절대로 잔을 완전히 비우지 마시고 항상 한두 모금 정도는 남겨 두셔야 합니다, 이설 님. 꼭 명심하십시오.
귓불에 불에 닿은 듯 뜨거워지는 게 차라리 술기운이라면 좋겠다.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주도까지 따르지 못한 저를 황제가 트집 잡아도 할 말은 없겠다. 무거운 고개만 아래로 푹 숙였다.
“아무리 약해도 술은 술인 것을.”
혼잣말과 함께 이마 위로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삐뚜름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황제의 손이다.
“그 한 잔을 다 마셨으니 머리가 아픈 게 당연하지.”
“…….”
“시원한 차라도 한 잔 마시겠느냐?”
이마를 넘어선 시원한 손바닥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엉거주춤 고개를 든 이설이 눈을 깜빡이기만 하자 황제가 재차 묻는다. 아니면 바깥바람이라도 쐬겠느냐? 이설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황제가 창을 열었다. 해 진 뒤의 찬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 비 냄새를 남기고 지나갔다. 바람이 제법 강해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날리니 황제도 곧 창을 닫았다.
얼굴에 닿았던 찬 기운에 정신을 차리며 이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실 무엇을 부정하려는 고갯짓인지는 이설도 잘 몰랐다.
“향이 좋다 멋모르고 마셨다가는 순식간에 취하는 술이다.”
“…….”
“재촉하지 않을 테니 먹을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먹거라.”
겨우 한 잔에 술기운이라도 오르는 건지 황제의 목소리가 새삼 다정하게 들린다. 그럴 리가 없지 속으로 되뇌며 황제가 재차 따라 준 술잔을 손에 들었다. 다른 한 잔에 다시 술을 가득 채우고 그 잔은 황제가 든다. 황제가 먼저 술을 마시고 그 뒤를 따라 마시며 이번에는 이설도 한 모금만 꼴깍 넘기고 잔을 내려놓았다.
술 시중을 들라 하지 않았다 하시니 그 옆에 앉아 할 일이 없다. 자리로 돌아가려고 바닥에 손을 짚자 술잔을 채우던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어딜 가려고?”
이설이 술상 건너편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됐다. 그냥 여기 앉아 있거라.”
“…….”
“편히 앉아도 좋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던 이설이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하루 몇 번이나 황제 옆에 바짝 다가갔는데 그때마다 긴장이 되기는 매한가지다. 앞으로 몇 번이나 황제를 바로 옆에서 모시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긴장에 익숙해질 일은 없을 것 같다. 불편하고 무거운 공기에 서서히 잠식당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며 찰랑이는 술만 입술 적시듯 천천히 음미했다.
황제는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건지 홀로 술잔을 채웠다, 비웠다를 반복하며 먼 곳을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가 정확히 어디를 향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났다. 술은 이미 식은 지 오래고 찰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남은 양도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이설이 마신 건 서너 잔 정도인데,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마시던 과실주에 비해 많이 마시긴 했지만 술맛이 약해서인가 보다, 하고 태평히 생각했다. 다만 언제서부터인가 잠이 쏟아진다.
“밤이 늦었구나.”
창을 닫아 밖은 보이지 않고 침소 곳곳에 등을 밝혀 놓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생각해 보면 황제의 말이 맞을 것이다. 자꾸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이유를 이제야 알아챘다. 지금쯤이면 침의로 환복 후 침상에서 서책을 보다 어느 시점에 까무룩 잠이 들었을 시간이다.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잠을 쫓았다.
“그날 나덕산 동굴에서 내가 네 머리를 내려 주었었지?”
황제가 느닷없이 지난 일을 물었다. 어두운 동굴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독과 약초 기운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황제가 이설의 비녀를 빼 주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결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늘은 길게 풀어 헤친 머리에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합환주를 마셨고.”
황제가 빈 술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입궁한 첫날 밤, 초야에 마땅히 해야 할 두 가지를 이제 모두 하였다.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이설은 아무 의미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황제 말에 맞장구를 쳤다. 황제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반쯤 졸고 있던 이설에게 꿈결처럼 나긋하게 들렸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우리가 함께 보낼 밤뿐이구나.”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는 건 순식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