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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50)화 (50/300)

달의 황홀경

50화

오갈 데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겨우 시선 둘 곳을 찾은 곳은 멀리 꽃병 옆에 자개함이다. 너무 멀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자개함의 반짝거리는 자개 장식을 한 개, 두 개, 세는 것이 열일곱 개쯤 되었을 무렵 멍해지던 정신에 의식이 번쩍 들었다.

“……뭘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는 것이냐?”

“…….”

“아프지 않느냐, 벌써 세 번이나 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코앞에 황제가 앉아 있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앉은 황제에게서 알싸한 약초 냄새가 났다. 아마 황제가 제 손에 바르고 있는 약 때문일 것이다.

차란과 흑영이 나가고 자리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태금궁 궁인이 손에 바를 약과 깨끗한 무명천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설의 손에 붉은 자국을 보고 자신이 치료하려던 궁인은 황제의 눈짓에 눈치 좋게 가지고 온 물건들을 탁자에 두고 침소를 나갔다.

혼자 알아서 바르라는 건가, 생각이 들 무렵 황제는 이설의 옆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얼결에 손을 내밀자 그 위로 묽은 반죽 같은 진녹색 약이 얇게 펴 발렸다.

아프지 않냐는 물음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설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의 황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가 아니다.

“따가울 텐데. 정말 아프지 않아?”

사실 조금 따끔하긴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대답을 잠시 고민했지만 그래도 아프다 말할 거리는 아닌 것 같아 다시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재차 물어 이설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표정은 무겁다. 또 미련하다 타박하시려나. 걱정이 들려는데 손바닥 위로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약 기운에 열이 올라 따갑던 느낌이 한결 가셨다.

“……왜. 지금도 많이 아픈 것이냐?”

“…….”

“태자는 이렇게 해 주면 좀 나아진다 하던데.”

황제가 입으로 호, 하고 불어 주는 바람이 손바닥 위로 퍼진다. 깜짝 놀라 제 쪽으로 당기려 했지만 손목을 쥐어 잡은 황제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아직 손바닥 위로 입바람을 불어 주던 황제는 격하게 반응하는 이설을 보고 빈정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표정은 좋지 못했지만 붙잡은 손목을 휙 밀쳐 내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 아팠던 걸 내색도 않고 잘도 참았구나.”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황제는 혀를 쯧쯧 차며 손바닥과 손가락을 모두 감쌀 만큼 넓게 천을 둘렀다. 무뚝뚝한 표정과 달리 손길은 조심스럽고 솜씨는 그럴싸하다. 이설은 반대 손으로 연신 목 주변을 문지르며 얼굴을 식히느라 바빠 황제가 손목을 놓아주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덕산에서 내려와 다친 손이 그나마 좀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또 같은 손을 다치다니. 사실 이 정도로 처치를 해야 할 만큼 다쳤다는 말을 하기에는 무척 민망한 상처다. 뻣뻣한 활시위에 살갗이 조금 쓸린 것뿐인데 이런 처치는 너무 과하지 않을까 싶다. 붓은커녕 목탄필을 쥐기도 불편하고 숟가락을 드는 것도 여의치 않을 것이다. 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한사코 괜찮다 사양했을 텐데 답답하게 되어 버렸다.

“심한 건 아니니 내일 아침쯤에는 나아질 게다.”

“…….”

“그러니 그 우울한 얼굴은 좀 거두어.”

그런 얼굴을 했었나. 황제의 핀잔을 듣고 표정에 온 신경이 쓰였지만 면경을 보지 않는 이상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설의 얼굴 위로 오만가지 어색한 표정들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황제는 성의 없는 손길로 탁자 위의 물건들을 한곳에 모았다. 느긋한 행동은 이설의 눈길을 당긴다. 평소보다 더 가까이서 본 황제의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황제의 뺨을 가리자 이설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흰 천이 감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쓸려 귀 뒤로 넘어가고서야 다시 옆모습이 훤히 드러난다. 그리고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며 이설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감이 잡힌 이설은 황제의 옥안에 댄 손을 반대 손으로 쥐어 잡으며 몸을 뒤로 물렀다. 하지만 이미 등받이에 걸린 몸이 황제에게서 크게 멀어지지는 않는다.

“……만지지 말거라.”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에 놀라 이설이 양손을 더 세게 쥐었다. 황제는 말없이 이설을 지켜보다 낮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말라 하였는데, 왜 또 그리 손을 세게 쥐는 것이야.”

“…….”

“조심성 없기는.”

황제는 별스럽지 않게 풀어진 천을 다시 감아 주었다. 처음보다 조금 더 세게 매듭지어지긴 했지만 아플 정도는 아니다. 사실 손에 감각은 느낄 겨를이 없었다. 황제의 말대로 너무 조심성 없이 행동한 것을 후회했다.

천을 다 감은 뒤에도 황제는 이설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려 보기도 하며, 빼꼼 튀어나온 손가락 끝을 꾹꾹 눌러 보기도 하며 만지작거리더니 말한다.

“네가 내 얼굴에 손을 댔다고 해서 너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

“하지만 매번 내 눈치를 보며 겁먹는 너를 보는 것도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지.”

걸핏하면 겁을 먹거나 주눅이 들어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황제가 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황제 앞에서는 당당하거나 태연하기가 버겁다. 평생을 왕족으로 살며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어깨를 움츠려 본 적이 없는데 금국에 온 뒤로 제대로 기를 펴 본 적이 없을 정도다. 황제뿐만이 아니라 황궁 여기저기마다 눈치를 보며 사는 신세가 새삼 낯설다.

황제가 놓아 준 손이 허벅지 위로 살포시 포개어졌다. 멍하니 손끝만 바라보는 사이 황제는 멀리 제자리로 돌아갔다.

황제는 정말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그 뒤로 말없이 서책만 들여다봤다. 이설도 따라 서책을 보긴 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하나도 없고 의미 없는 책장만 넘겨 보는 게 전부였다.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 소리가 크게 나왔을 때 흘깃 황제가 쳐다봤던 것 말고는 고요한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한참 뒤에야 궁녀가 들어와 저녁 수라를 들일까 물었고 황제가 그리하라 대답하자 곧바로 탁자 위로 푸짐한 한 상이 차려졌다. 점심 수라에도 이미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갖가지 음식들이 올라와 놀랐는데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차란이 일이라는 걸 하기는 하나 보군.”

차려진 상을 꽤 흡족하게 훑어보며 황제가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뒤이어 불편한 손으로 엉거주춤 젓가락을 든 이설은 무슨 음식에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눈에 익은 산나물 먼저 맛을 보았다. 적당한 간에 과한 향료를 쓰지 않아 맛이 좋았다. 기분 좋은 웃음을 띤 이설과 다르게 황제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이다.

“고기며 생선이며 전까지.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겨우 한 입 먹는 게 그런 잡초인 게냐?”

“…….”

“낮에도 고기 한 점 들지 않더니, 또 무엇이 그렇게 입맛에 맞지 않아.”

나물 한 젓가락 먹었을 뿐인데 질책이 사납다. 낮에 고기 한 점 입에 대지도 않은 것은 또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건지. 좋아하는 반찬들을 먹고 나니 이미 배가 불러 먹지 않았던 것이다. 먹어 보지 않았으니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인지 아닌지도 잘 모른다.

황제는 이설이 꽤나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고 있다 여기는 듯했고, 그것은 비은궁의 궁녀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금국에서 일반적으로 먹는 음식들을 이설만은 먹기 어려워했고, 함께 연국에서 온 기연과 유강은 흙에서 방금 뽑은 잡초도 대충 간을 버무려 내어주면 군말 없이 잘 먹었으니 그들 눈에는 이설이 유독 까다로워 보이긴 했다.

이설은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얼른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저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고, 편식을 하지 않으며, 고기도 무척 잘 먹습니다. 나름의 하고 싶은 말을 얼굴로 표현하려는 듯 결연한 표정을 황제에게 보여 주며 눈을 깜빡인다. 빤히 그 얼굴을 응시하던 황제가 느닷없이 실소를 터뜨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설은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계속 먹지 않고.”

“…….”

“보지 않을 테니 계속 먹거라.”

다시 젓가락을 들며 황제는 소리 없이 옅게 웃었다. 아직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이설에게 어서 먹으라는 듯 한 번 손짓하고는 수라를 든다. 황제가 먹기 시작한 뒤에야 이설도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황제의 식사 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느긋하여 마주 앉은 이설도 느릿하게 이 음식, 저 음식 모두 맛보는 중이었다.

확실히 처음 금국에서 들었던 황궁 요리들보다 제 입맛에 맞아 먹기 수월하다. 황제가 보지 않는 틈을 타 한입 맛보고 인상을 찌푸린 나물 두어 가지와 낯선 냄새가 났던 고기 요리 하나를 제외하고는 대개 맛이 좋았다. 이렇게 온갖 산해진미를 먹는 황제에게 그동안 내놓은 비은궁의 수라상을 떠올려 보니 무슨 결례였던 건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수라를 마치고 깨끗이 치운 상 위에 과일이 들어온다. 잘 익은 복숭아를 보니 한 상 가득한 수라상을 보고도 놀라운 것 외에 감흥 없던 이설의 눈이 반짝반짝 해졌다. 꿀꺽 입맛을 다시는 이설을 보고 황제가 복숭아 담긴 사기 접시를 제 쪽으로 슬쩍 당기자 반짝반짝하는 눈이 그대로 따라온다.

“복숭아를 좋아하는가 보지?”

이설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후식으로 가끔씩 내어오는 정과나 당과는 쓴 차에 곁들어 두어 개 먹긴 하지만 사실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황제 앞에서 멀뚱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 어색해서 주섬주섬 손이 갔던 것인데, 황제가 보기에도 그런 티가 났던 모양이다.

[과일은 모두 좋아합니다.]

손이 불편하니 목탄필도 필담에는 썩 유용하지 않다.

“뭘 먹기는 하니 다행인 건지.”

황제가 혼잣말로 무심히 말했다. 이설에게 접시를 밀어내며 권하자 이설이 사양의 의미로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가 손대지 않은 음식을 먼저 맛볼 수는 없다.

“네가 기미 해 보거라.”

그런 뜻이었나. 황제의 의도를 알고 나서야 한 입 베어 문 복숭아는 적당히 말랑하고 적당히 달다. 황궁에 진상되는 과일이니 오죽 품질이 좋을까. 향긋하게 올라오는 복숭아 냄새를 맡으니 연국에서 마시곤 하던 도화주 생각이 난다. 복숭아 꽃 빛깔이 나는 술인데 바람이 시원한 날 연못 위 정자에 앉아 마시면 달의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고향 땅의 그리움은 그런 사소한 날들의 추억을 되짚을 때 불현듯 밀려온다.

두 조각째의 복숭아를 막 목으로 넘기고 나서야 황제 생각이 났다. 누가 기미를 이렇게 제 배 채우듯 한단 말이지. 민망함을 감추며 슬그머니 복숭아를 황제에게 밀어내자 황제가 손으로 막았다. 무표정한 얼굴인 건 확실하나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매서워 보이지는 않았다.

“내오기 전 이미 기미를 본 것이다.”

“…….”

“아무렴 네게 기미를 시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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