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49화
이설은 조용히 손에 든 호리병만 만지작거렸지만 사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무척 좋아한다 대답했을 것이다. 특히 향이 좋은 따뜻한 과실주를 가장 좋아한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더했을 수도 있다.
이설이 말하지 않은 속마음은 알 길 없는 황제는 태자의 하향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흘끔 마뜩잖게 쳐다보고는 차란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흑영과 시선을 주고받으며 눈빛으로 얘기 중이던 차란이 떨떠름한 태도로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께서도 함께 계신데 제 머리를 잘라 과녁으로 삼으시기에는 좀….”
“헛소리 집어치우고 활 좀 당겨 보아라.”
황제가 넘겨주는 활을 얼떨결에 받아 드는 차란의 표정도 조금 전 흑영과 별반 다르지 않다. 흑영의 얼굴을 한 번, 이설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다시 황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란은 흑영과 달리 황제의 명령에 빠릿빠릿하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과 팔이 활을 쏘는 자세는 잡는가 싶더니 다시 긴 한숨과 함께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저는 무관이 아닙니다. 하물며 근위 대장과 비교할 그릇이 어디 되기나 하겠습니까?”
“흑영과 비교당할 걱정을 하다니, 네 오만방자함은 정도가 없어.”
“…….”
“어서 당겨 보지 않고 뭘 쳐다만 보고 있느냐?”
꺼림칙한 얼굴도 그저 시키는 대로 활시위를 당기는 차란의 옆으로 이설이 다시 벌게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내심 차란이라도 미숙한 솜씨를 보여 주기를 바랐건만 택도 없는 바람이었다. 대충 서서 활시위만 당기고 있는 자세인데도 이설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꼿꼿하다. 팽팽한 활시위가 흑영 못지않게 가볍게 당겨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차란 같은 체격의 사내에게 겨우 이 정도도 못 하길 바랐던 게 민망한 생각이었다.
황제가 왜 이런 일을 제게 시키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차란과 눈이 마주치자 더 부끄러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차란 마저 가뿐히 성공하자 황제의 핀잔이 여지없이 날아든다.
“이 궁에서 활시위를 당기지 못하는 것은 너 하나뿐이구나.”
“…….”
“왜? 네 궁인들은 좀 다를 것 같으냐? 원한다면 누구라도 데려와 보거라. 너보다 나을 거라 내 장담하지.”
일러 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을, 콕 집어 말해 주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매일같이 허드렛일을 하는 궁녀들이 저보다 훨씬 힘이 좋다는 건 앞뜰과 후원을 일굴 때 진즉 알았다. 황제의 장담은 이설이야말로 확실히 보증할 수 있다.
활과 저를 번갈아 쳐다보는 차란 때문에 얼굴이 더 붉어지는 듯하여 고개를 숙여 호리병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 눈에 안 보이면 남들도 자신을 볼 수 없을 거라 여기는 어린아이처럼 바보같이 구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제 침소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다.
“무예를 배우지 않으셨다면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활시위가 무척 팽팽한 데다가 마마께서는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자신을 대신해 변명해 주는 차란이 고맙다가도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다. 오늘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서책을 보며 무사히 넘겼을 하루가 되었어야 했는데 종일 황제의 눈치를 보는 것도 모자라 창피한 일만 몇 번째인지.
차란의 말을 듣고도 황제는 납득되지 않는다는 듯 이설을 바라봤다. 술병을 든 손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것을 기가 막혀 쳐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가며 이설에게 성큼 다가갔다.
이설이 들고 있던 술병을 뺏어 차란에게 떠안기듯 넘겨주고는 빈손을 당겨 제 손에 쥐었다. 놀라 황제를 올려다봤다가 황제가 가만히 들여다보는 제 손으로 시선을 낮춘 이설이 아, 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활시위를 당기느라 부단히 노력한 손가락에 붉은 흔적이 남았다. 황제의 손끝이 그 위를 훑고 지나가자 그제야 살짝 쓰라린 느낌이 들었다.
“……미련하기는.”
잠긴 목소리가 이제까지 질책하는 것과는 달리 낮고 근엄하여 덜컥 겁이 났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가 감돌자 이설은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고 제 손만 내려 봤다. 신경 쓰일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진즉 알아차렸을 것이다. 고작해야 하루 정도 지나면 나을 흔적인데 겨우 이런 걸로 황제에게 밉보이기라도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설은 물론 흑영과 차란도 아무 말 않고 황제만 쳐다보는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깬 것은 역시나 황제다. 탐탁지 않은 목소리가 혼자 중얼거렸지만 세 사람의 귀에 들릴 만큼은 됐다.
“활은 안 되겠군.”
이설의 손을 한 번 더 부드럽게 쓸어내린 황제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 차란에게 향했다. 감추려고 애쓰기는 하나 이미 놀란 표정이 훤히 드러난 차란은 당혹스러운 듯 황제를 쳐다봤다. 하지만 황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란의 손에 들린 활만 가져가서는 바닥으로 휙 집어 던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활 소리에 이설이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랐다.
“활은 됐다. 차라리 돌팔매질을 배우는 게 낫겠어.”
“…….”
“소질이 보이면 단검을 던져 볼 수도 있으니 활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저를 비꼬려 하는 말인가 싶어 몸이 움츠러들려다가 뒤이어 하는 말이 어쩐지 진심처럼 들려 난감했다. 단검 던지기라면 일전에 배워 본 적이 있었는데, 나무 기둥에 자루를 맞고 튀어나온 단검에 다칠 뻔했던 적이 있을 만큼 영 소질이 없는 것이다. 아마 이설이 돌팔매질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손을 떠나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는 돌들을 보면 황제도 그 손에 단도를 쥐여 줄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이설은 속으로만 조용히 생각했다.
“게다가 돌팔매질이라면 차란을 과녁으로 삼을 수도 있지. 죽지는 않을 테니 정무를 보는 데에도 무리가 없고 말이야.”
“……반드시 죽을 겁니다.”
농을 하신 거겠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하는 말이라 이설은 황제가 농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당사자를 앞에 두고 돌팔매질로 처형하겠다 위협을 하겠다 하는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심드렁한 얼굴로 단호히 대답하는 차란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설은 차란을 나무 기둥에 묶어 두고 자신에게 차란을 향해 돌을 던지라 황명을 내리는 황제를 상상하자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차란이 들고 있던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동안 조용해진 공간을 빗소리가 시끄럽게 채웠다. 조금 잦아든다 싶었는데 또 한바탕 무섭게 쏟아지니 무심결에 얼굴은 또 창밖으로 향했다.
“지겹군, 지겨워.”
“막바지입니다. 이제 곧 끝날 테니 너무 노여워 마시지요.”
“태금궁으로 돌아갈 때에는 좀 적당히 왔으면 좋겠어. 질퍽한 흙바닥을 밟는 건 질색이니.”
황제 평소답지 않게 소탈한 말투로 대꾸하는 것이 낯설다.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물끄러미 황제를 올려다보는 이설과 달리 차란은 익숙한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답할 뿐이다.
“그럼 돌아가지 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
“어차피 내일 아침도 이곳으로 걸음하실 거라면 구태여 밤비에 젖으실 필요가 없으실 것 같습니다만.”
차란의 말을 듣기 편하게 바꿔 해석하는 것에 걸린 시간은 찰나이다. 그러니까, 차란은 황제에게 비은궁에서 하룻밤을 머무르는 게 낫지 않겠느냐 묻는 것이었다.
저 혼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설과 달리 황제는 그 말을 듣고도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슬쩍 얼굴만 찡그리는 게 다였다. 싫다, 좋다, 그러겠다, 그러지 않겠다 이런 대답도 없이 황제는 평소보다 좀 무리했던 어깨가 뻐근한지 손으로 만지는 것 말고는 반응하지 않았다.
차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황제의 눈치를 보긴 했지만 이설처럼 제 몸을 움츠러트리거나 황제의 반응에 따라 주눅이 들 것처럼 소심하게 굴지는 않았다. 가늘게 뜬 눈을 황제에게 건네 봐도 건질 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이내 흥미가 떨어진 것처럼 눈길을 돌렸다. 반듯하게 잘생긴 사내의 얼굴이 기품 있게 미소 지으며 이설에게 향한다.
“그럼 신은 태자 전하의 말씀을 모두 전하였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마마께 긴히 드리고자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만 상황이 조금…….”
차란이 보란 듯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흘린 말끝의 의미를 충분히 짐작하며 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 숙이는 차란에게 마주 고개를 숙이고 함께 웃는 얼굴로 일어나자 그 옆으로 떨떠름한 표정의 황제가 보인다. 아랫사람에게 과한 예의를 갖추고 인사를 받아 준 것이 못마땅한 것 같다. 하지만 이미 해 버린 인사라 다시 무를 수도 없으니 괜히 입꼬리만 어색하게 당기며 황제의 눈길을 피했다.
“퇴궐하면 우장절이 끝나기 전까지는 다시 입궁하지 말라.”
“폐하께서 시키신 일은 어찌하고 말입니까.”
“상관없다.”
“하오나 이미 금의위(錦衣衛:죄인의 체포 및 신문 따위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서 문초 중인 죄인들이……,”
“흑영, 당장 이 꼴도 보기 싫은 것을 내 눈앞에서 치우거라.”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기척도 없이 서 있는 탓에 존재도 잊고 있던 흑영이 차란의 옆으로 나타났다. 팔뚝을 그러잡을까 하다가 그건 좀 아닌가 싶었는지 장지문 쪽으로 고개를 까딱한다. 의미를 알아들은 차란도 별 저항 없이 황제에게 인사 후 뒤를 돌았다. 소곤거리는 차란의 말소리로 유추해 보건대, 흑영과는 제법 막역한 사이인가 보다.
장지문이 열리기 전 황제가 방금 전보다 한결 관후해진 어투로 말한다.
“윤 내관에게 일러 살갗이 까진 상처에 바르는 약을 가져오라 하여라.”
장지문 앞에서 멈칫한 차란이 뒤를 돌았다. 단정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웃음이 어색한데, 황제는 또 그게 마음이 들지 않는지 어서 나가라 손을 휘이 저었다. 차란과 흑영이 나가고 한참 만에야 다시 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