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47화
황제는 가끔 이설이 글로 적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기도 전에 그 마음을 미리 알아차렸다. 빗소리가 듣고 싶어 닫힌 창을 바라보면 말없이 창을 열어 주거나 태금궁 궁녀가 준비해 온 차가 입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먹고 있으면 그 마음을 용케 알아채고 다른 차를 내오라 궁녀를 들이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황궁에서는 산짐승을 키우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고민하던 차였다. 잘 돌봐 주었다가 우장절이 끝나면 다시 나덕산에 놓아주어야 하나, 하던 아쉬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황제가 말했다. 떨어진 허락에 이설이 마음 편히 웃으며 토끼 등을 쓰다듬었다. 수면초라도 먹였는지 토끼는 세상모르고 깊이 잠들었다.
“끊긴 음식들은 이르면 오늘 저녁부터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차란이 일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렸겠지.”
“…….”
“어쨌거나 앞으로 굶지는 않겠구나.”
남의 좋은 소식 전하듯 흘려 말하면서도 황제는 그게 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난처한 건 이설이다.
이설은 굶지 않았다. 밥상이 소박했던 건 고기보다 채식을 선호하는 이설의 취향 탓이지 비은궁의 곳간이 비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틀에 한 번씩 기연과 궁녀 한 명이 짝지어 나가면 두 손 가득 먹을 것들을 사 가지고 들어왔다. 이설이 한사코 사양해도 궁녀들은 끼니 챙기는 건 물론 그 사이마다 군음식들을 가지고 들어와 권했다. 비은궁에서 가장 바쁜 궁녀는 부엌일을 도맡아 하는 단향이다.
금국에 온 뒤로 몸이 마른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 문제였고 그 뒤에는 황제와 마주 앉아 먹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리고 사냥 대회 이전까지는 갖은 걱정으로 마음 편한 날이 없어 자연스레 입맛도 떨어졌다. 먹지 않으니 살이 빠지고 몸이 약해지는 것뿐이다. 황제가 오해한 것처럼 먹을 게 없어 굶는 일은 없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종이는 멀리 있고 황제는 일일이 손으로 써서 변명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난감한 채로 하릴없이 황제의 눈치만 봤다.
“어제 네 상궁이 말했던 것은 사실이냐?”
불쑥 묻는 황제의 말에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황제가 다시 묻는다.
“금국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 하였잖느냐.”
황제가 비꼬는 말에 변명하며 덧붙인 주 상궁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사실이라고 대답하자니 감히 금국의 음식을 업신여기는 꼴이 될 것 같고 사실이 아니라고 대답하자니 주 상궁이 황제에게 거짓을 고한 게 되어 버린다. 짧은 순간 여러 대답을 생각해 봐도 마땅한 것이 없다.
황제는 머뭇거리는 이설을 보고 또 그 마음을 읽은 듯했다.
“알아들었으니 그만 고민하거라.”
“…….”
“거짓말을 그렇게 못해서야.”
중얼거리는 말이지만 사이가 가까워 모두 들었다. 황제도 이설이 들으라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시무룩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황제는 쯧, 하고 혀를 찼지만 조롱의 의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가 탁자에 걸터앉은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는 이설이 황제와 눈을 마주치려면 목을 뒤로 휙 젖혀야만 가능하다. 금국인들은 연국인에 비하면 여인과 사내 할 것 없이 키가 크고 장건한데, 황제는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키가 큰 편이었다.
긴 장포를 걸치고 멀리서부터 제게 걸어오는 황제를 볼 때면, 어째서 황제를 태양 불꽃의 현신이라 믿는지 알 것도 같다. 황제는 그 옆에 고만고만한 인간들과는 달리 주변을 압도하는 힘이 있고,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천자가 분명했다.
“뭘 그리 빤히 보는 것이냐?”
“…….”
“목이 떨어져 나가겠구나.”
꺾인 목이 제자리로 돌아올 줄 모르고 내내 황제의 옥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 이설은 뭐에 홀린 것처럼 황제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제 그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저 수려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종종 넋을 잃곤 한다. 이전에는 거의 들켜 본 적이 없는데 근래 들어 벌써 몇 번이나 들켰다.
몹시 곤란하다.
“곁눈질로 보는 것보다 대놓고 얼굴을 보며 눈치를 보는 게 더 쉽다면야, 그렇게 하거라.”
이제 보니 이전에는 들켜 본 적이 없는 게 아니라, 황제가 그저 모른 척 넘어가 주었던 것인가 보다.
몹시, 더 곤란해졌다.
“어차피 네게는 뭐든 어려울 테니.”
황제가 아래로 뻗는 손이 이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목을 감싸 쥐었다. 이설의 손도 한 번에 덮는 큰 손이 가느다란 목 전체를 둘렀다. 가볍게 닿아 있는 손이지만 이 행동 자체가 완전한 위협이나 다름없다. 황제가 손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이설은 목이 졸릴 것이고, 힘의 세기에 따라서는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
이설은 조용히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와 살이 닿으면 종이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볼에 홍조가 퍼진다. 이것까지 들키면 무척 곤란할 텐데. 하지만 얼굴을 가릴 수도, 황제의 손아귀에서 벌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자리만 지켰다. 황제가 가하는 위협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지금 당장 곤란한 것은 붉어진 얼굴을 가릴 수 없다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나도 네가……,”
황제가 다시 중얼거렸지만 이번에는 그 말이 선명히 들리지는 않았다. 이설이 듣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혼잣말하듯 속삭이던 말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그리고 곧 목에 닿았던 따뜻한 체온이 떠나고 서늘한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황제는 이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후 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빗소리가 유독 요란하다 생각했는데 후원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인가 보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봤다. 기세가 한층 누그러지긴 했지만 비는 지치지도 않고 하루 온종일 쏟아지고 있다. 이쯤 되니 금국인들이 왜 그토록 우장절을 질색하는지 알 것도 같다. 처소 뒤 후원조차 못 나가 본 게 벌써 며칠째이다.
“밖을 나가 보고 싶은 것이냐?”
황제가 이설을 따라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이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장절에 여인들은 바깥출입을 삼가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
“……그래, 네가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
“하지만 여느 사내들과 다르다는 것도 알지.”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창가에 서서 비가 오는 풍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마 등불을 새로 넣어 주러 침소에 들렀던 단향이 해 준 얘기일 것이다. 금국에서는 비가 오는 날 바깥출입을 하면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는 미신이 있다며, 사람들이 우장절에 집 안에서만 머무는 것은 단순히 외출이 번거롭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떤 불길한 일이 일어나냐는 물음에 단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일부 사람들만 알고 있을 만큼 오래된 미신일 뿐 설마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며 가볍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활짝 열린 창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오래된 미신을 믿는 것이 단향만은 아닌 듯 황제는 단호히 자리에서 일어나 후원을 향해 열린 문을 닫은 후에야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황제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이설이 멀리 있던 종이를 끌어당겼다. 단향에게 듣지 못한 대답을 황제는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종이 위로 검은 글씨가 한 글자 쓰이기도 전에 황제는 이설의 마음을 읽었다.
“우장절은 수신이 한가로이 여름을 나기 위해 비와 함께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
“……달아난 정인을 찾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지.”
이미 식은 찻물을 마셔 목을 축인 황제는 아직 어리둥절한 이설의 표정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전 수신 유서원의 정인이 하늘을 도망쳐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수신의 눈에 띄지 않게 이 땅 어딘가에 몸을 숨겼다더군.”
“…….”
“그 뒤로 수신은 매년 긴 여름이 끝날 때마다 지긋지긋한 비와 함께 내려와 달아난 정인을 찾는 것이다. 어떤 해에는 그 정인과 닮은 여인을 하늘로 데려가기도 하지.”
“…….”
“그래서 비가 오는 동안 여인들은 외출을 삼가고 집 안에 몸을 숨기는 미신이 생긴 것이다. 수신의 눈에 띄었다가는 아무도 모르게 하늘로 끌려갈지도 모르니.”
황제는 긴 이야기를 마치며 가볍게 웃었다. 제게 농을 하신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아득한 이야기라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면 우장절이 끝나기 전까지는 얌전히 처소에만 머무는 게 좋을 것이다.”
“…….”
“금의 황제 체면에 이름을 얻은 정인을 수신 따위에게 뺏길 수는 없지 않겠느냐.”
눈을 마주한 황제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지만 이 말 만큼은 의미 없는 농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황제와 자신은 이름을 주고받은 운명이 아니다. 이설은 늘 이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려 노력했다. 괜한 기대 뒤에 따라오는 실망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알고 있다.
나긋한 목소리로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황제는 본 적 없이 다정했지만 이런 것에 익숙해질까 문득 겁이 났다.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저 얼굴이 가볍게 미소 지을 때면 모든 감각이 희미하게 사라진다. 황제는 제게 닿을 수도,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천자인데 자꾸만 욕심을 내게 된다.
“그러니 앞으로는 밖에서 나를 기다리지 말거라.”
목소리는 단호하고 말끝은 엄격하다. 오늘 아침 마중을 나가 처마 끝에 서 있던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황제가 들려준 긴 이야기의 목적이 이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역시 기대 뒤에 따라오는 실망은 상처다.
“날이 이렇게 찬데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별안간 인상을 찌푸린 황제가 질책 어린 목소리로 꾸짖었다. 실망한 마음이 얼굴에 떠오를까 애써 표정을 굳히고 있던 이설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고뿔에 걸렸다간 목소리가 돌아와도 태자를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질책하는 말투는 여전히 단호하지만 냉랭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저 때문에 태자까지 고뿔에 걸릴까 어부지리로 받는 걱정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이설에게는 의미가 있다.
황제는 날이 차다고 했지만 이설이 느끼기에는 금국에 온 이후로 요즘 날씨만큼 기분 좋게 선선한 날이 없었다. 가끔 이른 아침 자고 일어난 직후에 부는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고뿔에 걸릴까 염려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간 뜨거운 태양 볕에 몸이 녹아내릴 것 같던 날들을 견디고서야 얻은 시원한 바람이 마냥 반갑기만 했다.
손끝만 멀거니 바라보던 결심이 선 듯 이설이 입술을 달싹이며 목탄필을 들었다. 글을 써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글자를 따라 읽는다. 정성스럽게 쓴 글을 황제에게 내밀었다.
[그럼 비가 그치고 난 뒤에는 폐하를 기다려도 괜찮겠습니까.]
유심히 글을 읽는 황제의 표정이 때아니게 심각하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고요한 정적 속에 이설은 조금 후회가 밀려왔다. 황제가 고뿔에 걸리지 말라 말을 꺼낸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텐데 멋대로 주제넘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것이다. 황제의 냉정한 거절 혹은 조롱을 기다리며 괜히 바구니 안에서 잠만 잘 자고 있는 토끼의 등을 쓰다듬어 보았다. 이설의 속도 모르고 토끼는 아직도 잠만 잘 잔다.
긴 침묵은 곧 완곡한 거절인가. 오래 기다려도 황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건네받은 종이만 내내 들여다봤다. 마음을 털어 버린 이설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지만 이번에는 황제도 이설의 마음을 읽어 내지는 못했다.
“비가 그치면 좀 더 일찍 올 테니,”
“…….”
“볕이 잘 드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무뚝뚝하게 말하는 황제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이설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