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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45)화 (45/300)

달의 황홀경

45화

침소로 들어와 늘 앉는 곳에 앉자 이설이 맞은편 빈자리 옆에 섰다. 앉으라는 허락을 받지 않으면 종일 서 있을 것이다. 앉아도 되겠느냐 먼저 묻는 일 따위는 없을 테지.

“앉거라.”

황제가 명하고 나서야 이설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보통 사내들과 달리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조심스럽고 다소곳하다. 여인들과는 분명 다른데 그렇다고 사내들과 같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이설은 몸짓이 나긋나긋한 편이었다. 마른 몸으로 저렇게 가볍고 조용히 움직이는 걸 보면 마치 발이 공중에 뜬 채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

성이 난 마음을 안고 한걸음에 찾아온 비은궁이지만 아이처럼 하야말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깟 게 그리 중요한 일이었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화낼 기분은 빗물에 쓸려가듯 사그라졌다.

뒤이어 궁녀 둘이 들어와 따뜻한 차 두 잔을 내어놓고 나갔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이설이 긴 숨을 미약하게 뱉었다. 두 볼에 홍조는 아직 그대로고 반만 묶은 머리카락은 목선을 타고 내려와 어깨 아래로 흘렀다. 이렇게 보니 이전에 금잔화 화전에서 봤던 이설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달빛에 아스라이 빛나던 건 저 머리카락이었을까 아니면 이설 그 자체였을까.

물끄러미 탁자 한쪽을 쳐다보기에 제 손목을 쳐다보는가 했는데 시선의 방향은 그쪽이 아니다. 이설은 황제가 손목을 훤히 드러내고 난 뒤로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황제가 머리를 쓸어 넘기거나 이마를 짚거나 하는 등의 행동으로 소매가 걷어질 때면 곧바로 고개를 돌려 멀리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제 딴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이었다.

이설이 쳐다보고 있는 것은 제가 가져온 목각함이다. 비단에 쌓인 그 물건이 이설의 호기심을 자극했나 보다. 별것도 아닌 것에 시선을 빼앗긴 황제가 손가락으로 목각함을 툭 밀치자 유심히 그것만 바라보던 이설이 흠칫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제는 제 앞에 목각함을 이설의 앞으로 쓱 밀어 주었다.

“무엇인지 궁금하거든 네가 열어 보아라.”

이설이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빤히 쳐다보던 걸 들킨 게 민망한지 표정이 조금 난처해졌다.

“네가 열어 보아도 좋다.”

다시 이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치가 없으니 별 게 다 답답하다. 황제가 목소리를 좀 더 나직이 내렸다.

“네게 주려고 가지고 온 것이다.”

“…….”

“열어 보거라.”

그제야 눈이 커진 이설이 제 앞에 놓인 것과 황제를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꼼지락거리며 비단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모습을 드러낸 목각함을 보고도 다시 허락을 구하듯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목각함을 열었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발견하고 놀란 듯 황제에게 향했다.

“네 것이다.”

“…….”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지 말라 주는 것인데, 또 붓을 꺼내 들면 어쩌자는 것이냐?”

글을 편히 쓰라고 기껏 생각해서 구해다 준 것인데 이설은 또 버릇처럼 붓을 든다. 황제의 말을 듣고 머뭇거리는 얼굴에 난감함이 스친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하다.

“아까워서 쓰지도 못할 것이라면 네게 줄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

“아니면 그저 내 성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냐?”

이 말에 이설이 도리질을 치며 냉큼 붓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황제가 준 목탄필을 쓰는 것이 어려운지 한참이나 목각함을 들여다보고 고민하다 겨우 하나를 빼 들었다. 능숙하게 손에 쥐고 글을 쓰는 것을 보니 처음 써 보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하기야 아무리 목탄필이 귀하다 한들 왕족 출신인 이설이 손에 한 번 안 쥐어 봤을 리는 없겠다.

[너무 귀한 것을 받았습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주신 목탄필은 혼자 다 사용하기에]

“거기까지만 하지.”

“…….”

“다 쓰고 필요 없는 것은 버려도 좋다. 이제 네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어차피 모두 이설을 주려고 가져온 것이다. 황제는 쓰지 않는 물건이고, 다른 이에게 줄 마음도 없다. 차라리 이설이 궁 밖에 내다 팔아 음식을 사 오는 데에 쓰이는 게 더 값질 것이다.

“마음에 드느냐?”

[예. 연국에서 쓰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단단한 걸 보니 도국에서 들여온 것인가 봅니다.]

“그렇다더구나.”

황제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이설의 얼굴을 살폈다. 별안간 기대도 않던 것을 받아 놀라긴 했지만 특별히 기뻐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겁을 먹거나 당황하지 않을 때면 으레 보이는 무념한 얼굴이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거의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겁먹고 당황하는 것 외에는 황제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이설은 늘 비슷비슷한 태도와 그에 걸맞은 얼굴이었다.

이설이 흘끔 황제를 쳐다보고는 목탄필을 고쳐 쥐었다. 종이에 뭘 그리 적는지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않는 이설을 보며 황제는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턱을 괴었다.

이설은 아직도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우장절이 끝날 때쯤에는 돌아온다 하였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이 불편한 의사소통을 며칠이나 더 견뎌야 한다니 이설도 이설이지만 마주 앉아 있는 황제도 지긋지긋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에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는 것이 곁에 있는 줄도 모르고 편하였는데 지금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앉아 있는 이설이 못내 답답하다. 그래서 옆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대꾸도 못 하는 이설에게 자꾸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차란이나 소운이 아닌 사람 앞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자세로, 편히 앉아 본 적은 처음이다. 뭘 그리 적는지 들여다보려는데 흘러내린 이설의 머리카락이 종이를 가렸다. 의자를 이설에게 가까이 옮길까 싶던 차에 이설이 다 쓴 종이를 내밀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간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폐하께서 제게 하셨던 약조를 결례가 안 된다면 지금 청하고 싶습니다. 괜한 것을 간청 드리는 게 아닐까 밤새 고민해 보았지만 더 이상 참고 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란 생각이 들어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그 약조를 청하여도 되겠습니까?]

쓸데없이 구구절절한 글이다. 애당초 황제가 먼저 약조하였던 것인데 왜 당연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나 대단한 청을 하려기에 저런 결연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는 것인지, 그 속을 헤아려 보던 황제는 문득 조금 전에 차란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애초에 그 일 때문에 비은궁에 온 것인데, 처마 아래에 마중 나왔던 이설을 보고 그럴 기분이 가셔 잠시 잊고 있었다.

두 달이면 꽤나 오래 버텼다. 갑자기 시작된 우장절이라 미리 식료를 준비한 것도 없을 테고 이제 와서 저잣거리에 나가 봐야 장사 중인 상인을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어제 황제에게 당한 수모가 오죽했으랴. 마침 황제가 직접 약조해 준 것도 있으니 거절당할 거란 생각을 한 칸 미뤄 두니 말 꺼내기가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고작 이런 것을 청하라고 준 약조는 아니고, 약조를 들먹이며 청하지 않았어도 들어줄 일이었지만 당장 굶은 처지에 놓인 데다가 얼마나 더 이 신세를 겪어야 할지 장담할 수 없는 이설이니 그런 걸 고민했으려나 싶다.

“말하여라.”

황제의 대답을 들은 이설이 한결 가벼운 얼굴로 글을 써 내려갔다. 눈은 자연스레 이설의 얼굴을 향한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이리 건네라.”

글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 차 다시 읽는 이설에게 종이를 넘기라 재촉했다. 기구한 신세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만큼 이설도 체면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닐 테니 간략히만 적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글이 짧다.

것보다, 애당초 황제가 예상했던 청이 아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다고…?”

황당함에 목이 막혀 묻는 질문에 이설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다. 황제는 이설에게 받은 글을 다시 읽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시 읽어도 이설이 청하는 건 그게 전부다. 겨우 이 정도의 부탁을 하는 것에 저런 단연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지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황제가 눈꺼풀을 무겁게 감았다 뜨며 이설을 보았다.

“……네게 준 내 약조를 기억하느냐?”

“…….”

“나와 태자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는 약조였다. ……무엇이든지 말이다.”

“…….”

“네 권세를 높이기 위해 품계를 올려 달라 청할 수도 있었고, 형편없는 네 궁의 세간살이를 모조리 바꿔 달라 청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전에 이 낡은 궁을 버리고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새 궁을 지어 달라 하였어도 나는 그렇게 해 주었을 것이다. 설령 네가 황후의 자리가 탐난다 하였어도…,”

“…….”

“……나는 네 청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화가 난 탓에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가, 동시에 이설에게 묻고 싶은 수십 가지 질문들이 떠오르며 머릿속이 복잡하게 섞여 들어갈 뿐이다.

이설은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황제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너의 청은 그 정도였는데 네가 바라는 것은 고작,”

황제가 종이를 허공에 들어 펄럭였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너무 터무니없는 청이라 조소가 터졌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읊조릴 때는 반응도 없던 이설은 황제가 헛웃음을 뱉고서야 고개를 아래로 숙여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고개를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기껏해야 어깨를 넘어서는 정도다. 황제는 후궁들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에 제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도 방금에서야 알았다.

이설의 동그란 머리를 지그시 바라보던 황제는 이설이 보지 않는 순간을 틈타 소리가 나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희미하게 드러나던 노여움을 간신히 참으며 차분하게 말한다.

“약조는 단 하나뿐이다. 정말 이 청을 들어주는 것에 이 약조를 써 버려도 괜찮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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