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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44)화 (44/300)

달의 황홀경

44화

“비은궁 궁녀들 중 그 사정을 고공사(考功司: 관리의 공과를 조사ㆍ처리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에 알린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

기실 이렇게 물으면서도 황제는 이설이 궁인들에게 함구하라 일렀을 것이라 짐작했다. 여태껏 그 사실을 제게 직접 고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입 한번 뻥긋 한 적이 없는 자다.

“비은궁 상궁 하나가 광흥창과 내섬시 두 곳을 오가며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나 봅니다. 그쯤에 내섬시에서도 사태를 파악하는 듯했으나 우장절이 갑자기 시작되는 바람에……,”

“뭐가 어떻게 되든 당장은 손 놓고 있겠다 이거로군.”

“예. 내섬시에서야……, 비은궁 일로 바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제 배 곯는 것도 아닌 데다가 황제에게 눈길도 못 받는 후궁이 살고 있는 비은궁 따위에 누가 신경이나 써 주겠는가. 후궁의 권세는 황제가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내섬시에서 식료도 제때 받지 못하여 패물을 팔아 자급자족해야 하는 이설의 권세는 황제, 자신이 만든 것이다. 이를 갈며 분노한 와중에도 이 사실은 스스로 깨칠 수 있다.

그래도 그렇지 어찌 왕족 출신 후궁 체면에 가진 패물을 팔아 입에 풀칠할 생각을 한단 말이지.

그저 말 한마디였으면 됐을 것이다. 이치에 어긋나는 간언도 아니고 주제를 모르고 지껄이는 베갯머리송사도 아니다. 그저 사람답게 먹고 사는 문제일 뿐인 것이다. 태자의 안부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물으면서 왜 마땅히 해야 할 말은 입을 꾹 닫고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이깟 일은 청할 거리도 안 됐다 여긴 걸까 아니면 청해 봤자 나아질 게 없다고 생각한 걸까.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으니 황제인 자신에게 간청할 용기도 없었을 테고 그동안 받은 대우를 고려해 보면 간청한다 한들 들어줄 것이라 여기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뭐가 어떻든 간에 황제인 자신에 대한 신망이 손톱만큼도 없으니 말을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아니, 것보다 이 모든 불행이 황제가 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황제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되씹으며 노기를 숨기려 애썼다.

“두 달이다. 자그마치 두 달을 어떻게 패물 따위를 팔아 살 수 있단 말이냐?”

“연국의 왕족이 아니십니까. 가져오신 패물만으로도 일 년은 넉넉히 버틸 수 있으실 겁니다.”

“…….”

“일개 농민들도 금으로 만든 곡괭이로 밭을 간다는 연국입니다. 연고 하나 없는 타국 황궁에 무얼 믿고 오셨겠습니까. 패물함이라도 넉넉히 채워 오셨겠죠.”

누가 상단 막내아들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꼴이 딱 비차란 저답다. 일 년은 버틸 수 있다는 말에 얼굴을 찡그리자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이, 황제의 기분을 풀려 하는 농이 아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내려주신 보옥들도 함에 가득할 것입니다.”

어여뻐 준 것은 아니었다. 지아비로서, 황제로서 도리는 다하기 위해 주었고, 출신을 고려해 여타 후궁들이 품계를 받았을 때보다 넘치면 넘쳤지 모자라게 주지는 않았다. 의미를 가지고 준 것도 아니었고, 이설에게 준 이상 어떻게 사용하던 그건 이설의 뜻이었으니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귀한 것들을 팔아 배를 채웠다고 생각하면 말문이 막혀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우장절이 갑자기 시작되어 내섬시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곳간이 비어 비은궁에 조달할 식재료가 아무것도 없다 합니다.”

“그래서 당장은 연이설이 굶든 말든 손 쓸 방도가 없다, 이 말이냐?”

“이틀에 한 번씩은 비은궁 궁인들이 궁 밖에 나가 먹을 것들을 사들여 왔다 합니다.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하오나 생각하시는 것만큼 비은궁 사정이……,”

“걱정 따위를 누가.”

차란의 말을 무섭게 잘라 내며 황제는 이를 갈았다. 이건 걱정이 아니다.

“광흥창과 결탁한 내섬시 관리들은 모두 색출하였느냐?”

“예. 달아난 광흥창 관리 셋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지금 금군이 문초 중에 있습니다.”

이건 걱정이 아니라 노여움이다.

“……문초가 끝나는 즉시 죄인들을 아형(餓刑:좁은 통 속에 가두고 머리만 내놓은 상태에서 굶겨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불린 재산을 모두 황궁으로 몰수하라. 직계혈족들은 모두 형법전에 따라 엄격히 처리하겠다.”

“…….”

“내 말 듣지 못하였느냐?”

대답 없는 차란을 다그치는 목소리에 별다른 노기는 없었지만 표정만큼은 전에 없이 살기 가득했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차란이 결국 난처한 기색을 훤히 드러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금국에서 마지막으로 아형에 처해졌던 자는 십여 년 전 부녀자 열둘을 살해하고 어린아이들을 노역으로 팔아넘긴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폐하께서 방금 내리신 형벌은 내섬시 관리가 저지른 죄질에 비해 너무 무거운 것임을 알려 드리고자 말씀드렸습니다.”

“내 궁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자는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

“달아난 광흥창 관리들도 모두 숨이 붙은 채로 잡아 오거라. 필요하다면 사지 몇 개쯤 잘라 버려도 좋다. 허나 목숨만은 살려 데려오라.”

이미 끝난 말에 더 토를 달려는 차란의 얼굴 앞으로 손을 휘이 저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여간 곤란한 얼굴이 아닌 차란도 이 분위기에서만큼은 더 대꾸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사선으로 돌린 눈빛이 수심에 잠긴 것을 보니 정말 황제의 말대로 죄인들을 아형에 처해야 하나 생각하는 눈치다. 고작해야 황궁의 음식을 빼돌린 것뿐인 죄인을 말이다.

차란의 고민이야 어떻든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겼다. 괘씸한 부정을 저지른 관리들은 각각 극형에 처하면 그만이지만 아직 이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황제 위신을 우습게 여겨도 분수가 있지, 어제 궁인들을 불러다 경을 치는 제 모습을 보고 이설이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지 선연하다.

“이상 내가 들을 말이 더 남았느냐?”

“……모두 고하였습니다. 신 비차란 이만 소봉궁에 들러 태자 전하께 안부 여쭙고 퇴궐하겠습니다.”

차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황제가 몸을 돌렸다. 며칠째 퇴궐도 하지 못하고 소봉궁에 틀어박혀 태자의 말 상대나 해 주고 있는 소운이 생각나긴 했지만 언질해 줄 생각은 없다.

장지문을 나서자 궁인들이 때맞춰 줄지어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 내관에게 채비하라 일러 주지 않았어도 이쯤이 황제가 궁을 나서는 때이니 다들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 황제의 하루 일과는 아침 수라를 든 후 비은궁으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

우장절도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어젯밤까지 사납게 내리던 비의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래도 아직 사나흘은 더 쏟아질 것이라고 윤 내관은 말했다. 전 같았으면 침전에서 창밖을 보며 욕지거리나 하고 말았지, 밖을 나와 걸을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금궁에서 여기까지 먼 길이 아니었음에도 벌써 질퍽한 흙바닥을 밟는 신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비은궁으로 향하는 걸음이 평소보다 무척 빨랐다. 어깨에 걸친 장포 끝자락은 축축이 젖은 지 오래고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도 물기를 머금었다. 불쾌함에 찡그렸던 얼굴을 털어 내며 육중하게 열리는 비은궁 문 너머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직접 듣지 않는 이상 이리 미련스럽게 행동하는 이유를 스스로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물어 따지는 제게 겁먹은 눈을 하고서 또 어깨를 움츠릴 이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답답함에 머리가 아파 온다.

그동안 자주 드나들었던 탓인지 궁 안에 이르자 펼쳐진 모습이 제법 눈에 익었다.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맹렬한 기세로 걸음을 바삐 옮기던 황제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진 저 너머로 익숙하지 않은 것이 보인다.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던 황제가 곧 그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비은궁의 전경이 여느 날과 달랐던 것은 처마 아래에 오도카니 서 있는 이의 마중이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느냐?”

당장에라도 이설의 침소로 들이닥칠 기세로 난폭하게 걷던 황제가 처마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은 여전히 싸늘히 굳은 그대로였다. 그 얼굴을 그대로 마주한 이설이 아무 이유 없이 주눅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쩐지 제 눈치를 보는 듯 눈빛이 어색하다. 황제는 같은 높이에서 이설과 눈을 마주하려 허리를 깊이 숙였다. 황제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이설이 한발 뒤로 주춤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나를 기다렸다고?”

“…….”

“어째서?”

종이와 붓이 없으면 대답 못 할 걸 알면서 괜한 걸 물었다. 눈만 깜빡이는 무구한 얼굴 위로 처마 끝에서 튄 빗방울이 흘렀다. 둔해서 그걸 모르는 건지 닦아 낼 생각을 안 한다. 대신 닦아 주려 손을 가까이 하자 어깨를 움찔하기에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 않고 손끝으로 물기를 닦았다. 슬쩍 닿는 살갗이 차가운 걸 보니 여기서 꽤 오래 기다렸겠구나 싶다.

황제가 제 얼굴에 손을 댄 탓인지 이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째 그 모습을 보는 게 썩 나쁘지가 않아 황제가 다시 손을 뻗어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이제 당황한 표정은 물론, 동그랗게 커진 눈은 깜빡이지도 못하고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몸이 찬 걸 보니 오래도 기다렸나 보군.”

“…….”

“내가 오늘 이곳을 찾지 않았으면 또 날이 새도록 나를 기다릴 셈이었느냐?”

빗줄기가 약해진 대신 바람은 제법 서늘해졌다. 이런 날씨에 밖에 오래 서 있다간 고뿔에 걸리기 십상이다. 보아하니 걸친 의복도 한여름에나 입는 얇은 옷감이다. 옷을 지어 입을 옷감도 모두 궁 밖에 내다 판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좀 언짢아졌지만 당황한 이설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와 얼마나 사나운 기세로 비은궁까지 걸어왔는지조차 순간 잊고 말았다.

“이리 미련하니, 고뿔에 걸려도 억울하지는 않겠지.”

타박이 분명하지만 황제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이설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바람이 차가웠는지 늘상 하얗던 볼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발갛게 올라왔다. 말을 할 수 있어도 아마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입만 뻥긋거리다 결국 송구하다 머리만 조아렸을 게 뻔하다.

“이만 안으로 들어가지.”

빤히 이설을 바라보던 황제가 안으로 들어갔다. 앞장서 걷자 뒤로 이설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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