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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41)화 (41/300)

달의 황홀경

41화

“평소에는 예서 혼자 뭘 하느냐?”

한 번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황제가 읽고 있던 서책의 표지를 탁 덮었다. 그냥 묻는 질문이 아니다. 대답을 해야 했다.

[서책을 보거나 후원을 손보고 가끔 바느질과 수놓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바느질?”

“…….”

“바느질은 무얼 하러 배우느냐. 옷을 지어 입을 것도 아닌데.”

[금국 여인들의 기본 소양이라 들었]

쓰면서도 아차 싶었다. 지난번에 같은 대답을 하였다가 면박을 당했던 것이 생각났다. 글 쓰던 것을 주춤한 사이 황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여인들의 소양이지 후궁의 소양은 아니니 그만두어라. 네 재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으니.”

역시 일전에 허접하게 만든 주머니를 보았던 게 틀림없다. 그 뒤로도 재주 없는 이 손으로 몇 개의 주머니를 더 만들어 봤지만 더 노력해봐야 손끝에 바늘 상처만 늘 뿐이었다. 이설도 거의 포기하고 있던 차였지만 황제까지 저리 말하니 속상하다.

“쓸 만한 재주는 후원을 가꾸는 것뿐인가 보군. 괜한 짓에 시간 낭비 말고 할 수 있는 것이나 잘하여라.”

후원 가꾸는 솜씨를 칭찬하는 것인지 바느질 솜씨를 비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곱씹어 생각해 봐도 어느 쪽 말에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황제가 서책을 덮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한들 같이 마주 보고 황제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좀 쭈뼛거리다가 이쯤 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싶을 때 다시 책장을 넘겼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황제와 마주 앉아서는 딱히 할 게 없었다. 황제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이설이 붓을 드는 일은 없었다.

질문은 항상 황제가 하고 이설은 대답만 한다.

갑자기 이 사실이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이설은 사나흘 동안 황제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글을 읽는 척, 사실은 공연히 다른 생각만 하다가 결국 펼쳐 놓은 서책을 덮고 옆으로 밀어냈다. 종이 위로 붓을 들자 황제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그때까지도 황제는 이설을 쳐다보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우장절에 무얼 하시며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이 정도 질문은 무난하지 않을까, 다 쓰고도 두어 번을 곱씹고 난 뒤에야 황제에게 종이를 밀었다. 빤히 종이를 들여다본 황제가 흘끔 이설을 쳐다봤다가 다시 종이로 눈길을 돌렸다. 제게 닿았던 눈빛이 날카로워서 흠칫한 이설이 괜한 걸 물었나 후회하였다. 그냥 점심 수라를 들일 때까지 조용히 서책이나 볼걸. 후회가 밀려들어 올 때쯤 황제가 별스럽지 않게 대답했다.

“미뤄 두었던 상소문을 읽거나, 서책을 보거나. 특별한 건 없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무던한 목소리는 전과 비슷하지만 말투는 이전에 들어 본 적 없이 소탈했다.

“지겨운 우장절이지. 수신 따위가 다 뭐라고.”

화홍이 그랬던 것처럼 수신에게 적대심을 단단히 품은 황제가 혼잣말하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금국 사람들은 수신을 미워하는구나. 요즘 금국 역사서를 간간이 읽고 있는 이설이 한 가지를 머릿속에 새겼다.

비 오는 창밖을 슬쩍 쳐다본 황제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무언가 깊게 고민하는 듯 눈동자는 창밖으로 흔들림 없이 고정되었다. 비스듬히 선 고개가 갑자기 빳빳이 세워지며 살짝 찡그린 얼굴이 이설에게 곧게 향했다.

“너희 나라의 시조는 달의 뒤편에서 도망쳐 왔다 들었는데, 맞느냐?”

느닷없는 질문에 이설이 잠시 굳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도망을 친 이유도 알고 있느냐?”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곰곰이 생각해 보던 이설이 붓을 들었다. 누가 재촉한 것도 아닌데 급하게 쓰느라 글씨가 단정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셨다 들었을 뿐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미심쩍은 황제의 표정이 이설을 향했다가 옆으로 옮겨졌다. 제 얘기를 믿지 않는 것인가 싶어 이설이 황급히 글을 적어 황제에게 내밀었다.

[저희 나라의 시조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뿐이라 확실치도 않습니다.]

이설은 제 나라 시조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얘기가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시간이 많이 지나 굵직굵직한 얘기만 몇 가지 전해 들었을 뿐이다. 자신에 대한 기록을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니 그 후손들이 무척 말을 잘 들었나 보다.

황제는 이설이 덧붙여 써 준 글을 보고도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지만 재차 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잠시 같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얼마 안 가 본래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더 있느냐?”

“…….”

“내게 물을 것이 더 있느냐 말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이설에게 황제가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시점에 달리 궁금한 게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기서 고개를 저으면 또 어색한 침묵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이설이 머뭇거리다가 붓을 움직였다.

[태자 전하께서는 강녕히 잘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설이 종이를 돌려 제게 밀어 주기도 전에 황제는 쓰여진 글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우장절에 태자는 제 침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으니 강녕하지 않을 게 없겠지.”

태자의 얘기는 물어서는 안 되는 거였을까.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제가 썼던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옆으로 밀어냈다.

이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황제는 영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태자가 그리 보고 싶더냐?”

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몫의 유밀과를 달라며 뻔뻔하게 손을 내밀거나 글공부가 하기 싫다며 뾰로통한 얼굴로 하얀 볼을 부풀리던 모습들을 못 본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아이란 것이 옆에 있으면 손이 많이 가고 신경을 늘 써야 해 피곤하다가도 곁에 없으면 눈에 밟히는 법이다. 하물며 태자가 저에게 보통 귀엽게 굴었던가. 유밀과값이라며 금파 가락지를 내미는 것부터 여간 어여쁘게 군 게 아니었다.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태자의 의중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다시 만나 얘기를 나눠 보고 싶다. 왜 거짓말을 했는지 같은 건 묻지 않을 테니 앞으로도 종종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마음이 주저 넘게 큰 바람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태자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은 이설이 손가락에 낀 금파 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설의 손을 보던 황제가 불쑥 물었다.

“그 금파 가락지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느냐?”

이설이 고개를 저었다. 가락지를 받으며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듣지 못하였다. 태자가 주었기에 당연히 태자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이리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제 추측이 틀렸던 게 분명하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당황했다.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이설의 표정을 보지 못한 듯 황제가 무심한 어투로 자답했다.

“태자를 낳아 준 생모의 유품이다. 선황의 황후였던 혜서 황후지.”

“…….”

“…네게 알현을 요청하였던 손조익의 여식이기도 하다.”

이 얘기는 별로 꺼내고 싶지 않았는지 손조익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황제가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가 곧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설은 황제의 기분과는 별개로 깜짝 놀라 가락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그 귀한 것을 왜 네게 주었는지 모르겠구나.”

못다 피운 꽃봉오리를 머금은 금파 가락지이니 그 자체로도 가치가 뛰어난 물건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래서 태자의 신분을 알고 나서 그럭저럭 납득한 걸지도 모르겠다. 태자라면 이 정도 귀한 물건은 가질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설마하니 생모가 유품으로 남긴 것일 줄이야. 태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출처를 안 이상 함부로 손가락에 끼고 다닐 수는 없다. 황제가 일부러 언질을 주는 것도 자신에게는 과분한 물건이라 눈치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천천히 가락지를 돌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빼내었을 때였다. 이설이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보던 황제가 말했다.

“그러니 잃어버리지 말고 잘 끼고 다니거라.”

“…….”

“잘 끼고 다니거라.”

슬금슬금 가락지를 빼던 손이 멈췄다. 잘 끼고 다니거라. 두 번이나 강조하는 말이 이설을 멈칫하게 했다. 티도 안 날 만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락지를 다시 손가락 안으로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황제의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손으로 덮어 손가락 위를 가렸다.

이설에게서 눈을 돌린 황제가 멀리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수라를 들 때구나.”

끼니때가 아직 아닌 것 같은데. 날씨가 흐려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조반을 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설의 생각을 읽었는지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네가 여태껏 조는 바람에 끼니때를 놓쳤다. 지금 해가 어디까지 떠올랐는지 아느냐?”

비가 쏟아지는 황궁은 이른 아침에도 날이 밝지 않고 종일 우중충하기 때문에 해의 위치로 시간 때를 헤아리기 어렵다.

아침에 억지로 먹은 묽은 죽이 아직 배에서 소화도 다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점심 수라를 들 때라니. 도대체 황제 앞에서 얼마나 길게 졸았던 건지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황제와 마주한 동안 입꼬리 올라가는 걸 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인데 며칠 동안 황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웃은 것을 세어 보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웃음은 대부분 지금과 같은 실소와 조소였다.

이설에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황제가 궁인을 들여 수라를 준비하라 일렀다. 정말 끼니때가 맞았는지, 궁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음식들을 가져왔다.

기운을 회복하려면 이제 죽보다 쌀밥을 먹어야 한다며 제 몫으로 놓인 흰 쌀밥 그릇을 보고 이설은 기함을 토했다. 건강하던 시절의 이설도 이 밥 한 공기면 하루 세끼를 나눠 먹을 수 있었다. 금국인들이 ‘아프고 힘없을 때는 무조건 많이 먹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했다. 차라리 내일 조반까지 먹으라고 이렇게 내어 준 것이면 이해를 하겠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마마?”

당황하여 쳐다보는 이설에게 낯선 궁녀가 물었다. 태금궁의 궁녀다. 비은궁의 궁녀들이 식사 준비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고봉으로 퍼 담은 쌀밥을 내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도 못 하는데 붓까지 들어 밥이 너무 많다 투정 부릴 수 없는 이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울상이 된 이설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궁녀가 나가려 할 때였다. 탁자 위에 놓인 음식들을 하나하나 훑어본 황제가 궁녀를 불러 세웠다. 자신을 부르는 것도 아닌데 황제의 서늘한 목소리에 긴장한 것과 달리 궁녀는 으레 들어왔던 목소리인 듯 차분히 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내온 음식은 이게 전부인가.”

“예, 폐하.”

“고작 이게 다라 이 말이지?”

“……예, 폐하.”

숨 한 번 내 쉴 수 있는 정도의 짧은 시간의 침묵이 있긴 했지만 이번에도 궁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이설이었다.

“음식들은 모두 비은궁 궁녀들이 준비하는 것이냐 아니면 소주방(燒廚房:궁 안의 음식을 만드는 곳)에서 가져오는 것이냐.”

“비은궁에서 직접 준비한 것입니다.”

“이만 나가서 비은궁 궁녀들을 모두 불러오라.”

느닷없는 명에도 토를 달거나 의문스러운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은 궁녀는 예 폐하, 하고 대답한 뒤 나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아서도 황제는 숟가락에 손끝조차 대지 않고 탁자 위만 흉흉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설도 덩달아 탁자 위에 손도 올리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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