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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40)화 (40/300)

달의 황홀경

40화

우장절이 시작된 이후 궁인들이 각 처소로 오가는 걸음이 뜸해 소문이 그리 빨리 돌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황제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황궁에 파다하게 퍼졌나 보다. 그것도 하필 저런 식으로 전해지니 황제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게 이해가 된다. 목소리며 표정이며, 크게 노여워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지만, 드러나지 않는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붓을 들고서도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글을 썼다.

[애초에 저를 쫓는 자들 때문에 폐하께서 다치신 거니, 모두 제 탓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리 대답하였다. 너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다친 것이라고.”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은 말에 이설이 금세 의기소침해졌다. 글 몇 자 더 적는다고 황제가 자신을 용서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빈 종이를 당겼다. 붓을 막 들기 직전이었다.

“허나 너를 황궁에 데려온 것 또한 나지.”

“…….”

“서로에게 빚진 것으로 해 둘 테니 네 책임이라 책망하지 말거라.”

“…….”

“또한 네가 내 목숨을 살렸다는 것도 사실이니 이 공에 대한 보상도 내리겠다.”

“…….”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청하여라. 후일에 면책권으로 사용해도 좋다.”

얌전히 황제의 말을 듣던 이설이 뜻밖의 선처에 놀라 손에 쥔 붓을 놓쳤다.

“나와 태자, 그리고 이 금국에 위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무슨 청을 하든 한 가지는 반드시 들어주겠다 내 약조하마.”

황제는 자신에게 농을 하지 않는다. 황제의 표정을 봐도, 목소리를 들어도 가벼이 농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서로 간에 말없이 빤히 쳐다보기를 잠깐. 이설이 다시 붓을 집어 들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저희가 서로 빚진 것이라면 어찌 저에게 그런 귀한 것을 약조하십니까. 폐하의 부상은 모두 제 탓입니다. 저를 책망하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황은이 망극합니다. 저 또한 폐하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폐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날 살아서 나덕산을 내려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약조는 부디 거두]

아직 끝맺지 못한 글이 남았는데 황제가 종이를 휙 당겨 가져갔다. 긴 시간 적었던 정성에 비해 황제가 글을 읽는 데는 고작 이설이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 읽은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황제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긴 고민을 하게 만들 만한 글은 아니었는데. 붓을 만지작거리며 이설이 조용히 황제를 기다렸다.

“그럼 너도 약조 하나 하거라.”

창밖을 바라보며 황제가 말했다. 무슨 약조를 말하시는 것인지, 바로 물을 수 없어 답답하던 찰나 황제가 이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내가 너에게 명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

“황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황명 따위야 어기고 죽음으로 사죄하면 그만이겠지만 이 약조는 죽음으로도 깰 수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들어주겠다 약조하거라.”

왜 갑자기 이런 약조를 해야 하는 건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동자만 좌우로 움직이는 걸 황제도 분명히 보고 있을 것이다. 황제가 저렇게 강경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설은 황제가 말하는 것은 황명이든 청이든 거절할 생각이 없다. 이설은 그저 제게 쥐여 주는 보상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그날 나덕산에서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황제가 저렇게 다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황제가 책망조차 하지 않으니 그게 더 불안했다.

“침묵은 긍정인 것이냐?”

대답을 재촉하는 황제에게 이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연국의 왕족들은 달을 등지고 맹세한 약속은 절대 깨지 않는다지?”

지난번 나덕산에서 만났을 때 연국의 시조가 달의 뒤편에서 도망쳐 내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신기하다 생각했었는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이설이 놀란 눈이 긍정을 대답했다.

“달을 등지고 맹세하겠느냐? 언젠가 내가 한 가지 청을 하거든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이설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붓을 꽉 쥐었다. 이전보다 더 신중하게, 정성을 들인 글씨로 종이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다. 다른 것들보다 곱절로 시간이 걸려 쓴 글을 황제에게 건넸다. 몇 번을 곱씹어 읽는지 황제가 한참 만에야 탁자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으로 밀어내는 대신 몇 번 접어 작게 만든 뒤 품에 넣었다.

“그럼 우리가 서로 진 빚은 이렇게 갚는 걸로 하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제의 손해인 것 같다. 황명으로 내리는 말을 자신이 거역할 리가 없는데.

꺼림칙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설을 슬쩍 쳐다볼 뿐 황제는 별말이 없었다. 이제 슬슬 태금궁으로 돌아가실까 싶어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기다리는데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처음에는 이설을 지긋이 보는가 싶더니 지금은 창밖에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본다.

불편하신 게 있는지, 달리 더 할 말이 남았는지, 자신에게 뭘 바라는 게 있는지, 이런 적막에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어 답답하다. 할 말이 있을 때마다 붓을 들어 글을 쓰는 것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별수 있겠나 싶다. 자신은 눈치가 썩 빠른 편이 아니니 황제를 바라만 보고 있다고 해서 그 속마음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없다. 직접 묻는 수밖에는. 그래서 내려놓았던 붓을 다시 들었는데, 그제야 황제가 고개를 제게로 돌렸다. 종이에 실수로 떨어뜨린 먹물 한 방울이 번지는 것과 동시에 황제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가 조금 전보다 더 많이 오는구나.”

“…….”

“점심 수라는 이곳에서 들어야겠다.”

*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

아,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서책이었구나.

이것은 서책……,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서책을 읽고 있었지…?

“이제 깼느냐?”

“…….”

“내 살다 살다 앉은 자세로 그리 단잠을 자는 이는 처음 보았다.”

의자에 앉아 서책만 멍하니 들여다보던 이설이 어느 순간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간신히 뜨자 맞은편에 앉은 이의 책망 어린 소리를 들었다. 꾸벅꾸벅 졸던 고개가 탁자 아래로 쿵 떨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눈을 비벼 졸음을 쫓는 사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애꿎은 책장만 한꺼번에 휘리릭 넘겨 버렸다.

“읽지도 않은 책장은 뭘 그리 넘기느냐?”

아직 이설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건지 재차 질책하는 목소리에 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황제가 비은궁을 다시 찾아오기 시작한 지 나흘째. 그새 며칠 자주 봤다고 긴장이 풀린 건지 건너편에 황제가 앉아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꾸벅꾸벅 졸다니, 지금 제정신이 맞는가 싶다. 하기야 요 며칠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황제가 찾아와 저녁 수라까지 들고나서야 비은궁을 떠나니, 온종일을 황제와 함께 보내는 그 정신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수라만 들고 떠나시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식사를 마친 황제는 자연스레 차를 들이라 명했고, 차를 마신 후에는 궁녀들이 이설을 위해 가져다 놓은 서책을 펼쳤다. 서책들을 차례로 다 본 후에는 저녁 수라를 들었고, 그 뒤 해가 거의 저물 때쯤이 되어서야 궁을 떠났다. 이설은 그때까지 황제 앞에서 방에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다음 날이 되자 황제는 비슷한 시간에 다시 이설을 찾아왔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보내는 듯했으나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황제는 이제 제 앞에 이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수라를 들라 하기 전 이설에게 배가 고프냐 물었고, 여러 권의 서책 중 읽을 만한 것을 골라 보라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황제는 이따금 이설에게 말을 걸었다. 연국에서는 비가 올 때 무엇을 했느냐 물어 이설이 대답하기 위해 붓을 들자 됐다며 그 대답은 듣지 않았고, 그 뒤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했다.

말투는 여전히 냉랭하고 어쩌다 웃어 주는 것도 조소가 분명하며, 제게 상냥하게 구는 것도 아니니 괜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살얼음판을 기는 듯 무거운 압박감은 한 겹 거둬졌나 싶다.

아니, 전부 핑계다. 그래도 그렇지 황제를 앞에 두고 꾸벅꾸벅 졸다니. 어제 잠을 설친 여파가 이렇게 올 줄 꿈에도 몰랐다.

“태자도 수학 중에 서책을 읽으며 졸지는 않는데, 간밤에 대체 뭘 하였길래 종일 조는 것이냐?”

이제는 태자와 비교까지. 역시 너무 긴장을 놓았다. 짐짓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기가 팍 죽어 책장을 넘기던 손을 허벅지 위에 고이 내려놓았다. 황제의 눈치를 살필 때마다 황제는 어쩐지 심기가 더 불편한 것처럼 보여 이설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 노력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황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지긋이 쳐다볼 때면 마음이 불안해 안절부절못했다.

“나와 있는 것이 눈 뜨고는 참기도 힘들 만큼 지루하더냐?”

깜짝 놀란 이설이 머리를 격하게 좌우로 저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입 모양으로 ‘아닙니다, 폐하’를 두 번씩이나 반복했다. 졸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잠이 순식간에 확 달아났다.

“그게 아니라면 아침부터 지금까지 거기 앉아 종일 조는 이유가 무엇이냐?”

“…….”

“대답을 들으려 묻는 것이다.”

기운 없이 모시기는 했지만 아침부터 내내 이렇게 졸지는 않았다. 황제의 과장이 좀 지나치다 싶었다.

대답을 들으려 묻는 것이라기에 별수 없이 붓을 들었다.

[새벽 일찍 잠에서 깬 뒤로 다시 잠들지 못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송구한 짓인지 알기는 하니 다행이구나.”

황제도 자신과 마주 앉아 있는 이가 꾸벅꾸벅 조는 건 처음 보았을 거다. 제정신이고서야 황제 앞에 앉아 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설도 사실 조금은 억울하다. 비은궁은 자신의 궁이니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마음 편히, 몸 편히 쉬고 싶은데 황제가 함께 있으니 기지개 한번 크게 켜 보지도 못한다. 자신도 이 정도인데 궁녀들은 오죽할까. 복도를 부산스럽게 누비는 발소리는 사라졌고, 차나 수라상을 들이는 아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잔뜩 긴장하여 손을 벌벌 떠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황제가 찾아오는 게 싫다는 건 아니다. 다만 황제가 조금만, 지금보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편해졌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아…, 요 며칠 정말 정신이 이상해지고 긴장이 풀리긴 했나 보다.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걸 바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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