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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39)화 (39/300)

달의 황홀경

39화

서늘한 바람이 불며 이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지나갔다. 길게 푼 머리가 연국을 떠날 때보다 훨씬 길게 자라 있다. 이설은 머리가 무척 빨리 자라는 편이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머리를 잘랐던 것 같은데 금국에 와서는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다. 긴 머리의 불편함을 참다못해 주 상궁에게 머리를 좀 자르고 싶다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단호했다.

‘폐하의 허락 없이는 마마의 존체 어느 곳에도 손끝 하나 댈 수 없습니다.’

자신이 머리카락을 자르든 말든 황제는 아무런 상관도 안 할 텐데 그런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시무룩해진 이설이 몇 번 더 말해 보았지만 주 상궁은 틈도 주지 않고 거절했다. 덕분에 그대로 방치한 머리카락이 어깨를 한참 넘겨 자랐다. 신이 난 건 궁녀들이다. 아름답다 소란을 떨며 이설의 머리를 손질해 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이설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아이들이 궁 청소하는 것을 돕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몸을 움직이면 적어도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는 않을 테니. 이를테면 하염없이 황제를 기다리는 일이라든가…….

막 침소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손만 뻗었을 뿐 아직 닿지도 않은 장지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어딜 가려던 참이냐.”

문을 열면 텅 빈 복도가 나왔어야 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앞이 가로막힌 것에 당황해 멈칫하는 사이 무심한 목소리를 들었다. 놀라 뒷걸음질을 치자 마주한 광경이 무엇인지 한눈에 들어왔다.

“어딜 가려던 참이냐 물었……,”

“…….”

“……목소리는 아직인 것이냐?”

황제였다. 어제 하루 종일 기다려도 오지 않던 황제가 왜 이 늦은 아침에 기별도 없이 찾아왔을까. 것보다 이설은 제 옷매무새를 훑어보며 적잖이 당황하였다. 내내 침상에 누워만 있어 침의도 갈아입지 않은 차림새였다. 이 꼴을 하고 황제를 맞다니.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기도 전에 황제가 이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급한 것이라면 다녀오너라. 내가 기다릴 테니.”

“…….”

“너도 어제 나를 내내 기다렸을 테니, 한 번쯤은 나도 기다려 주지.”

항상 앉던 자리에 앉은 황제가 이설을 바라봤다. 선 자리에서 겨우 몸만 돌린 이설은 아직도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급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리 와 앉거라.”

이설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그제야 정신이 든 이설이 황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권한대로 황제의 앞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하필 모두 소제 일에 바빠 아무도 황제의 걸음을 알리지 않은 것에 절망했다.

“다리는 이제 다 나았나 보군.”

이설이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 황제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의시에서 의녀와 어의가 왔다. 이설의 눈치를 잔뜩 살피며 헐레벌떡 들어오는 두 사람을 주 상궁이 싸늘한 태도로 맞았었다. 싸해진 분위기에 잠시 의아했지만, 침상 가까이 선 화홍이 ‘그리 연통을 넣어도 그림자도 한번 안 내비치더니 이제 와서 올 건 또 뭐람’이라며 투덜거리는 말에 대충 사정을 눈치챘다.

“손은 어떠하냐. 이제 글 정도는 쓸 수 있겠느냐?”

황제의 말에 끝나기가 무섭게 이설이 양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자잘한 상처는 여전하지만 크게 모난 곳 없는 손을 보고 황제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설은 황제와 눈이 마주친 뒤 고개를 짧게 까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세워진 문갑을 급하게 뒤지더니 그 안에서 잘 접힌 종이 몇 장을 가지고 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깐 황제의 눈치를 살피고는 그중 한 장을 황제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전부 나에게 쓴 것이냐?”

이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가 손끝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리 모두 건네거라.”

어차피 모두 황제가 읽으라 적은 것들인데 막상 한꺼번에 건네자니 좀 망설여진다. 당장 내놓으라 경을 칠 줄 알았던 황제는 별말 없이 먼저 받은 종이를 펼쳐 들었다. 아직 오른손이 불편할 때 적은 글이라 삐뚤빼뚤 글씨가 부끄러워도 별수 없다. 나머지 종이들도 조용히 황제 쪽으로 밀어 건넸다.

황제가 제가 쓴 글을 읽는 동안 이설은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그래도 아직 왼팔을 쓰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걸 보니 괜히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의복에 가려진 왼쪽 어깨에 머문 시선이 자연스레 팔을 타고 내려와 손에 닿았다. 종이를 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를 한참. 다른 종이를 향해 뻗는 손을 보고서야 눈치챘다.

황제의 손목을 감싸던 비단 띠가 없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면 적힌 이름도 읽어 낼 수 있을 만큼 손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혹시 실수로 손목을 가리는 것을 잊으신 걸까. 이설이 얼른 시선을 돌려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토록 황제가 숨기고 싶어 하던 것이니, 허락하지 않는다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제 이름이 아니다. 같은 이름일 뿐, 제 것은 아니다. 궁금해하면 안 된다.

“의심되는 바가 정말 아무것도 없느냐?”

이설에게 받은 종이를 모두 읽은 듯 황제가 물었다. 이설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을 노렸고, 내게 활을 쏘고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런데도 짐작되는 바가 전혀 없다 이거지?”

이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글에 쓰인 것이 모두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다.

황제가 제 말을 전부 믿을까.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굳은 표정이 종이 위를 향했다. 네 말은 아무것도 못 믿겠으니 이번 일에 책임을 묻겠다 하면 어쩌지. 그 뒤에 나올 수 있는 모든 말들을 하나씩 떠올려 극형이라는 최악의 지점에 다다랐을 때쯤 황제가 이설을 마주 봤다.

“독초에 의한 중독은 거의 사라졌고 머리앓이는 점차 나아지고 있다. 네가 적어 준 약초 달인 물도 수시로 마시고 있다.”

마주한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우는 이설에게 황제가 말을 이었다.

“어깨의 상처는 심각한 것이 아니니 곧 나을 거라더군. 네 목소리가 나올 때쯤이면 나도 다시 활을 잡을 수 있겠지.”

“…….”

“또한 네 말대로 황궁에 내부 첩자가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으나 그건 네가 나설 소관은 아니다.”

“…….”

“네 물음에 모두 답하였다.”

황제의 긴 대답을 멍하니 들으며 이설은 큰 눈만 깜빡였다. 황제의 옥체에 대한 염려를 잔뜩 써 놓은 것들을 모두 무시할 줄 알았는데, 무심한 어투로 대답하는 것들은 모두 이설이 종이에 적어 놓은 질문에 대한 것들이었다. 옆으로 삐뚜름하게 기운 고개가 더 밑으로 내려갔다.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침착하려 애쓰는데 그게 잘되지가 않는다.

“더 물을 것이 남았느냐?”

이설은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이런 것을 먼저 묻는 것이 낯설었다.

탁자에 널려진 종이들을 천천히 옆으로 밀어낸 황제가 의자를 탁자에 더 바짝 당겨 앉았다.

“태자가 너를 만나 보고 싶어 한다던데.”

황제의 거리가 한 뼘쯤 더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몸이 더 긴장했다. 난데없이 꺼내는 태자 얘기에 이설은 어깨를 움찔했다.

“해도원 말이다.”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는 것을, 태자가 누구길래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의아해하는 것으로 착각했나 보다. 굳이 해도원이라는 이름을 올려 짚어 주는 것에 이설은 마음이 불편해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던 황제가 그 마음을 지레짐작했다.

“만나고 싶지 않다면 만나지 않아도 좋다. 태자에게 그리 전하지.”

당황한 이설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황제에게 이렇게 격한 부정의 몸짓을 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가만히 있던 손까지 덩달아 흔들어 대니 모습 참 경박스럽겠구나 싶었다. 이설이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황제는 뭘 단단히 착각했는지 그 앞에 대고 말한다.

“그럼 태자에게 네가 거절하였다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겠다.”

얼굴이 더 사색이 된 이설은 가로젓던 고개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살피더니 협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품에 한 아름 안고 돌아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종이와 붓 따위의 것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황제를 한번 쳐다보자, 뜻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하길래 다급하게 글을 적어 내려갔다.

[태자 전하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말보다 오래 걸린다. 길게 쓸수록 기다리는 사람이 답답해진다는 것을 이틀 시간 동안 알게 됐다. 황제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말만 최대한 간결하게 적어 황제에게 내밀었다.

“네게 신분을 속이고 거짓을 고했는데, 그래도 정말 태자를 다시 만나 보고 싶다고?”

“…….”

“다시 만날 때 태자는 네가 알던 종학 태감의 장자 해도원이 아니라 태자 해도원일 것인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

“……네가 아직 태자 해도원을 못 만나 봤으니 태평히 고개만 끄덕이는구나.”

조소하는 황제가 허락하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허락은 의외로 쉬이 얻었다.

“그래, 어디 한번 만나 보거라. 우장절이 끝나고 네 목소리가 돌아오는 대로 태자에게 전하겠다.”

안도의 숨을 너무 길게 내쉰 탓일까, 쌓여 있던 종이가 긴 숨에 펄럭였다. 민망함에 큼큼, 헛기침을 하며 황제의 눈치를 봤지만 황제는 별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황제는 할 말을 다 한 듯 이설의 침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황제가 이곳에 와서 곧잘 하는 행동이었다. 궁 안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이설이 입궁했을 때부터 있던 물건들이라 낡고 오래된 것들이 많다. 얼핏 봐도 좋은 것들은 하나 없어 황제가 이렇게 둘러볼 때마다 괜히 면구스러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보통 때 같았으면 대충 둘러보고 혀나 한번 쯧, 차고 말았을 것을 오늘따라 황제의 시선 닿는 곳이 많았다. 이전과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는데. 굳이 있다면, 금박으로 겉을 두른 큰 자개함 두어 개를 궁밖에 내다 팔긴 했지만 황제가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대놓고 혀를 차지는 않아도 썩 마음에 드는 구석을 찾지 못한 게 분명한 황제는 표정이 더 좋지 못했다. 그 얼굴 못지않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

“궁의 모두가 그리 떠들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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