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38화
이제 보니 소운도 혜서 황후 못지않게 옛날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잘하는 것 같다. 언뜻 혜서 황후의 살아생전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소운에게서 스쳐 지나가는 혜서 황후의 흔적을 털어 내며 황제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바로 조금 전에 했던 자신의 생각은 틀렸다. 선대 왕과 자신은 완전히 다르다. 황제는 이설이 너무 아깝고 애틋하여 비은궁에 숨겨 둔 것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눈에 띄지 않게 쥐죽은 듯이 살라고 비은궁을 하사한 것이었다.
연국에서 온 두 사내 후궁이 삼백여 년의 시간을 지나 차례로 비은궁을 하사받았으나 그 이유가 극명히 달랐다. 원 귀비는 선대 왕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백년해로하였지만 이설은 황제 자신에게 무시와 괄시를 받으며 점점 불행해지고 있다. 제 손에 달린 이설의 팔자는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또한 천명인 것 같습니다. 원 귀비 마마 이후로 비은궁은 내내 빈 궁이었는데, 삼백 년 만에 다시 그 주인 되신 분이 마마의 먼 후손이신 루 소의……,”
“너는 어찌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냐?”
황제는 보통 소운의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말을 하는 소운은 차란과 달리 듣는 이의 기분을 헤아릴 줄 아는 기본 예의가 있었다. 아는 것이 많아 무엇을 듣든 해가 되는 것이 없어 무얼 얘기해도 가만히 듣기만 하던 황제였는데, 오늘 주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몰랐으면 싶은 얘기를 더 듣고 싶지가 않아 말을 끊었다.
“황궁 서고에만 가도 원 귀비 마마에 관한 기록이 무척 많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모두 읽었느냐?”
“예, 모두 읽어 두면 도움이 되는 것들이니까요.”
하기야 소운은 황궁 서고에 출입이 가능한 시절부터 매일같이 그곳에 살았다. 어느 날 발길이 뜸해졌길래 이제 서책에 흥미를 잃었냐 물었더니, 서고에 있는 모든 서책을 읽어 더 이상 읽을 것이 없다 시무룩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이 황제가 되자마자 소운에게 황족만 사용 가능한 최금서(催昑曙) 출입을 허락하였다.
“폐하께서도 재미있게 읽으실 서책들이 많습니다. 원하시면 몇 권 권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신당 무녀가 말하기를, 올해 우장절은 평년보다 더 길 것이라고 합니다. 지루한 시간, 서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보니 네가 태자뿐만 아니라 태의와 윤 내관의 청까지 내게 전하러 온 것이로구나.”
“…….”
“서책 따위 읽지 않아도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 회복을 더디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 말라 전하거라. 우장절에는 나도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
그제 밤부터 방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뭘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운의 말이라면 듣는 척이라도 하는 황제인 걸 알고 일부러 소운에게 귀띔한 것일 게다. 두 노인네의 쓸데없는 노파심이다.
이틀 밤 동안 잠을 설친 황제가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새벽잠에서 깬 뒤로 다시 잠들지 못해 여태껏 뜬 눈이었다. 오수라도 들면 좋으련만 피곤하기만 할 뿐 잠이 오지는 않는다.
“몸이 아직 편치 않으신가 봅니다, 폐하.”
“잠을 설쳐 그런 것 같구나.”
“아직도 새벽잠에 깨어나십니까?”
황제는 대답지 않고 고개만 가만히 끄덕였다가, 태의에게 일러 다른 탕약을 드셔 보시는 게 어떠시냐 소운이 조심스레 묻자 다시 고개를 저었다.
“탕약 따위가 낫게 할 것이 아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 잠을 설치는 것이냐 묻는 것에 황제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눈가를 만지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왼쪽 손목을 가볍게 감싸 쥐며 소운을 바라봤다.
“꿈 때문이다.”
“……꿈이요?”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다. 몇 날 며칠 이어질 때도 있고, 사나흘에 한 번씩 꿀 때도 있지만 모두 같은 꿈인 것에는 변함이 없더구나.”
“어제도 그 꿈을 꾸셨습니까?”
“뭐…, 그런 셈이지.”
며칠 안 꾸는가 싶더니 그제와 어젯밤에도 또 같은 꿈을 꾼 황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새벽잠에서 깨어났다. 끔찍한 악몽도 아닌데, 그 꿈만 꿨다 하면 얼마 못 가 잠에서 깨 다시 잠들지 못하기를 벌써 몇 번째. 날 수로 헤아리자면 몇 달도 더 전부터다. 정확히는 이설의 이름을 새기기 바로 닷새 전. 그 이후로 주기는 불규칙하지만 잊을 만하면 다시 같은 꿈을 꾼다.
이전의 것들과 조금 다른 내용의 꿈을 꾼 적도 있다. 같은 배경, 같은 사람이 나왔지만 황제는 지난 꿈과는 다르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른 새벽 눈을 뜬 뒤 제 왼쪽 손목에 새겨진 이름을 발견하였다.
그 뒤로 황제는 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홀로 그곳에 가만히 서서 꿈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저 관조한다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러면 곧 정신이 몽롱해지고 눈을 떠 보면 제 침소였다. 밖은 아직 푸른 새벽이고, 눈을 감아도 다시 잠은 오지 않는다.
어제와 그제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 같다 말하지 않는 것은, 기억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황제의 말을 들으며 소운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폐하의 옥체가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황제가 피식 웃으며 소운의 눈과 마주했다.
“걱정 말거라. 태자가 지학(志學:열다섯 살)에 올라 내 뒤를 이어 제좌에 앉게 되는 날까지 성심성의껏 옥체 보존할 테니. 그래야 네 출셋길도 훤하지 않겠느냐?”
가벼운 농이었는데 소운은 역시나 웃지 않았다. 넉살 좋고 뻔뻔한 차란 같았으면 감사하다 넙죽 절이라도 했을 텐데 소운은 뭐가 그리 뻣뻣한지 이런 농에 한 번 웃어 주지를 않는다. 황제가 이렇게 편히 얘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데, 그중 반응이 가장 무뚝뚝하다. 무정하다 소문난 태자도 이보다는 말이 통했다.
황제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소운은 고집스럽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저리 뻣뻣하니 가진 거라고는 세 치 혀밖에 없는 차란도 말 한마디 못 걸고 전전긍긍을 하는 게지.
“농이었다. 표정 풀고 이만 나가 보아라.”
“송구합니다. ……나갈 채비를 하시는 겁니까?”
먼저 일어난 황제가 몸에 걸친 의복을 훌렁 벗어 침상 위로 던졌다. 뒤따라 일어난 소운이 묻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이 있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습니다. 급한 게 아니시면 바람이라도 멎었을 때 가시지요.”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 조금 전보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하늘에서 누가 바가지로 물을 붓기라도 하는 듯하다. 이런 기세로 오는 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약해질 것이라는 걸 안다. 점심 수라를 든 이후에나 가볼까 싶어 잠시 자리에 멈춰 선 황제가 이내 마음을 굳혔다.
“어제 들르겠다 약조하였으니 이미 늦은 셈이야. 내 걱정 말고, 소운 네 길이나 조심하거라. 아니면 내실에 들러 차라도 한 잔 더 하고 가도 되겠구나.”
영 걱정스러운 표정을 면치 못하는 소운이 인사 후 침소를 나갔다. 아마 내실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소봉궁에 태자를 만나러 갈 것이다. 청을 모두 거절하였으니 태자도 우장절 내내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만 저지른 잘못에 마땅히 벌은 받아야 하므로 그것이 불공정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가 침소 밖 윤 내관과 궁인들을 불러들였다. 의복을 입혀 주던 궁녀 하나가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비단 끈을 황제 손목에 가져다 댔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는 살에 닿는 비단 감촉을 느끼자마자 손을 휘이 저었다.
“……그냥 두어라.”
옷을 입히던 궁녀들끼리 서로 의아한 눈짓으로 주고받는 것을 보았지만 못 본 척 넘어갔다. 앞으로 궁녀들도 이 허전한 손목에 익숙해질 것이다.
느슨한 옷차림에 장포를 어깨에 걸친 황제가 침소 문 앞에 섰다. 아직 어디로 황제를 모셔야 하는지 모르는 윤 내관이 조심스레 그 행선지를 물으려 했으나 황제가 더 빨랐다.
“연이설의 궁으로 간다.”
*
지루하다.
침상에 앉아 멍하니 침소를 둘러보며 이설이 속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지루하다. 어찌 하루가 이렇게 지루할까. 하루 종일 침소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서책을 보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전할 말을 미리 종이에 써 놓는 것뿐이다.
그나마 바느질은 오래 할 것이 못 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암만해도 늘지 않는 것을 보니 이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게 나을 성싶다. 그래도 수를 놓는 것은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평이 있어 아무것도 할 게 없을 때에 한두 번 해 보았다.
무엇을 해도 시간은 더디게만 흐른다. 침상에 꼼짝없이 누워 지낸 지 겨우 사흘째. 그나마 다리와 손에 상처가 거의 아물어서 궁 안을 돌아다니거나 붓을 드는 것에는 무리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말은 할 수 없고, 비가 쏟아지는 밖은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제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아도 혼자 걸을 수 있으니 앞뜰과 후원이라도 둘러봐야겠다던 생각이 쏙 들어갔다. 어제보다 훨씬 더 거센 비가 아침부터 쏟아지니, 하릴없이 창밖만 바라볼 수밖에.
“마마, 기연 님과 화홍이가 궁 밖에서 꿀떡을 잔뜩 사 왔습니다. 좀 가져다드릴까요?”
빗소리가 요란해 기별 소리를 잘 듣지 못했나 보다. 인기척에 놀라 돌아보니 연화가 와 있었다. 이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연화가 기운 없이 돌아섰다. 사람은 뭘 먹어야 기운이 난다는 생각을 가진 아이들은 틈만 나면 이설에게 먹을 권했지만 이설은 끼니때 먹는 묽은 죽 말고는 그다지 입맛에 당기는 게 없었다.
다 읽은 책을 다시 보려고 들었다가 흥미가 생기지 않아 도로 덮었다. 서책을 멀리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따라 서책을 읽는 것도 싫다. 어제는 종일 뭘 하였더라. 어제는……
어제는 종일 황제를 기다렸다.
오겠다 하셨으니 오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귀만 쫑긋 밖을 향해 세우고 언제쯤 황제가 찾아오시나 그것만 기다렸다. 차를 드실까 싶어 중치모당귀 달인 물도 준비해 놓고 기다린 지 반나절.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밖을 보며 이설은 쓴웃음을 지었다. 황제는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