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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37)화 (37/300)

달의 황홀경

37화

소운은 잠시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까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손에 쥔 수파만 만지작거렸다. 불필요한 감정을 숨기는 것이 그 누구와 달리 무척 뛰어나지만 손버릇만은 같은 손을 가진 듯 똑같았다.

어차피 기다려도 소운이 먼저 그러하겠다 대답하지는 않을 것 같아 황제가 화제를 돌렸다.

“태자의 궁에는 들러 봤느냐.”

“예, 그렇지 않아도 그곳에서 오는 길입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모습을 보고 황제가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이제 보니 내 걱정이 아니라 태자의 청을 전하러 온 것이로구나.”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젓는 소운은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태자가 매사에 그리 태연자약한 것이 어렸을 때부터 소운의 손에 자라다시피 하여 그런 것인가 생각이 들 만큼 소운은 감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입을 다물고 목각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 속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옥체를 무척 걱정하고 계십니다. 부디 금제령을 풀어 태자 전하께서 태금궁에 걸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불허한다.”

“폐하…….”

“내 꼴을 보아라.”

황제가 왼쪽 어깨에 걸친 의복을 손으로 툭 걷어치웠다. 어깨 아래 팔부터 가슴께까지 두루 감은 무명천의 범위가 넓었다. 당사자는 괜찮다 해도 남들이 보기에 그렇지 않은 게 문제였다. 내내 무표정이던 소운도 그 모습을 보고 한쪽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이 꼴을 직접 본다고 태자가 걱정을 덜 것 같으냐?”

“…….”

“금제령은 예정대로 우장절이 끝나고 풀 것이다.”

태자에게는 고뿔에 걸려 기침하는 것조차도 보여 준 적이 없다.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몸 상태를 보여 줄 생각은 전혀 없다.

황제의 말에 토를 다는 일이 없는 소운은 더 이상 이 문제를 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고도 아직 할 말이 남은 눈치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소운은 황제를 답답하게 만들지 않는다. 잠깐 고민하는 듯하기는 했지만 해야 할 말을 뒤로 미루지는 않았다.

“또한 태자 전하께서 비은궁의 루 소의 마마를 만나 뵙고자 하십니다.”

소운이 나름대로 어렵게 꺼낸 말치고는 크게 놀랍지가 않았다. 태자가 이설에게 이상할 정도로 남다른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선처를 부탁하며 부복을 하고, 뒤돌아 나가려던 황제에게 재차 이설의 무고함을 확인시켜 줬던 것을 아직 기억한다. 친부였던 선황을 닮아 냉정하고, 저를 보며 큰 탓에 타인에게 무정한 데다 소운의 손에 자란 덕에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한 태자가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설의 무슨 매력이 그런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황궁 천지에서 저에게 사탕발림 아부를 떠는 치들은 거들떠도 안 보는 주제에 왜 하필 이설에게.

“연이설이 목을 다쳐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태자가 알고 있느냐?”

“예, 알고 계십니다.”

태의를 불러 사의시 어의와 의녀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하라 일러야겠다.

“우장절이 끝날 즈음에는 나을 거라 하니, 그 또한 금제령이 풀리면 허락하겠다.”

“…….”

“뭘 그렇게 쳐다보느냐?”

“……태자 전하께서 루 소의 마마를 다시 만나 뵙는 것을 허락하실 줄 몰랐습니다.”

의외라는 듯 반응하는 소운이 그 이유를 물어본다면 별스럽지 않게 대답해 줄 수도 있었다. 태자가 남달리 관심을 갖는 자이니만큼 너그러워지고 싶기도 했고, 그 상대가 이설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을 뿐이다. 황제가 보기에 이설이 적어도 태자에게는 해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직 심성이 고운 것인지 천성이 미련한 것인지는 애매했지만.

하지만 소운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황제도 묻지 않은 것에 먼저 대답해 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궁녀가 들어와 차를 주고 나갔다. 중치모당귀를 달인 물이라던데, 머리앓이에 특출난 효능이 없었다면 입에 대지도 않을 맛이다. 소운에게 먼저 권하자 한 모금 맛을 보고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차란에게는 억지로 한 잔을 다 먹게끔 했는데 소운에게는 그런 심술을 부리고 싶지 않다. 그래도 어제 종일 마신 덕인지 머리 아픈 게 한결 가셔 앞으로 며칠은 더 두고 먹을 생각이다.

찻잔에서 완전히 손을 뗀 소운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됐다. 그게 제 왼쪽 손목이라는 것을, 찻잔을 내려놓고서야 알았다.

“보고 싶으냐?”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무례일 것까지야. 가볍게 웃은 황제가 다시 습관처럼 손목을 만졌다.

“이름을 가리지 않으신 것을 처음 봤습니다.”

“이깟 이름 가린 것이나 가리지 않은 것이나 별 차이가 있겠느냐.”

그제 이설을 만나고 온 뒤로 손목에 묶은 띠를 바로 풀어 버렸다.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갑자기 갑갑하게 느껴져 더 묶고 있기가 싫어졌다. 보통은 소매에 가려져 있고 가까이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이니 일부러 가리고 다닐 필요도 기실 없었다.

“루 소의 마마께서 폐하의 생명의 은인이라 들었습니다.”

차란에게 들은 것이냐, 하고 대번에 물으려다 관뒀다. 그럴 리가 없으니. 입단속은 사의시가 아니라 태금궁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그자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화살을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분을 황궁에 데려오신 건 폐하가 아니십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하는 소운에게 이렇다 할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옅게 웃은 소운이 아직 따뜻한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제 와 드리는 말씀이지만 설마 폐하께서 루 소의 마마께 비은궁을 하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미 차란에게 지겹게 들은 소리를 이제 소운에게까지 들어야 하나 싶어 절로 인상이 굳어졌다. 이제 비은궁이 다른 궁과 견주어도 모자란 것 없이 훌륭하니 그 소리가 쏙 들어가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도 차란은 이설의 처소를 옮겨 달라 몇 번씩이나 간청하곤 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잘 둘러보지 못했지만 마마께서 궁을 잘 가꾸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삼백 년 전에 연국에서 오셨던 비은궁의 첫 주인께서도 지금 비은궁을 보시면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차란처럼 또 듣기 싫은 말을 하면 대번에 말을 잘라 낼 생각이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귀로 흘려보내던 황제가 막 입에 가져가 대려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삼백 년 전 연국에서 온 비은궁의 주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느닷없이 눈빛이 날카로워진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소운은 당황하지 않고 평온히 대답했다.

“비은궁은 삼백여 년 전 연국 출신 후궁 마마를 위해 지어진 궁입니다. 폐하께서 그 사정을 아시고 루 소의 마마께 하사하신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봅니다.”

황궁에 지어진 궁이며 전각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들이 지어진 사정까지 하나하나 낱낱이 알 수 있을까. 애초에 이걸 알고 있는 소운이 더 이상하다.

황제는 이설이 살기 전 비은궁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지금 이설이 가꾸어 놓은 모습을 알면서도, 삼백여 년 전 누군가 그 음습한 곳에서 살았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나무가 온 궁을 가려 햇빛이 들지 않고 담장을 둘러싼 식물 때문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도 어려운 궁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궁의 이름조차 비은(妃隱)궁이다. 왕에게 오죽 미움을 샀으면 숨겨 가둬 버리기 위해 궁을 새로 짓기까지 했을까.

“어지간히도 미움을 샀나 보군.”

“예……?”

“그 후궁 말이다. 일부러 숨겨 가둬 버리기 위해 궁을 새로 짓기까지 했으니, 어지간히도 박대를 당했겠구나.”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황제는 문득 그런 궁임을 뻔히 알면서 이설에게 하사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선대의 왕과 자신은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이 생각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소운이 고개를 저었다. 웃는 얼굴이 마치 태자에게 하듯 다정했다.

“폐하께서는 선대 왕께서 그 후궁 마마가 미워 아무도 못 보게 가둬 놓으셨다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궁까지 새로 지어 가둬 두려……,”

소운과 달리 냉소적인 웃음을 띤 황제가 불현듯 든 생각에 말을 멈추고 미소를 지웠다. 소운은 더 짙게 웃으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선대 왕께서는 그 후궁 마마를 박대하시려 비은궁에 가둬 두신 게 아닙니다.”

“…….”

“한없이 은애하시는 그분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비은궁에 숨겨 두신 거지요.”

소운이 차 맛에 입맛을 쓰게 다셨다가 말을 더했다.

“기록에 따르면 무척이나 총애하셨다 합니다. 금군을 이끌고 연국까지 찾아가 약관에도 이르지 않은 그분을 어르고 달래 모셔 왔다니 상상이나 가십니까. 그리 귀하게 모셔 온 분을 위해 비은궁을 만드신 겁니다. 혹여 고향인 연국을 그리워하실까 따로 후원을 만들어 꽃과 나무를 심으시고, 아무에게도 그분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셔서 담장을 높게 쌓아 나무들로 가려 놓으신 거죠.”

“……그럼 햇빛을 가리는 나무들도 전부……,”

“예, 아마 일부러 잎이 큰 나무들을 빽빽하게 심으신 것일 겁니다. 태양이나 구름조차도 그분을 훔쳐보지 못하게 말입니다.”

“…….”

“비은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깊은 밤 도월소를 비추는 달뿐입니다. 아마 연국인이 달을 신성시 여겼다는 것을 아셨던 모양입니다.”

나긋한 목소리로 전하는 소운의 얘기를 듣다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전에도 이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혜서 황후가 살아 있을 적, 그녀는 금국의 역사서를 소리 내어 읽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아직 젖도 못 뗀 태자를 품에 안고 마치 옛날이야기를 전하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황제는 가끔씩 그 옆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황태제가 되어서도 글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선황의 질책에, 역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귀담아듣지 않고 한 귀로 흘려보냈지만 개중에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황제의 기억이 맞다면 그 후궁이라는 자가 아마……

“그분이 바로 금국 최초로 사내의 몸으로 후궁이 되셨던 원 귀비 마마이십니다. 타국 왕족과 혼인하여 드물게도 함께 백년해로하였다는 연국의 왕족이시기도 합니다.”

그래 원 귀비였다. 이제야 기억이 난다.

그때 태자는 황후의 품에 안겨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꿈결 같은 나긋한 목소리로 얘기를 하던 황후는 원 귀비를 향한 선대 왕의 연심에 무척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잠든 태자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던 황후에게 심드렁히 대꾸했던 게 기억난다.

‘궁에 가둬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연심이라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원 귀비가 비은궁에 유폐되다시피 하여 살았다 여긴 것 같다. 황후는 황제의 오해를 풀어 주지 않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어라 대답을 해 주었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황후를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쓸데없는 말이라 생각해 이 또한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비은궁은 말 그대로 비 마마를 숨겨 두는 궁이라는 뜻이지만, 원귀비 마마의 얘기를 듣고 나면 그 뜻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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