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7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당부가 아닌 경고인 것 역시 안다. 할 말을 다 했다 여겼는지 양 소원은 말의 속도를 올려 앞으로 멀어졌다. 앞서가고 있던 여인 한 명과 나란히 말을 대고 걸으며 큰소리로 함께 웃는 걸 보니 대답도 않고 전방만 주시하던 이설의 태도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황궁에서 후궁들의 암투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이렇게까지 대놓고 견제를 받으니 마음이 좋지 않긴 하다. 평생을 살며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미움을 받아 본 적도 없고, 하대를 당해 본 적도 없었다.
연국 국왕의 아들에서 금국 황제의 후궁으로 격하된 신분 탓인 건지 아니면 그저 상황이 그런 것인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이설은 양 소원이 견제해야 할 만큼 황제와 사적인 정을 나눈 적이 없다. 황궁에 온 지 벌써 석 달이 지났건만 황제와 그 흔한 안부 한 번 주고받아 보지도 못했다.
“저기, 폐하가 보이십니다.”
말 옆에 함께 걷던 화홍이 멀리 앞을 보며 말했다.
얼마 전 이설의 후원에도 왔었던 금군 수십 명의 대열을 지나 그 너머로 말 위에 앉아 있는 황제가 보인다. 항상 반만 묶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오늘은 한 묶음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옆에 함께 말을 타고 있는 수많은 사내들 사이에서도 오직 황제만이 태양을 받는 것처럼 환하게 눈에 띄었다.
멀리 그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이설이 무의식중에 고삐를 세게 당겨 잡아 놀란 말이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울음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 주춤거리자 화홍이 놀라 옆으로 피하고 기연이 말의 목 언저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워워― 괜찮다 괜찮아. ……마마 고삐를 갑자기 당기시면 위험합니다.”
“실수하였다. 화홍아 많이 놀랐느냐?”
“아닙니다. 마마께선 괜찮으십니까?”
“응, 난 괜찮다.”
겨우 진정된 말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고삐를 가볍게 당기자 말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낙마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설도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며 기마에 집중했다. 하지만 자연스레 앞으로 향한 시선이 누군가와 마주치자 다시 허리가 뻣뻣하게 굳어 고삐를 세게 쥐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말도 별 반응 없이 넘어갔다.
흑마 위에 지도를 펼쳐 놓고 앉은 황제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있었지만 이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노라고. 마주한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제는 곧 지도로 시선을 돌렸고, 이설만이 끝까지 황제를 바라봤다.
그날 후원에서 보았던 이후 처음 보는 황제는 여전히 아름다워 감히 바라보는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득 조금 전 양 소원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양 소원은 틀렸다. 나덕산이 정말 제 주인처럼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나 오르기 쉬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는 이설에게 그 어떤 산보다도 오르기 힘든 산이었다.
사냥 대회가 시작되는 산어귀 공터에 모인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개중에는 여인들도 호기로운 기상을 뽐내며 활을 메고 있는 모습들이 보여 이설과 기연은 서로 놀란 시선을 조용히 주고받았다. 주 상궁의 말대로 금국 여인들에게는 기마와 사적이 정말 기본 소양인 것이 맞는 듯 보였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자세가 모두들 이설보다도 훨씬 자연스러웠다. 이설은 아직도 말 위에 앉은 자세가 불편하고 덜그덕 거리며 등을 쳐 대는 전동이 신경 쓰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상 금위군 12명이었습니다. 또한 비은궁의 루 소의 마마, 초간궁의 양 소원 마마, 호새궁의 허 미인 마마, 양찬궁의 우 미인……,”
참가 명단을 읊어 내려가던 내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멀리 황제에게만 넋을 놓고 있던 이설은 제 이름이 불린 줄도 잘 모르고 있었다. 첩지와 봉호를 받은 지 한참이 지났건만 아직도 루 소의라 불리는 것이 어색하여 저를 부르는 건지도 몰라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이름이 불리면 황제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보여야 하는데, 오직 이설만이 황제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세워 든 채였다.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이설에게 향하자 당황한 화홍이 이설의 발목을 꽉 쥐어 잡았다.
“마마, 어서 폐하께 허리를…!”
넋 없이 황제를 쳐다보던 이설은 화홍의 손에 놀라 주위를 살폈다. 모든 이의 눈길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심지어 황제조차도 자신을 보고 있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느낀 내관이 읊어 내리던 것을 멈췄다.
“…아……!”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서야 정신이 돌아온 이설이 황제를 향한 허리를 납작 수그렸다. 이마가 말갈기에 닿고도 한참을 그렇게 있으니 곧 내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래에서, 이만 고개를 드세요, 라는 화홍의 목소리에 천천히 허리를 펴자 황제는 이미 뒤를 돌아서 산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는 자들에 가려 황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이설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혹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사냥을 하러 떠난다. 사냥에 참가하지 않는 자들은 공터 한쪽 천막을 친 곳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화홍의 말에 이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나 보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저쪽 커다란 나무에서 봉오리를 향해 쭉 올라가시면 오솔길이 나옵니다. 그 오솔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럼 커다란 호수가 있단 말이지?”
“예. 연화가 세답방 물이 마르면 그곳에 가서 빨래를 하였다 들었습니다.
빨랫감을 들고 여기 산속까지 올라와 빨래를 해야 하였으니 연화가 세답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리 질색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딱 봐도 길이 험해 보여 아무도 들어서지 않는 곳으로 말의 머리를 돌리자 주위에 몇 안 남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하지만 말리는 이는 없어 이설도 개의치는 않았다.
화홍이 말한 대로 봉오리를 정면에 두고 앞으로 조금 걷자 얼마 안 있어 사람이 오간 흔적이 있는 길이 나왔다. 주변을 살피던 화홍이 이쪽 길이라 안내하며 앞서 걸었다. 산어귀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사람들의 말소리는 멀리 흩어지고 산새 소리와 바닥에 나뭇잎 밟는 소리만 들린다. 기연은 되돌아가는 길을 기억하랴, 주위 경계를 늦추지 않으랴, 이설이 타고 있는 말의 보행을 도우랴 바빠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설은 조금 전 황제와 눈이 마주친 순간을 떠올렸다. 제 이름을 부르는 것도 모르고 골몰히 집중했던 것의 주제는 온통 황제였다. 처음에는 그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홀렸고, 한번 닿은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황제는 아직도 자신에게 화가 났을까. 혹시 자신이 해도원이 태자임을 알고서 먼저 접근했다 오해를 하면 어쩌지. 자신이 황후가 되고 싶어 한다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꼬리의 꼬리를 물며 고민해 봐도 황제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오해만 생각해 낸다. 황제가 찾아와 주기라도 해야 어떤 변명이라도 말할 수 있을 텐데 황제는 더 이상 비은궁에 그림자 한 조각도 비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를 직접 찾아갈 용기도 없다. 이설은 황제를 아름다움으로 추앙하는 한편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마마, 저기 호수가 보입니다.”
앞서 걸어가던 화홍이 손을 흔들며 이설을 불렀다. 빨리 쫓아가려고 말의 속도를 더 내려는데 기연이 말렸다.
치맛자락을 번쩍 들고 뛰기 시작한 화홍을 따라가 보니 곧 물가가 보인다. 연화는 호수가 뭔지 모르는 게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작은 옹달샘이다. 크기를 본 기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설을 올려다봤다. 화홍도 저게 호수인지 옹달샘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물에 손을 담그며 빨리 오라 이설을 재촉했다.
호수든 옹달샘이든 이설이야 상관없는 일이다. 조용한 곳에서 쉴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기연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리고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아 앉았다. 기연은 말에게 물을 먹인 뒤 단단한 나무 기둥에 묶어 놓았다.
“전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거라.”
큰 짐승들이 오가는 곳이 아닌지 기연이 주변을 둘러보러 가고 이설의 옆에는 화홍만이 남았다. 이설은 말에 얹어 가져온 서책 중 한 권을 꺼내왔다. 나무에 햇빛이 가려 좀 어둡기는 하지만 글자를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책을 펼친 이설을 보며 화홍이 투덜거렸다.
“입궁 후 처음 나오신 나들이인데 마마는 즐겁지도 않으십니까? 이리 오셔서 물에 손이라도 담가 보셔요. 무척 시원합니다.”
“어제 다 못 읽은 서책이 있다. 내일 가져다줘야 하니, 빨리 다 읽어야 하지 않겠니.”
“서고 관리들이 하는 말을 다 들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루 이틀 늦게 돌려줘도 아무 상관 없는걸요.”
볼을 볼록하게 내민 화홍이 툴툴거리며 작은 조약돌을 물 위로 던졌다. 물이 맑아 고기들이 달아나는 게 훤히 보인다. 물고기들이 놀라니 그러지 말라 하니 배시시 웃으며 네, 하고 얌전히 대답한다.
“우장절이 시작되면 원치 않으셔도 침전에서 종일 서책만 읽으셔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서책일랑 다 내려놓으셔요.”
그 말에 이설이 생각난 듯 화홍에게 물었다.
“우장절이 곧 시작된다 들었는데,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 아느냐?”
“매년 사냥 대회가 끝나고 사나흘쯤 후에 시작됩니다. 길게는 보름 정도 이어질 때도 있으나 보통 열흘 정도 지속되고요.”
“생각보다 짧긴 하구나.”
“짧다뇨, 마마. 하루 온종일 비가 쏟아지는 날이 열흘이나 계속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끔찍합니다.”
이설이 보기에 금국인들은 비가 오는 날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설이 금국에 와서 딱 한 번 늦은 밤 이슬비가 내린 적이 있었는데, 자다 일어나 창밖을 구경하는 이설을 본 주 상궁이 무척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이리 극단적으로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은 수도인 주안뿐이고 다른 지역은 그래도 농사지을 수 있을 만큼은 비가 내린다는데, 왜 이렇게까지 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 묻자 화홍이 음, 하고 말을 끌다 대답한다.
“아마 전설 때문이겠지요.”
“전설?”
“본래 이곳 금국은 수신(水神) 유서원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양의 불꽃 조각이 떨어져 나와 태어나신 금국의 시조께서 수신을 몰아내고 이 땅을 차지하였다 합니다. 하루아침에 땅을 빼앗긴 수신이 하늘 신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자비로우신 하늘 신께서는 일 년에 단 열흘 동안만 수신에게 금국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 합니다. 우장절은 그 수신이 비와 함께 우리 금국에 내려와 있는 동안을 일컫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전설을 진지하게 듣던 이설이 의문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땅을 억울하게 빼앗긴 것은 수신인데 어째서 그 수신을 미워하느냐?”
“그럼 저희 금국의 시조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마마도, 참.”
답답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화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설을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