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26)화 (26/300)

달의 황홀경

26화

소운의 말대로 차림새를 배제하고, 태자가 의도적으로 속이려 한 것이라면 이설이 충분히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다. 황제가 보기에 이설은 너무 물렀고, 태자는 영악했다.

듣자 하니 이설은 태자를 더 어린 아이로 생각한 듯했다. 황제 입장에서는 어떻게 태자를 보고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지만, 동시에 태자가 작정을 하고 속인 것이라면 그 무르고 둔한 이설이 단번에 넘어갔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이설이 태자의 정체를 알고 환심을 사려 계속 만났다는 것도 기실 그럴 까닭이 없다. 황후가 되고 싶었다면 손조익과 손을 잡았어야 한다. 태자가 외조부인 손조익의 편에 섰을 거라 잘못된 계산을 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확실치 않다.

아직은 이설의 의중을 알기가 어렵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이미 비은궁 밖으로는 두문불출한다 하니 어떤 이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제가 일러 준 대로 죽은 듯이 궁 생활을 하며 목숨만 보전하다 때가 되면 황궁을 나갈 생각을 하는 걸지도 모르고.

“단식 말고 태자의 상태는 어떠하냐.”

“기마 연습을 그만두셨다는 것 말고는 평소 그대로입니다.”

“반성의 기미는 보이더냐?”

“……태자 전하께서 반성을…, 말입니까?”

소운의 반응에 황제도 괜한 걸 물었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태자가 반성이라니 말 같지도 않은 것을 물었다.

“반성은 아니지만, 태자 전하께서 어쩐지 루 소의 마마를 걱정하시는 눈치셨습니다.”

“태자가 루 소의를 걱정한다고?”

“폐하께서 루 소의 마마께 아직 화가 많이 나셨는지 몇 번 여쭤보셨습니다.”

부복하여 이설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걱정까지 하는 것인가. 그간 쌓은 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태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이설을 의심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이설이 정말 다른 의도를 가지고 태자를 대했더라면 태자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방면에 능통한 태자의 가장 큰 재주는 사람들의 의중을 간파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저 눈치라 여겼던 것인데 이제 보니 사람 속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른 못지않았다.

“태자가 소운, 네게는 섭섭해하지 않더냐?”

“염려 끼쳐 드려 죄송하다는 말뿐,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날 이설의 후원으로 향한 것은 다분히 소운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황제가 후원에 나타난 것과 하필 태감 단소운이 함께 있었던 것을 보면 태자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수학 중 잠깐씩 자리를 비우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소운이 황제에게 은밀히 고했다는 것을.

“속이 깊으신 분이니, 저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 소운 네놈보다야 나를 원망하겠지.”

“태자 전하께서 유일하게 존경하시는 분이 황제 폐하이십니다. 원망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존경과 원망은 함께 올 수 있다. 원망이란 것은 어느 것에 뒤따라도 말이 되지.”

“태자 전하께서 단식을 감행하실 만큼 사냥 대회에 꼭 나가고 싶어 하시는 이유를 아십니까?”

불쑥 나누지 않던 얘기를 물은 소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황제가 대답하지 않고 공연히 쳐다보기만 하자 스스로 대답한다.

“늑대 사냥을 하고 싶으시답니다.”

“늑대 사냥?”

“예. 작년 사냥 대회 때 폐하께서 사냥하신 늑대 가죽을 태자 전하께 드리지 않으셨습니까?”

소운의 말대로 황제는 작년 사냥 대회에서 늑대 두 마리를 사냥했다. 큰 놈은 우장절이 무사히 지나기를 바라는 제사에 제물로 바치라 신당에 주었고 작은 놈은 가죽을 벗겨 태자의 궁 입구 옆에 걸으라 주었다. 금국에서는 늑대 가죽을 벗겨 집 입구 옆에 걸어 놓으면 그 집 아이가 늑대의 기운을 물려받아 용맹하게 장성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 보답으로 태자 전하께서도 폐하께 늑대 가죽을 드리고 싶으시다 하셨습니다.”

“나에게 늑대를?”

“나덕산에서는 폐하의 허락 없이 함부로 늑대 사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십니다.”

“허락이랄 것까지야.”

“어쨌든 태자 전하는 폐하를 절대 원망치 않으시니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아직 어리시나 사사로운 일들로 폐하께 마음을 돌리실 분이 아닙니다.”

소운은 태자를 너무 좋게만 보려 하는 경향이 있다. 태자를 키운 건 반은 보모상궁이요, 나머지 반은 소운이라 할 만큼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이 그럴 수도 있다. 태자를 유일하게 제 나이로 봐 주는 것도 소운뿐이었다. 제 나이보다 더 어리게 보는 것은 이설뿐이었고.

모든 것에 무심하고 자신의 발아래 하찮은 미물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황제가 몇 안 되게 소중히 여기는 것 중 하나가 태자 해도원이었다.

제좌를 욕심내지 않았기에 장자로 태어난 선황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야망 있는 세도가 집안의 고명딸이지만 정치적 물물교환처럼 입궁한 황후도 심성이 고운 여인이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해도원이 미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부모를 일찍 여읜 그 아이를 더 어여삐 여겼고, 황태자의 신분을 보다 견고히 만들어 주기 위해 제 아들로 입적시켰다.

바라던 만큼 제 어머니의 고운 심성을 물려받지는 못한 것 같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의 무구함은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와서도 무뚝뚝하게 안부만 묻고 사라지는 태자가 한 발상치고는 제법 귀엽기도 하다.

황제는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냉정하고 가차 없으나 태자에게만은 그 정도가 덜했다.

“금제령은 우장절이 끝난 뒤 풀 것이다. 태자에게는 아직 말하지 말라.”

“그럼 사냥 대회는 어찌할까요?”

“황명은 번복하지 않는다.”

“…….”

“허나 태자에게 전하라. 우장절이 끝나고 함께 사냥을 갈 것이니 그동안 활 쏘는 연습을 단단히 해 놓아야 할 것이라고.”

*

여름의 가장 뜨거운 날들이 한풀 꺾이고 있는 이 무렵. 이설은 여전히 금국의 햇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든 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그늘 하나 없는 황궁을 벗어나 나무가 울창한 나덕산 위까지 올라오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이미 몸이 지친 탓에 다시 힘이 오르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이렇게 지치시면 어떡하십니까 마마.”

“수통 좀 다오, 기연아.”

이설이 말 위에서 아래로 손을 뻗자 기연이 수통을 건네주었다. 황궁에서부터 걸어온 기연은 지친 기색이 거의 없었다. 이설도 차라리 걸어왔으면 이보다는 덜 힘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사냥 대회가 열리는 나덕산은 황궁의 바로 뒤에 있는 산인데, 산맥이 길게 이어져 동쪽 해안가까지 다다르는 매우 큰 산이다. 산이 큰 만큼 험한 지형도 있고, 사나운 짐승도 있긴 하지만 보통은 산세 깊은 곳에서 살기 때문에 마주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작년 사냥 대회에서 우승한 황제는 늑대 두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런 큰 짐승을 잡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보통 사슴이나 여우 따위의 짐승을 가장 많이 잡는 사람이 우승이다.

이설이 탄 말의 옆을 걸으며 조잘조잘 사냥 대회 얘기를 해 주는 화홍의 얘기는 사실 거의 귀담아듣지 않았다. 말 위에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뭣보다 참기 힘든 건 주변을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말을 타고 있는 문무관, 그리고 땅 위를 걷고 있는 궁인과 시중들도 모두 하나같이 엿보는 시선으로 이설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소리에 조심성이라고는 한 줌도 없어 이설의 귀에 들리기까지 한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신기하게 여기는 것도, 자신이 연국의 왕족치고는 기록된 전설만큼 아름답지 않은 것도, 황제의 정인이라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못해 볼품없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듣는다고 해서 비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보여도 안 보이는 척, 들려도 안 들리는 척. 아무 반응 없이 한참을 걸어도 사람들의 관심은 끝나지 않는다. 이설이 제 얘기를 듣지 못해 저렇게 태연한 것이라 여기는지 일부러 큰소리로 입방정을 떨어 관심을 끄는 자도 있었다.

폐하는 참 인자하기도 하시지. 아무리 천명이 정해 준 정인이라도 그렇지, 저런 누추한 사내를 후궁으로 맞아 주셨을까.

모두가 비웃음으로 동의를 하는 그 말에 내내 잠자코 듣고만 있던 기연이 칼을 뽑아 들려 했지만 이설의 고갯짓에 그만두었다.

이설은 저 떠드는 말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를 귀 기울이며 머리를 비우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근처 어딘가 냇가 그늘에 가서 햇빛을 피해 몸이라도 식힐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날씨가 참 좋습니다, 루 소의 마마.”

말에서 떨어질까, 고삐를 단단히 쥐고 앞만 보던 이설의 곁으로 누군가 말을 탄 채로 다가왔다. 햇빛에 잠깐 눈을 찡그렸다 떠 보니 양 소원이다. 탄영당에서 보던 차림새와 달리 옷과 머리 장식이 수수했지만 미모는 여전히 고왔다.

“마마께서도 사냥 대회에 참가 하시는가 봅니다?”

“예. 모든 후궁들은 의무라 하기에…….”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본래 사냥이 여인들의 유흥도 아니고, 저희는 그저 행사에 구색을 맞출 뿐이지요. 저기 감 재인도 참가하지 않을 예정이랍니다.”

말 위에서조차도 몸짓이 자연스러운 양 소원이 뒤쪽에서 말을 타고 오는 감 재인을 가리켰다. 이설이나 양 소원과 달리 전동(箭筒:화살을 담아두는 통)을 등에 메지 않았다.

이설이 고개를 갸웃하며 주 상궁의 말을 떠올렸다. 분명 후궁들의 사냥 참가는 의무라고 하였는데. 이설이 말을 타지 못한다는 걸 알았던 주 상궁이 강경책으로 내놓은 술수였을까. 그런 것치고는 방법이 좀 과격했다.

옆에 있더라면 물어라도 봤을 텐데, 오늘 주 상궁은 광흥창과 담판을 짓고 오겠다며 황궁에 남았다. 함께 따라온 건 기연과 화홍뿐이다.

“마마께선 사냥이 처음이시군요.”

“예.”

“나덕산은 겉보기에는 아름답고 봉오리가 높지 않아 오르기 쉬워 보이지만,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지형이 가파르고 산세가 험악하여 무척 위험한 곳입니다. 다들 겉모습에 홀려 깊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해 봉변을 당하기 일쑤이기도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마치 산의 주인처럼 말입니다.”

은밀히 목소리를 낮춘 양 소원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덕산은 황궁의 소유지이니 그 주인이라 함은 황제일 것이다.

“그러니 마마께서도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마시어요. 자칫 발을 잘못 들였다간 큰 화를 입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