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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5)화 (25/300)

달의 황홀경

25화

황제가 자신에게 이름을 새긴 자를 황후로 맞이하기 위해 연국으로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초간궁은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황제에게 이름을 새긴 것도 모자라 연국의 왕족이기까지 한 여인을 쉽게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이를 갈며 연이설을 기다렸다.

그리고 황제가 연국에서 돌아온 그날, 연이설이 사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양 소원은 한껏 마음이 누그러졌다. 사내 따위 황후가 되어 봤자 대를 이을 수도 없고, 여인에 비하면 박색일 게 뻔한 그 얼굴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외로 이설은 황후가 되지 못하였고, 예상대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하였다. 그 무심하기 짝이 없는 황제라도 그동안 초야의 도리는 지켰는데, 이설 그자에게는 초야는커녕 입궁 후 한참이 지나도록 발걸음조차 하지 않는다 들었다.

황제가 그리 무시하니 후궁들이라고 인사를 드리러 갈 일이 있나. 양 소원 또한 이설의 궁에 걸음 한번 하지 않았다. 대신 탄영당에서 보낸 기별에 이설이 응하겠다 답했을 뿐이었다.

탄영당에서 처음 본 이설은 생각했던 것만큼 박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모인 후궁들 사이에서 빛날 만큼 자태가 빼어난 것 또한 아니었다. 희고 고운 피부와 특이한 머리색만 빼면 특별할 게 없었다. 물론 저잣거리에 저 외양을 하고 나돌아다닌다면 여인이며 사내들이 꽃을 쫓는 나비처럼 줄줄이 따라붙겠지만 이설은 저잣거리의 꽃이 될 수 없었다. 이설은 이제 후궁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내일 뿐이었다.

생전 걸음 하지 않던 탄영당에 들렸다던 황제가 이설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던 순간 양 소원은 웃고 말았다. 너무 우스워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초라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내를, 겨우 황제에게 징금수를 새겼다는 이유로 얼마나 질투해 왔는지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이설이 떠난 뒤에도 양 소원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 이설이 황제의 관심을 끈 적도 있었다. 길지 않았던 기간, 황제는 이설의 궁을 이따금씩 드나들었다. 밤을 지내지도 않았고 머무는 시간이 짧은 걸 보면 간단한 다과 정도만 같이 한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 자리들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다른 후궁들을 달래며 양 소원도 잠시 경계하긴 했으나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황제가 금군을 이끌고 비은궁을 찾은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황제의 측근들은 대부분이 입이 무겁고 돈 몇 푼에 입을 놀리는 치들이 아니었다. 궁금하기는 하나 양 소원은 곧 그 일에 대해 관심을 잃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황제가 비은궁에 걸음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내일 사용하실 활과 화살을 들여왔습니다. 지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여기 두고 나가 보아라.”

사냥 대회에 처음 출전하는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금국은 여인들도 어렸을 때부터 기마나 활쏘기 같은 간단한 무예를 교육받는 데다 심지어 그녀는 우장군의 차녀였다. 기마도 활쏘기도 여인들 사이에서는 수준급이다.

어차피 우승은 황제가 따 놓은 당상이니 그녀가 우승을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양 소원는 그저 황제의 눈에 한 번 더 띄는 게 목적이었다. 황제는 감 재인처럼 연약하고 무른 여인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여인에게 연심을 느끼는 자가 아니다. 황후에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자리에 합당한 기개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황제가 원하는 황후는 그런 것이다.

*

“…이틀째 단식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예. 어제 조반부터 드시지 않고 다 물리신다 합니다.”

“궁 밖으로 외출을 금한다 하였지 누가 식사를 금하였다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아무래도 사냥 대회 참가를 금지하신 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태자 전하의 속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웬만하지 않고는 태금궁까지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는 소운은 요 며칠 저녁마다 황제를 만나러 이곳에 오고 있다. 태자 해도원을 교육한 지 3년. 전에 없던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들을 황제에게 매일 저녁 보고하는 게 하루 일과 중 마지막이다.

그날 이설의 후원에서 일이 있었던 뒤로 황제는 태자의 말대로 소봉궁으로 함께 향하였다. 모든 이를 물리고 단 둘뿐인 태자의 침소에서 해도원은 부복하여 그저 소자가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고만 고할 뿐 자초지종은 하나도 설명하지 않았다. 남달리 어른스럽고 총명할 뿐 아니라 이따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만큼 냉정하기도 한 태자가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모두 소자가 거짓으로 고하였기 때문입니다. 루 소의 마마는 정말 소자가 종학 태감의 장자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입니다. 부디 마마만은 선처하여 주시옵소서.’

태자가 누군가를 위해 황제에게 납작 엎드리는 것도, 선처를 베풀어 달라 호소하는 것도 모두 기가 막혀 황제는 화를 내려던 것을 멈추고 실소를 흘렸다. 일어나라 명하자 조용히 일어나 황제 앞에 섰다.

‘그럼 여태껏 그자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단 말이냐?’

‘소자 글공부가 어렵다 투덜대면 유밀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황제는 더 기가 막혔다. 태자가 투덜거렸다는 것도 납득이 안 되는데 먹지도 않는 유밀과는 도대체 왜 받으러 갔단 말인지.

‘그자가 내 후궁이며, 내게 이름을 준 자란 사실도 알고 있었느냐?’

‘처음에는 몰랐으나 그 후에는 알았습니다.’

‘그럼 그자에게 네 어머니의 유품을 준 이유가 무엇이냐?’

침착하게 대답을 잇던 태자가 멈칫하였다. 대답을 하지 않으려나 싶더니 곧 무던한 말투로 말한다.

‘소자, 그 금파 가락지를 받을 때 어마마마의 유언을 들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건네주라 말씀하신 그 유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태자 네 지금, 연이설 그자를 네 정인이라 여겨 금파 가락지를 주었다 이 말이냐?’

태자의 말을 듣는 순간 황제는 그야말로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을 정도다. 태자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차란이기만 했어도 말보다 검 끝이 태자의 목에 먼저 닿았을 것이다. 아홉 살 어린아이가 할 법한 말도 아니고, 이설은 그럴 상대도 아니었다.

‘…아바마마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황제의 말에 태자는 도리어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껏 들어 황제를 올려다봤다.

‘소자 아직 어리나 정인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바마마께 징금수를 놓으신 마마를 왜 소자가 정인으로 여긴다 생각하십니까?’

‘그럼 태자가 말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게 무엇이냐?’

‘소자에게는 아바마마도, 스승님도 모두 소중한 분이십니다.’

빠져나갈 구멍은 빈틈없이 만드는 태자를 기특하다 칭찬을 해 줘야 할지 아니면 영악하다 경을 쳐야 할지.

뒤이어 하는 말도 가관이다.

‘하여 마마께 금파 가락지를 드린 것뿐입니다. 제 것을 드린 것이니 아바마마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상관 말라 선을 긋는 태자에게 황제도 더 이상의 토를 달지는 않았다. 설마하니 이설이 그것을 태자에게서 직접 받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염두에 두었던 최악의 수보다는 나은 것이라 여겼다.

‘그럼 네 이름은 왜 사실대로 알려 준 것이냐.’

‘갑자기 이름을 물어보시기에 당황하여 그랬습니다.’

보통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이는 태자다. 황제를 앞에 두고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는 태자임을 온 황궁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당황하여 실수를 하였다니 황제는 물론 황궁의 그 누구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해도원은 태자의 아명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아니다. 어차피 태자의 궁인 소봉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이설이 알았다고 하여 나쁜 일에 쓰이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태자는 황족이다. 황족이라면 자기 이름이든 아명이든 귀중히 여길 줄을 알아야 하는데 태자는 그게 다 무슨 상관이냐는 것처럼 거리낌 없이 제 이름을 밝혔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다는 태자에게 당분간 소봉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라 명하였다. 태자는 그 정도는 각오한 듯 군말 없이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나서 뒤돌아 나가려는 황제에게 물었다.

‘루 소의 마마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 아바마마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설을 따로 어떻게 하겠다 말한 것이 없는데도 태자는 그리 물었다. 마치 황제가 이번 일로 이설에게 적대심을 품었다는 것을 확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황제는 태자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소봉궁을 나섰다.

“사냥 대회를 고대하고 계셨었습니다. 활 쏘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으셨고요. 무슨 일인지, 기마를 무척 연습하셨습니다.”

“태자는 말 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텐데.”

“예, 그런데도 열심히 연습하셨습니다.”

무슨 변덕이 들어 또 기마 연습을 하였다는 건지, 황제는 도통 알 수 없는 태자의 속내를 헤아려 보려다가도 끝내 알 길이 없어 넘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헛소리만 늘어놓는 조정 신료들도, 세 치 혀를 놀리는 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닌 차란도 모두 제 손바닥 안에 들어와 있는데 고작 충년도 넘기지 못한 태자 하나 때문에 마음이 이리 어지러워서야 되겠는가 싶다. 게다가 그동안 말썽 한번 안 부리고 잠잠하던 태자가 아닌가. 왜 갑자기 이런 얼토당토않은 짓을 벌인 건지 황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운 네가 보기엔 어떠하냐.”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루 소의가 정말 태자의 정체를 모르고 숨겼다 생각하느냐.”

황제는 태자의 말을 반은 믿었다. 태자는 정말 이설에게 자신의 신분을 정직하게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설인데, 이설이 태자의 신분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믿기 힘들었다. 태자는 멀리서만 보아도 태자인 걸 모두가 안다. 붉은색의 머리끈과 감색 의복에 수놓아진 작은 봉황. 황제가 찾아갔던 날에도 태자는 그 차림으로 있었다.

“루 소의 마마께서는 평소 처소 밖을 잘 나오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태자 전하의 용안을 뵈었을 리가 없으셨겠죠. 의복이나 머리끈 같은 경우에도 누가 일러 주지 않았다면 아는 바가 없으셨을 겁니다.”

“…….”

“게다가 태자 전하께서 작정하고 루 소의 마마를 속이신 거라면 모르셨을 만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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