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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4)화 (24/300)

달의 황홀경

24화

*

“허리에 너무 힘을 주시면 안 됩니다, 마마. 정 불안하시면 자세를 좀 더 낮추세요. …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고삐는 꽉 붙잡으세요.”

궁의 앞뜰. 장터에 묘기를 부리는 재주꾼을 보러 몰려온 사람처럼 비은궁 궁녀들이 모두 모였다. 손에 하나씩 쥔 당과와 떡들을 오물거리며 함박웃음을 진 얼굴들이 모두 말 위의 이설을 향해 있었다.

“말은 똑똑한 짐승입니다. 제 등 위에 있는 자가 겁을 먹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난폭해지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위에 앉아 있는데 겁을 먹지 않는 게 이상할 노릇 아니냐, 기연아.”

“그래도 잘하시고 계십니다. 걸음을 멈추고 싶으실 땐 고삐를 강하게……, 아닙니다, 좀 더 세게 당기셔야 합니다. …예, 그렇게요.”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처음 배울 때 이런 기분일까. 이설은 제가 탄 말이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저를 보는 궁녀들이 박수 치는 것을 보며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남들은 닷새도 걸리지 않는다는 이 일을 장장 한 달이 넘게 걸려서야 이루어 낸 것이 뿌듯할 수가 없다. 그동안 넘어지고 긁히고 낙마까지 하여 배운 것들인데 여전히 말을 타는 것은 어렵고 내키지가 않았다. 정말 내일 아침 이 말을 타고 사냥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건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며칠 전부터 하기도 했다.

“한 달만 더 빨리 배우셨다면 활을 쏘는 법도 알려 드렸을 텐데, 아쉽습니다.”

기연이 농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 식겁한 이설이 치를 떨며 말에서 내려왔다. 아직 익숙지가 않아 도움이 없으면 온종일 걸리는 일이지만 혼자서 해냈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말에서 내린 뒤 갈기를 쓸어 주며 오늘도 잘 협조해 주어 고맙다 말하였더니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희한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사냥 대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겨우 말 위에 앉아 고삐를 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이설은 그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후궁들도 참가가 의무라 하였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배운 것일 뿐, 유흥을 위해 죄 없는 동물들을 사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입궁 후 처음 나가 보는 황궁 밖 나들이로만 생각하며 사냥이라는 것에는 크게 마음 두지 않을 생각이다.

“오늘도 서고에 가시겠습니까?”

“아니다, 오늘은 좀 쉬고 싶구나. 나 대신 서책을 좀 갖다 주고 오너라.”

“예 마마.”

걸음 가볍게 이설의 서책을 가지러 들어가는 연화의 뒷모습을 보며 이설도 조용히 미소 지었다. 황궁에서 지급받는 의복은 여전히 낡고 해졌지만 다행히 먹는 살림이 나아져 궁녀들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주 상궁의 말과는 달리 내섬시에서 아직도 식재료들을 조달받지 못했다.

이쯤 되니 단순 누락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달을 끊은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다. 이설은 주 상궁에게 내막을 알아보라 시켰으나 이미 광흥창 일로 바쁜 주 상궁이라 그럴 여력이 남지 않았다.

기워 입은 옷 때문에 여전히 누더기 궁녀라 놀림 받는 아이들이지만 전보다는 얼굴이 활짝 핀 것이 보기 좋다. 그래도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속상한지 구석에서 홀로 훌쩍거리던 어린 궁녀 하나를 화홍이 달래며, 누더기 궁녀면 뭐가 어떻니 찬밥 먹는 저것들보다야 쌀밥에 고기반찬 먹는 우리네가 훨씬 낫지, 하는 말에 이설은 웃었다.

이설도 여전히 자신이 황궁 밖에서는 누더기 마마, 누더기 후궁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루(鏤:새길 루) 소의가 아니라 누(陋:더러울 누, 더러울 루) 소의 라며 조롱하는 궁인들이 담장 밖에 널리고 널렸다. 황제가 한때 자주 들렀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모두들 이설이 지나는 자리마다 비웃으며 수군거렸다.

그날의 자세한 정황은 아무도 알지 못하겠지만, 황제가 비은궁에 금군을 대동하여 갔다는 사실은 이미 황궁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다들 뭔진 몰라도 이설이 황제에게 크게 밉보였다 생각하는 듯했다. 그 뒤로 황제의 발길 또한 뚝 끊기기까지 했다. 그러니 대놓고 누더기 마마라 입방정을 떨어도 무서울 게 없었다.

저들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마마에게 누더기 옷을 걸쳤다 할 수 있느냐며 궁녀들은 노발대발 성을 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설은 다른 후궁들과 같은 의복을 입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연국에서 가져온 비단과 금국에서 혼례 폐물로 받은 옷감들은 앞으로도 쓸모가 없을 것 같아 모두 궁 밖에 내다 팔아 버렸다. 좋은 옷을 지을 옷감이 이제 더는 없었다.

“내일 사용하실 활을 지금 보시겠습니까?”

“활? 난 사냥은 하지 않을 건데…….”

“압니다. 그래도 명색이 사냥인데 구색은 갖추어야 할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

“활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단도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다! 활이 좋겠구나.”

이설의 내키지 않은 모양새를 보고 기연이 장난을 걸었다. 정말 기연이 단도라도 가져올세라 냉큼 대답하자, 옆에 있던 궁녀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이설이 민망함에 뺨을 긁는 동안 누군가 활을 가져왔다.

“연국에서 쓰시던 것보다 활시위가 많이 팽팽하니 힘을 더 주셔야 합니다.”

“사용하지 않을 것이니 알 것 없다. 사냥은 하지 않을 거래도.”

활시위를 가볍게 당겨 시범을 보여 주려는 기연을 막고 이설이 말했다. 구색을 갖춰야 한다기에 가져가는 것이지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게다가 땅에 서서라면 모를까 말 위에서 활을 쏜다니, 지금 이설의 기마 실력으로는 완전히 무리다.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바닥으로 고꾸라질 게 뻔하다.

그래도 한번 활시위를 당겨라도 보라는 기연을 피해 후원으로 도망을 왔다. 여기까지는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해도원은 이제 후원에 찾아오지 않는다. 이설이 꼬박 나흘을 앓아누운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주 상궁이 그동안의 사정을 물었다. 해도원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일을 모두 빠짐없이 들은 주 상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태자 해도원에 대해 간략히 말해 주었다.

태자는 선황과 그의 황후 혜서 황후의 하나뿐인 핏줄이다. 황후에 이어 선황마저 갑작스런 사고로 일찍 승하한 뒤 현 황제의 아들로 입적하여 황태자의 신분을 유지했다. 선황의 씨를 받고 혜서 황후의 배에서 낳았으니 외모는 그 둘을 빼다 박았지만 성정은 현 황제 못지않게 차갑단다.

제 나이보다 큰 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고여덟 살로 착각할 만큼 작은 것도 아니라며 의아해하는 주 상궁에게 이설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지내던 연국에서는 어린아이를 볼 일이 없어 착각했던 것 같다 말했지만 여전히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사실 이설이 마지막으로 본 어린아이는 유강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유강은 예나 지금이나 또래보다 키가 훨씬 큰 편이다.

해도원이 무슨 이유로 그런 거짓말을 하며 찾아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말 유밀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주 상궁 말에 의하면, 태자는 단 음식은 손도 대지 않는다 하였다.

이제는 황제마저 찾아오지 않는 비은궁이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웃을 일은 많아지고 있었다. 당분간은 먹을 것 걱정할 일도 없고, 아이들의 녹봉은 이설의 패물로 대신했다. 뜨거운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인 날씨도 좋다.

사냥 대회가 끝나면 우장절이 시작된다고 하니 당분간 힘들여 나무에 물을 줄 일도 없을 것이다. 우장절에는 황궁의 모두가 바깥출입도 삼간다 들었다. 그럼 탄영당에 걸음 할 일도 없으니 좋다. 그 전에 서고에서 서책을 잔뜩 빌려다 종일 빗소리를 들으며 독서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사냥 대회만 지난다면 이 쓸쓸한 마음을 가라앉힐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냥 대회만 무사히 지나간다면.

*

초간궁(招懇宮)은 황궁에서 내로라하는 아름다운 궁 중 하나로, 크기는 작으나 궁의 문지방부터 기둥과 지붕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만든 것이 없는 곳이었다. 또한 황제의 처소인 태금궁과 그리 멀지 않아 예로부터 후궁들이 무척이나 선망하는 궁이기도 하여, 보통은 정1품 비들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선황 시절에는 빈 궁이었던 초간궁의 새 안주인이 된 것은 작년 이맘때쯤의 양 소원이다. 서방장군 중 하나인 우장군 원후연의 차녀 원미문은 집안의 힘을 등에 업고 궁에 발을 들였다.

황후가 되겠다는 야심만만한 포부를 가지고 황궁에 들어선 그녀는 우장군의 차녀라는 꼬리표를 가지고도 겨우 정2품 소원 첩지를 받아야 했다. 대신 역대 정1품 비들만 하사받았다는 초간궁을 처소로 허락받았으나, 그녀는 자신이 겨우 소원 첩지를 받았다는 사실에 분개해 대전을 나오자마자 비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쳐 분을 삭였다.

그래도 황궁의 후궁들 중 그녀는 가장 품계가 높은 후궁이었다. 황제는 후궁을 많이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암투를 벌여야 할 상대가 많지도 않았다. 제 밑으로는 모두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인들이었다. 기를 쓰고 노력해도 절대 양 소원보다 높이 오를 수 있는 뒷배가 없었고 외모 또한 그녀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 하여 황제가 어느 한 명에게 총애라도 주는가,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황제는 황궁의 모든 여인들에게 무심하고 차가웠다. 지아비로서의 도리와 황제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정도로만 후궁들을 대하였다. 밤일을 피하지는 않았으나 모두 경사방 내관들이 미리 짜놓은 일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뿐이다. 그나마도 황손을 이을 생각이 전혀 없는 건지 고르는 날짜들이 모두 수태 가능한 날을 피해 갔다.

그래도 양 소원은 황궁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내명부의 수장으로 군림하는 것도, 황제의 품에 여인으로 안기는 것도 모두 그녀가 누리는 권력이었다. 고매하고 아름다운 황제는 다른 어떤 후궁들보다도 자신을 가장 자주 찾았다.

황제가 자신에게 연심을 품었다 소녀 같은 기대를 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황궁에서 자신만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 있으면 아버지 원후연이 사방장군의 지휘권을 모두 갖게 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아버지의 명성을 업어 귀비 이상의 품계로 오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때 양 소원의 창창한 앞날에 물을 뿌리며 나타난 것이 연이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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