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0화
눈만 깜빡이던 이설이 이내 해도원의 주먹을 다시 쥐여 주며 반대쪽으로 밀어냈다.
“유밀과값치고는 너무 귀한 가락지 아니냐. 게다가 이것은 또 어디서 난 것이야?”
“소자의 것입니다.”
“금국은 사내아이도 금파 가락지를 끼다니 정말 신기하구나.”
“황궁에 지내시면서 가락지 하나 끼지 않으시는 마마가 더 신기합니다.”
해도원이 이설의 열 손가락 빈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설은 멋쩍게 웃으며 소매로 손을 감췄다.
“내 패물함에도 가락지가 여럿 있다. 걱정 말고 가져가 네가 끼거라. 네 손에 더 잘 어울리겠구나.”
“소자는 아직 손이 작아 끼지 못합니다. 마마께서 가져가셔요.”
“이리 귀한 것을 함부로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원아. 어서 가져가.”
가락지 쥔 손을 서로에게 밀며 벌이던 실랑이는 해도원이 억지로 가락지를 이설의 손가락에 끼워 주는 것으로 결국 끝이 났다. 소매 안에 숨긴 손을 잡아 꺼내는 해도원의 힘이 생각보다 강해 놀라기도 했고, 그 손을 억지로 빼내려다 아이가 다칠까 싶어 제대로 거부하지 못한 탓이었다.
“보세요. 가락지를 끼시니 손도 더 고와 보이지 않으십니까?”
가락지 낀 이설의 손을 뿌듯하게 보며 해도원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설은 어린아이에게 이런 값비싼 물건을 받은 게 마음에 걸려 따라 웃지도 못하고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제 손만 내려다봤다. 다시 가락지를 빼려 하자 해도원이 재빨리 손을 뻗어 막는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근엄한 얼굴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빼시면 안 됩니다.”
“끼어 보았으니 됐지 않느냐?”
“이제 그 가락지는 마마의 것입니다. 돌려주시려거든 차라리 버려 주세요. 저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
“마마께서 억지로 제게 돌려주셔도 제가 버릴 것입니다. 제 것이 아니니까요.”
조금 전 유밀과를 한지에 잘 싸서 품에 챙겨 넣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였는데, 가끔씩 저런 강단 있는 얼굴이 튀어나온다. 마냥 어린아이의 고집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무거운 말에 이설은 또 이기지 못하고 소맷자락만 꽉 쥐었다.
이설에게 가락지 낀 손을 자꾸만 보여 달라며 흐뭇하게 쳐다보던 해도원이 돌아가고, 이설은 침소로 돌아와 바느질 연습을 했다. 나흘 내로 비단 주머니를 만들겠다 모두에게 큰소리를 떵떵 친 게 사흘 전이다.
비단이기는 하나 어떻게 보아도 주머니다운 모습은 없는 천 쪼가리를 들고 이설은 긴 한숨만 내쉬었다. 그간의 노력한 결실이 없다. 꽃과 나무는 애정과 관심만 주어도 쑥쑥 잘만 자라나는데, 바느질은 겨우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내일까지 완성하지 못한다 하여 궁녀들에게 벌을 받지는 않겠지만 놀림은 받을 것이다. 이설은 그 생각에 벌써부터 풀이 죽어 시무룩해졌다.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동작으로 바늘에 실을 꿰고 어정쩡하게 천을 잡아 막 바느질을 하려던 참이었다. 복도를 걷는 걸음 소리가 평소보다 경망스러운가 싶더니 기별 후 곧바로 문이 열린다. 바늘을 든 채로 놀라 고개를 돌리니 연화다.
“마마 폐, 폐하께서 지금 이곳에……,”
연화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이설은 그녀가 하려는 말을 알았다. 등 뒤로 지는 그림자에 놀란 연화가 옆으로 비켜나자 연화가 문을 열었던 것과 거의 동시에 도착한 황제가 안으로 들어선다. 황제가 뒤를 돌아보자 연화는 다시 문을 닫았다.
“기별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로…….”
황제는 요즘 기별 없이 이설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루 중 계획된 일정인 것처럼 반드시 제 걸음을 알렸다. 그랬던 황제가 갑자기 나타나니 연화가 저리 놀라 달려올 만했다.
일어나 서 있는 이설을 지나 황제는 늘 앉는 자리에 앉아 이설을 한 번 쳐다봤다. 자리에 앉으라는 눈치. 이설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황제의 시선이 이설을 떠나 탁자 위에 널려놓은 물건들에 향했다. 그중 얼기설기 못난 바느질로 꿰어 놓은 비단 천에 멈춘다. 이설이 사흘 내내 만들고 있는 비단 주머니였다. 궁녀들에게 보여 주기도 낯부끄러운 것을 황제에게 들킨 이설이 냉큼 손을 뻗어 주머니를 감췄다. 소매 속에 쑥 밀어 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바느질을 배우는가?”
황제가 조용히 묻자 이설이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그렇다 대답했다. 황제가 이것들에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아 주길 바랐었다.
“연국은 사내에게도 바느질을 시키는가 보지?”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배운 것입니다. 금국 여인이라면 바느질은 필수라기에…….”
말을 잘못하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여인이 아닌데.
비슷한 생각을 하였는지 황제도 코웃음을 쳤다.
“꼭 그대가 여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을 하는군.”
조롱조가 짙은 말을 듣고도 이설은 별다른 반응 없이 탁자 위 어지러운 물건들을 조심스레 정리했다. 황제는 어차피 자신에게 상냥하지 않으니 말 하나하나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황제는 물끄러미 이설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있지 않다면 황제는 보통 이설에게 말 한마디 걸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설도 황제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최소한으로만 몸을 움직였다.
문득 황제의 시선이 자신에게 너무 오래 머문다 생각이 들어 슬쩍 쳐다보니 이설이 아니라 이설의 손에 시선이 가 있다. 종일 꽃과 나무를 만지는 것도 모자라 바느질에 혹사당하고, 근래에는 기마를 배우느라 엉망진창인 손이 부끄러워 이설은 슬그머니 소매를 내려 손등을 덮었다. 그러자 황제의 시선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마마. 따뜻한 차를 내왔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문밖에서 누군가 차를 내왔다 기별했다. 황제가 당연히 이곳에서 차를 마시고 갈 것이라 생각하고 차를 안으로 들이려는데 황제가 더 빨랐다.
“루 소의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
다소곳한 대답과 함께 궁녀가 물러가고 다시 조용히 둘만 남았다. 할 이야기란 말에 이설이 몸을 고쳐 앉으며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군.”
“예.”
“말해 보라.”
황제는 자신과의 긴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설은 가타부타 쓸모없는 말들은 모두 생략하고 며칠째 생각해 두었던 말들만 다시 떠올렸다.
“나흘 전 태부 손조익이라는 자가 저를 만나 뵙기를 청한다 연통이 왔습니다. 또한 이틀 전 육추명이라는 자가 제게 알현을 요청하였고, 어제는 견갑승, 하무석이라는 두 사람이 입궁을 경하한다는 내용의 서신과 패물을 보냈습니다.”
“…….”
“모두 거절하였고, 패물과 서신은 곧바로 돌려보냈습니다.”
나흘 전 아침 누군가 비은궁을 찾아왔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이설을 만나 뵙기를 청한다, 말을 전하러 온 자였다. 그가 모시는 자의 이름은 손조익이었다. 이설은 처음 듣는 자였으나 공손한 말투로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주 상궁은 말을 전하는 자가 사라지자 손조익에 대해 간단히 알려 주었다. 선대 황제의 황후였던 혜서 황후의 아버지이며, 현재 황태자의 외조부라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이설은 황제가 예상했던 것들이 찾아오고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거절하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 뒤로 왔던 알현 요청은 물론 경하의 의미로 받은 패물과 서신까지 모두 거절하였다. 손조익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들은 바는 없으나 그럴 때일수록 모든 사람들을 조심해야 했다.
이설이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황제는 어쩐지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설이 다시 강고하게 말했다.
“신첩, 황제 폐하께 거짓 없이 모두 고했나이다.”
황제와의 약조를 깰 이유가 없다. 약조의 대가 때문은 아니었다. 이설은 황제가 자신에게서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황제는 이설을 좀 더 지켜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들을만한 얘기는 다 들은 듯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설도 따라 일어나 황제가 나가는 길을 배웅하러 섰다.
“손조익이 다시 한번 알현을 요청한다면 승상 비차란에게 곧바로 기별하라. 다른 자는 상관없다.”
“예.”
“그리고, 그 소매를 걷어 보아라.”
“……예?”
바보같이 되묻는 이설에게 황제가 다시 말했다. 소매를 걷어 보라 하였다. 헛말일 리 없는 그 명에 이설이 우물쭈물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숨겨 놓았던 비단 주머니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지만 주울 수가 없었다.
“……그만 됐다.”
볼만한 것은 다 보았는지 황제가 뒤를 돌아 나간다. 보폭이 크고 빠른 황제의 발소리가 멀리 사라지는 게 들리고 나서야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를 주웠다. 어떻게 봐도 주머니 같지가 않은 이 모양을 황제가 봤다고 생각하니 창피해서 오늘 밤 잠도 잘 수 없을 것 같다. 손과 주머니를 겹쳐 얼굴을 가린 이설을 보고 궁녀들이 놀라 들어왔다가 이설이 만들었을 게 분명한 주머니를 보고 깔깔 웃어 댄다.
정말 낯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하루다.
*
황제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자신을 쫓아다니는 궁인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말 같지도 않은 상소를 올리는 대신들에게서 벗어나 늘 혼자서 조용한 사색을 즐기기 원했다. 황제가 그렇게 조용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눈치 빠른 윤 내관은 모든 궁인을 황제 곁에서 물리고 잠시 후 자신도 조용히 물러났다.
황제는 그렇게 오늘도 혼자 의정전 제좌에 앉아 있었다. 소리 없이 물러나는 윤 내관에게 승상 비차란을 데려오라 명한 지가 벌써 한참 전. 공허한 바깥 바람 소리만 울리던 의정전에 드디어 발소리가 들리며 곧이어 차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상 비차란 지금 막 도착하였습니다.”
급하게 오긴 했는지 말소리에 숨소리가 좀 거칠었다. 황제만큼 긴 머리카락이지만 항상 상투관까지 착용해 단정하게 올려 다니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치렁하게 풀어 헤친 채다. 꼴이 그게 무엇이냐 한마디 하려다 관두고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무얼 하다 이제 오는 것이냐?”
“금위군과 나덕산 사찰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겨우 반나절 사냥 대회다.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
“폐하의 성후에 만전을 기할 뿐입니다.”
차란의 충절에도 황제는 별 감흥 없는 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차란은 황제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손에 든 끈으로 재빨리 머리를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