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9화
2장. 사냥 대회
금국은 연국과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른지를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중 지금 이설이 당면한 보다 큰 문화적 차이는 금국의 귀족 여인들이 갖추는 기본 소양에 대한 것이다.
금국의 아녀자라면 마땅히 수를 놓는 법을 알아야 한다기에 자수를 배웠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어쨌든 이설은 나름대로 노력 중이었다. 또한 이설은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이 사용하는 비녀로 머리를 고정하고, 여인들의 장신구를 몸에 걸치기도 했다. 기껏해야 서고를 가는 길에 걸치는 옥팔찌와 삼작노리개 정도가 전부였지만 사실 이설은 이것들도 한껏 양보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식사 중 여인들이 지켜야 하는 품위를 배웠고, 특별히 나무랄 데가 없다던 걸음걸이도 새로 배웠다. 최근에는 수묵화를 배워야 한다기에 회백색 소맷자락에 검은 먹물을 물들이며 그것 또한 배우고 있다. 기나긴 황궁 생활을 견디려 앞뜰과 후원의 나무들 돌보는 일을 소일거리로 삼았는데, 요즘은 하루 중 할 일이 너무 많아 이제 막 자라는 새싹들에 물을 주는 것도 잊고 넘어갈 정도다.
상황이 이 지경인 와중에 또 배워야 할 게 있다 하여 앞뜰로 나온 이설은 선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
“아이고 마마, 딱 보시면 모르시겠습니까? 말이지 않습니까, 말!”
이설은 천치도, 장님도 아니다. 눈앞에 말이 있는 걸 보고도 뭔지 몰라 물은 게 아니었다. 이설은 그저 이 말이 왜 제 궁의 앞뜰에 있는지가 궁금한 것이었다.
“한 달 뒤 사냥 대회가 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얘기는 들었다. 근데 그게 이 말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한 달 뒤 황궁 연례행사인 사냥 대회가 있다. 우장절이 시작되기 전, 그해의 여름 중 가장 뜨거웠던 날들이 무사히 지나간 것을 경하하는 행사다. 이른 아침 황궁 뒤 나덕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해가 지기 전 반나절 동안 사냥을 한다. 그리고 잡아 온 짐승들의 크기와 마릿수에 따라 점수를 매겨 가장 점수가 높은 자가 우승이다.
유흥을 위한 사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설은 사냥 대회라는 말에 치를 떨며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이제 와서 사냥 대회 얘기를 꺼내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말 근처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이설과 달리 겁내는 기색 없이 직접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화홍이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마마께서도 이 말을 타고 직접 사냥을 하셔야 한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 말을 타고 직접 사냥을 해야 한다……?”
“예.”
“…나는…… 나는, 그런 사내가 아닌데……, 아니 내가 사내인 것은 맞으나, 헌데 내가 왜 사냥을…….”
이설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횡설수설하는 말을 바로 하는 것과 자리에 똑바로 서 있는 것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정신이 없었다. 이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자신이 사내인 것은 맞으나 황제의 후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이 어째서 말을 타고 직접 사냥을 해야 하는지가 묻고 싶었던 것이다. 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설만 멀뚱히 보고 있는 화홍을 대신해 주 상궁이 앞으로 나섰다.
“금국에서는 말을 타는 것과 활을 쏘는 것 또한 사내와 여인을 가리지 않고 갖춰야 하는 기본 소양입니다.”
“…….”
“폐하는 물론 다른 후궁 마마들께서도 모두 사냥 대회에 참가합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쏴서 사냥을 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상징적인 참가이니 우승을 노리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참가는 의무입니다.”
이설은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눈앞에 말 한 필을 보았다. 감당 안 되는 현실을 마주하여 할 말을 잃은 이설을, 궁녀들이야말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설이 말을 타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미 다들 저런 반응이었다.
평지가 드물고 산세가 험한 연국에서는 말을 타는 일이 흔한 것이 아니다. 왕족 중 사내들은 그럭저럭 말을 탈 줄 아는 자도 있었으나 이설은 달랐다. 이설은 한 번도 혼자 말을 타 본 적이 없었다. 어지간하면 한 번 정도는 있을 법하기도 한데, 이설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렸을 적 작은 형님이 낙마로 크게 다치는 걸 본 뒤로는 겁이 나 가까이 가는 것도 한참 큰 뒤에나 가능했을 정도다.
여전히 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이설이 부끄러운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을 타지 못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준비를 하셔야지요.”
“준비라니……?”
“말을 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어렵지요. 그것까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말에 올라타기만 하세요, 마마. 말씀드렸지만 참가는 의무입니다.”
주 상궁이 깐깐하고 고지식해 이설에게 수많은 부녀자의 책무를 지게 하고 있긴 하지만 이설은 정말 단 한 가지도 불만스럽지가 않았다. 수를 놓는 동안 오른손이 왼손을 바늘로 수없이 찔러도 그것은 제 오른손의 잘못이었지 주 상궁의 잘못이 아니기에 원망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설은 그 누구보다도 원망스러운 눈빛을 주 상궁에게 숨김없이 보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주 상궁은 약간 반응을 보이는 것 같기는 했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내사복시(內司僕寺:궁에서 사용하는 말을 관리하는 기관)에 일러 가장 다루기 쉽고 순한 말로 데려왔습니다.”
“주 상궁도 봐서 알겠지만 나는…… 그……,”
“예. 혼자서는 마상(馬上:말의 등 위)에 오르시지도 못하시지요. 갈 길이 머니 바삐 배우셔야 합니다.”
어차피 이 궁 안에 있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하는 주 상궁인데, 이설은 꼭 치부라도 들킨 것처럼 낯부끄러운 얼굴을 소매로 감췄다. 창피한 것도 창피한 건데, 이설은 정말 말을 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어 더 큰일이었다. 그래도 말 위에서 화살을 쏠 필요는 없다는 사실에 감읍하여야 하나. 거의 울기 직전이 되어 버린 이설을 안쓰럽게 보는 게 기연 하나뿐인 것도 큰일이었다.
“성심성의껏 알려 드리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기연이 네게는 절대 배우지 않을 것이야.”
이설이 겨우 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였을 때쯤 기연에게 기마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등자(鐙子: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물건)에 발도 올리지 못하는 이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연이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한 이설은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고 기연은 그저 당혹스러움에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여기 마마께 기마를 가르칠 자가 저 말고 누가 있단 말이십니까?”
“…….”
“어서 환복 후 나오십시오. 주 상궁 말대로 갈 길이 무척 머시니까요.”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봐도 편들어 주는 사람이 하나 없다. 새까만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는 백마도 제 편이 아닌 듯하여 쓸쓸한 날이다.
*
“마마, 오늘따라 어찌 그리 고단해 보이십니까? 혹 심중에 묻어 둔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한지에 싸인 유밀과를 품 안에 고이 넣으며 해도원이 짐짓 어른 흉내를 내듯 물었다. 이제는 하루 걸러가 아니라 매일같이 찾아오는 해도원은 이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 이설이 몸소 쫓아내지 않으면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눌러앉았다. 글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이설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고 버티기를 며칠째. 이제는 아이와 입씨름을 하기도 힘든 지경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설은 지금 생에 가장 큰 난관 중 하나에 봉착한 지 여드렛날째였다.
“요즘 기마를 배우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아 몸이 좀… 힘들구나. 걱정하지 말거라.”
안색부터 걱정해 주는 해도원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정작 해도원은 화들짝 놀라서는 묻는다.
“마마께서는 여즉 말을 타실 줄 모르신다는 겁니까?”
다 큰 어른이 젓가락질을 못 한다는 말을 듣는 것처럼 기겁을 하는 해도원의 반응이 이설은 더 놀라웠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깐. 겨우 요만한 어린아이에게 또 이런 창피를 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버리고 말았다.
배움에 차도라도 있다면 당당히 나아지고 있다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는지라, 거짓을 고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어 애꿎은 풀만 뚝뚝 잡아 뜯었다. 아이치고 눈치가 무척 빠른 해도원은 이설이 금세 시무룩해진 것을 보고 퍽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금국 귀족 아이의 상식으로는 이설의 나이가 되도록 말을 타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걱정 마세요, 마마. 소자도 마상에 오르는 데에만 이틀이 넘게 걸려 속상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마상에서 고삐도 잡을 수 있는걸요.”
위로하는 것 같기도, 짐짓 제 자랑을 하는 것 같기도 한 해도원의 얘기를 들으며 이설은 더 비참해졌다. 이설은 지금 마상에 오르는 시도를 하는 데에만 여드렛날째였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곧 보름도 훌쩍 넘길 것 같다.
“소자가 무슨 실수를 하였습니까? 마마 안색이 더 나빠지셨습니다.”
무릎에 걸친 팔에 다시 얼굴을 묻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이설을 보고 해도원이 안절부절 그 주위를 맴돌며 걱정을 했다.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기연을 비롯한 비은궁의 궁인들은 누구 하나 이설을 이해하지 못하여 쌓인 한을 겨우 이만한 아이에게 풀었나 싶다. 못난 제 탓을 하더라도 혼자 해야지 왜 어린아이에게 이런 걱정을 하게 했을까, 자책하며 고개를 털어 올렸다. 괜찮다 웃어 주려는데 해도원이 불쑥 손을 앞으로 내민다.
“약소하나 마마께 드리는 제 선물입니다. 그러니 마음 푸시면 좋겠습니다.”
주먹 쥔 하얀 손을 펼치자 금파 가락지 하나가 있다.
“이게 무엇이니, 원아?”
“그동안 소자가 마마의 유밀과를 많이 뺏어 먹었지 않습니까? 그 값입니다.”
배시시 웃는 해도원이 손을 이설에게로 더 가까이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