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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8)화 (18/300)

달의 황홀경

18화

“원아 내 단향이를 내보냈으니 이제 그만 나와도 된다.”

“…….”

“아직 거기 있느냐, 원아?”

담장 한쪽 구석에 허리를 숙인 이설이 조근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몇 번째. 곧 수풀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리더니 그 안에서 단풍잎 같은 하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누군가 잡아 주길 바라는 듯 휘휘 젖는 손을 이설이 잡아 쑥 당겼다. 그러자 나뭇가지를 가르고 작은 어린아이가 튀어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마마?”

자신을 당기는 힘에 뒤로 밀려 자리에 주저앉은 이설에게 해도원이 제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었다. 좁은 구멍을 지나는 길에 나뭇잎이라도 먹었는지 고개를 돌려 퉤퉤, 하고 뱉어 내다 이설이 저를 보고 웃는 걸 보고 손등으로 입을 비볐다.

“매번 이렇게 오는 것도 힘들지 않니? 이제 그만 문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느냐?”

“담장을 돌려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럼 마마를 뵙는 시간이 짧아지는걸요.”

툴툴거리는 말을 들어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으나 말투는 항상 고상하다. 아버지가 종학 최고 어른이시니 배우기도 참 잘 배웠구나 싶은 해도원은 요즘 이틀에 한 번꼴로 후원인 소야원(小野園)에 들렀다. 버젓이 있는 문은 놔두고 항상 이 비좁은 구멍을 통해서다. 아무리 풀을 다듬었다 해도 여전히 사람이 오가기에는 좁은 이곳을 해도원은 매번 들락날락 고생이다. 이설이 몇 번이나 담장을 돌아 문으로 들어오라 해도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해도원이 소야원에 있는 시간 동안은 궁녀들의 소야원 출입을 금했다. 원래 소야원은 궁의 주인만 출입이 가능한 작은 후원이라 궁 앞뜰에서 오는 통로는 좁고 이설의 침소에서 곧바로 곳이었다. 그런 후원을 궁녀들이 제 방 드나들듯 오가는 것을 본 주 상궁이 크게 경을 쳤고, 이설이 괜찮다 몇 번이나 말해도 궁녀들은 이제 이설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소야원에 걸음 하지 않았다.

사실 이설도 이 넓은 궁에 혼자 있을 수 있는 데다 풀과 나무까지 울창한 장소가 생겨 좋기는 했다.

오늘은 단향이 이설의 부탁대로 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데 해도원이 나타났다. 좀 전처럼 저를 꺼내 달라 손을 버둥거리는 걸 운 나쁘게 단향이 먼저 보고 말았다. 깜짝 놀라 소리 지르는 단향에게 새를 본 것이라 달래서 내보내고 나서야 해도원을 후원으로 들였다.

“오늘은 안 오는 줄 알았다.”

평소 오는 시간까지도 오지 않길래 오지 않는다 생각하였다. 그래서 단향이를 부른 건데. 이설이 바로 조금 전 놀라 심장이 철렁했던 걸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해도원은 이설 외에 다른 이들의 눈에 띄는 걸 원하지 않았다. 저 같은 어린아이가 이설의 후원을 드나드는 걸 알면 황궁 어른들은 물론 제 아버지께서 경을 치실 거라는 게 이유였다.

어차피 소야원은 제 허락 없이 드나드는 이도 거의 없었고, 해도원도 이틀에 한 번 아주 잠시 머물다 돌아갔다. 별달리 아이에게 재미있을 게 없는 곳인데도 자주 오는 이유는 아마,

“자, 그래서 오늘은 두 개밖에 준비를 못 했구나. 하나는 좀 전에 단향이를 주었거든.”

이설이 쥐여 주는 유밀과 때문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마마.”

한지에 싸서 건네주는 유밀과를 받은 해도원이 그 자리에서 하나를 홀랑 입에 넣어 먹었다. 오물거리는 두 볼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한껏 더 귀여워 보인다. 남은 하나는 한지에 꽁꽁 싸서 해도원의 품에 잘 넣어 주었다. 내일 먹으라는 말에 아직 볼이 볼록한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단내 나는 음식을 한창 좋아할 땐데, 자주 먹을 수가 없으니 이설을 찾아오는 것이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설은 조반 후 차를 들 때 내오는 유밀과를 항상 한지에 싸서 주 상궁 몰래 궁녀들을 주곤 했는데, 요즘은 모두 해도원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마마께서는 이 비은궁 밖은 나가지 않으십니까?”

“가끔 서고나 탄영당에 가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잘 나가지 않는단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거니?”

“아뇨 그냥……. 이 담장 밖에서는 마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아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유밀과를 꿀꺽 삼킨 해도원이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사랑스럽게 물었다. 아이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것이구나. 저를 보고 눈만 깜빡여도 앓고 있던 걱정이 다 사르르 녹는 듯하다. 이리 귀엽고 똘똘한 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할까.

“제 얼굴에 무어가 묻었습니까?”

“귀여워서 보는 게다.”

“……예?”

“원이 네가 참 귀여워 보는 거란다.”

처음 귀엽다 말을 들은 아이처럼 해도원이 벙찐 표정으로 이설을 봤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이 이설을 빤히 쳐다보다 갑자기 얼굴을 휙 돌린다. 말랑말랑 하얗던 볼에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소자, 귀엽다 말을 들을 만큼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네 나이를 듣지 못하였구나.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원아?”

이설이 귀엽다 한 소리에 삐치기라도 했는지 해도원이 뾰로통 입이 나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소자, 마음이 상하여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뭘 물어도 신이 나서 저에 대해 알려 주던 아이가 얼마나 삐쳤길래 겨우 나이 하나에 입을 꾹 다문 것인지 이설은 그게 또 귀여워 한참을 그 앞에서 웃었다.

“화내지 말고, 이거 받거라.”

“이게 무엇입니까?”

“펼쳐서 한번 보거라. 내가 직접 수놓은 것이다.”

이설이 해도원에게 내민 것은 작은 비단 끈을 감아 놓은 것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풀어 보자 붉은색 비단 끈 끝에 하얀 실로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해도원이 똘망똘망한 눈을 흐릿하게도 떴다가, 그 비단 끈을 눈 가까이에 가져와서 들여다보기도 한다. 한참을 유심히 쳐다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이설을 봤다.

“……여기 쓰여 있는 것이 저의 이름이옵니까, 마마?”

내심 눈을 반짝이며 해도원의 반응을 보고 있던 이설이 끝내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절망적인 한숨을 뱉었다.

“요즘 수놓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어렵구나.”

“……괜찮습니다. 실력은 연습하면 느는 것이라, 저희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수놓는 것만 백 번을 넘게 연습하였다.”

이설은 요즘 화홍에게 수놓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요즘이라고도 할 수 없다.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부터 했으니 시간도 꽤 지난 일이다. 헌데 실력이 도통 늘지를 않는다. 이설에게는 뭐든 좋은 말만 해 주려는 연화도 이설이 수놓은 나비를 보고 웃는 듯 우는 듯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만 뻥긋거리다 자리를 떴다. 그나마 좀 솔직한 기연은 다른 소일거리를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말하였고, 이설에게 처음 수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한 주 상궁은 제가 한 말을 처음으로 후회한 눈치였다.

그나마 좀 나은 반응을 기대했던 해도원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심지어 더 좌절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떻게 봐도 해도원이라는 글자인데, 그것을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알았다는 게 상처다. 어젯밤 아무도 몰래 초를 켜고 새벽까지 놓은 수였다. 손가락을 찔리기도 또 얼마나 찔렸는지 모른다.

“제 이름을요?”

“그래. 실은 새나 꽃 같은 것을 놓아 보려 했는데 내 실력으로는 아직 무리더구나.”

“…….”

“원이 네가 이전번에 흘리고 간 머리끈이란다. 항상 머리를 헝클어 다니기에 주려던 건데…….”

“이미 주셨잖습니까?”

“아니다. 내가 더 연습해서 제대로 된 네 이름을 수놓아 줄 테니, 그건 이리 다오.”

“아닙니다. 저는 이것으로도 만족합니다.”

“거짓말 말거라. 네 이름인 줄도 모르고 한참을 들여다본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한참 동안 이설과 실랑이를 벌이던 해도원이 난데없이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며 비단 끈을 품에 욱여넣고 뒤를 돌았다. 이설이, ‘원아! 그 끈은 두고 가거라!’ 하고 소리치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수풀에 작게 난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쫓아가려던 이설은 한참 동안 쪼그려 앉아 있던 바람에 다리가 잘 펴지지 않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해도원이 사라진 곳만 멍하니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들 중에 아이를 만나는 짧은 시간은 항상 다른 일이 일어나 즐겁다.

“태금궁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폐하께서 납시는 중이랍니다.”

똑같은 하루에 일어나는 다른 일은 해도원의 일 뿐만이 아니었다. 이설은 요즘 황제와 식사를 같이 했다.

앞으로 비은궁을 자주 찾을 것이라는 말처럼 황제는 이따금 이설을 찾아왔다. 오후 정무를 보기 전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석반을 드는 게 대부분이었다.

황제가 처음 석반을 들러 왔을 때 비은궁은 그야말로 난리 북새통이었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황제에게 내어 줄 것이 없었다. 이설이 고기반찬을 즐기지 않기에 수라에 오르는 건 거진 나물과 채소 반찬이 주였고, 향이 강하고 간이 센 음식을 꺼려 하는 이설의 입맛을 맞추느라 대부분의 요리는 간이 싱거워 황제의 입맛에 맞을 리가 없었다.

차려진 조촐한 수라상을 본 황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수저를 들기 전 황제는 이설을 한 번, 침소의 세간살이를 한 번, 그리고 수라상을 한 번 차례로 훑어보고는 별말 없이 수라를 들었다. 황제의 수라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들을 보며 초조한 건 이설이었다.

‘음식이 변변치 못해 송구합니다.’

‘…….’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다른 고기반찬이라도 더 준비하라 일렀을 텐데…….’

‘…….’

‘다음 수라에는 더 신경 써서 준비하라 궁…….’

‘시끄럽구나.’

‘…….’

‘보잘것없는 그대에게 짐이 가장 크게 쳐주는 게 무어라 하였는지 기억하느냐?’

‘……무거운 입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명심하라 하였지.’

그게 끝이었다. 이설의 대답 이후로 황제는 다시 말하지 않았고 수라를 마칠 때까지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궁을 나갈 때까지도 황제는 이설에게 흔한 인사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정말 수라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 뒤로 종종 찾아오는 황제는 이설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궁녀들은 신이 나 죽겠는 모양이다. 황제에게 냉대받는다 소문난 제 상전을 황제가 사나흘에 한 번꼴로 찾아와 주니 무척 기쁜 듯 보였다. 이설과 함께 비은궁 밖을 나설 때면 고개가 항상 빳빳하다. 이설은 요즘 탄영당에도 다시 나가고 있는데, 전만큼 자신을 조롱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꽃밭에 낀 벌레처럼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건 여전했다. 다들 이설에게는 데면데면하기만 했다.

아직 석반을 들기엔 시간이 이르니 오늘은 아마 차를 마시러 오는 길인 것 같다. 황제와 차를 마시는 시간은 말 그대로 일다경쯤. 그럼 황제가 돌아가고 난 뒤에 꽃씨를 심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서고를 가는 길에 발견한 꽃의 씨앗을 손에 덜어 가지고 온 것이 있다. 금잔화를 심어 둔 곳 옆에 심어 놓으면 꽃이 폈을 때 보기 좋을 것 같다.

“마마, 얼른 환복하지 않으시고 뭘 하십니까? 이리 오셔요!”

이제 금국의 의복을 입는 것은 혼자서도 무리 없이 해내는 이설이 척척 옷을 갈아입고 앞뜰로 나갔다. 곧 문으로 들어올 황제를 맞이하는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황제가 나타났다. 오늘은 딸린 궁인들이 몇 안 되는 조촐한 행렬이었다.

이설이 드리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무시한 황제가 이설을 지나쳐 궁 안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를 지나 내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기까지 이설은 안중에도 없다. 따라 들어온 이설이 맞은편 자리에 앉자 주 상궁이 두 사람에게 차를 따르고 나간다. 황제는 이제 조용히 차를 마시다 어느 정도 시간을 흘렀을 즈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럼 이설이 따라 일어나고, 황제는 그를 지나쳐 내실을 나간다. 그러면 오늘 하루 황제와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보통의 날들은 그랬다.

“금잔화는 어디에 심었느냐.”

“……예?”

조용히 황제의 눈치를 보며 차를 마시던 이설이 놀라 찻잔을 떨어트리듯 내려놓았다. 둔탁한 그 소리보다도 황제의 말에 더 놀랐다.

“그날 훔친 금잔화 씨앗을 어디에 심었는지 물었다.”

훔친 것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허락받지 않은 곳에서 함부로 씨앗을 가져온 것이니 변명할 말은 없었다. 대답을 망설이던 이설이 결국 실토한다.

“도월소 옆에 심어 두었습니다.”

황제가 작은 소리로 그렇군, 하고 혼잣말하는 것을 들었으나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다시 평소와 같은 시간이 흐르고 차란이 큼큼거리며 조용히 기침을 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쯤이면 가실 때가 되었군, 하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설은 아직 차가 남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을 나가는 황제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설의 앞을 스쳐 지나갈 때 황제는 잠시 발을 멈췄으나 곧 걸음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내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허리를 편다. 황제가 앉았던 곳에 찻잔이 남아 있다. 다가가 손을 가져다 대니 아직 따뜻하다.

궁녀들이 들어와 찻잔을 치우는 사이 밖으로 나가 도월소를 돌아 금잔화를 심은 곳으로 향했다. 요 며칠 관심이 없었던 것을 반성하던 이설이 허리를 숙여 흙 위를 들여다보곤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금방 물을 주었는지 축축해진 흙 위로 새싹이 돋아나 있었다.

이제 금잔화가 자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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