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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7)화 (17/300)

달의 황홀경

17화

“기별도 없이 갑자기 오셨습니다! 궁을 다 둘러보시고도 마마께서 오지 않으셔서 지금 내실로 모셨습니다. 도대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내실까지 가는 문들을 열며 단향이 하는 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잰걸음으로 걷던 이설이 내실 문 앞에서 멈춰 숨을 골랐다.

“루 소의 마마 오셨습니다. 안으로 뫼실까요?”

“들라 하라.”

제 내실을 이렇게 긴장하며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문이 열리자 이설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황제 앞에 섰다.

“신첩 루 소의. 폐하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기별 없이 왔으니 짐의 탓이다.”

황제는 이설의 인사를 가볍게 넘겨 버리고는 찻잔을 들었다. 황제가 차 한 모금을 마시는 동안 내실의 침묵은 살얼음판을 기는 것처럼 긴장감이 흘렀다.

“루 소의와 나눌 얘기가 있다. 모두 물러나거라.”

황제의 명에 누구도 토 달지 않고 순식간에 내실 밖으로 물러갔다. 문이 닫히고 종종거리는 걸음이 들리는 걸 보니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멀어진 듯했다.

“앉아라.”

“예, 폐하.

황제가 맞은편에 빈 의자를 보며 말했다. 이설이 내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황제는 단 한 번 이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듯 구경해도 이설에게만은 닿지 않았다.

이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긴장될 때 나오는 버릇이다. 문득 황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마주 앉아 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아프게 누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모르는 지금, 불안함에 목이 타들어 간다. 왜 하필 이럴 때 그 흔한 차 한 잔 없는지 원망스럽다.

“서고를 다녀왔다고?”

“예. 서책을 빌려왔습니다.”

“가탁희의 책이군. 좋은 책이지.”

“…폐하께서도 이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의식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무시할 줄 알았던 황제는 의외로 담담히 대답했다.

“독초도감은 읽어 보았으나 약초도감은 읽지 않았다.”

“…….”

“짐에게는 필요 없는 내용이니.”

약초나 독초나 알아 두면 모두 좋은 것인데. 다른 이가 저리 말했다면 대답해 줬을 말을 속으로만 삼키며 이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제 안부를 물으러 처소에 들렀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눌 얘기가 있다 하여 궁인들은 모두 내보냈지만 황제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조용히 차만 음미했다. 이설이라고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니 둘 사이에 대화가 생겨날 리 없었다. 흔한 안부라도 물을까 했지만 선뜻 먼저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황제가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 앞에서 모든 행동이 주춤하는 것이다.

황제의 찻잔이 비었다. 빈 잔을 잠시 내려다보던 황제가 이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왼쪽 손목을 문지르다 내려놓았다. 손목은 여전히 비단으로 감싸 묶은 채였다.

“그대는 초야에 짐을 기다렸는가.”

말에 높낮이에 차이가 없어 저에게 하문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설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예, 폐하.”

황제의 표정이 일순 변하는 듯했다가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찡그린 것도, 웃은 것도 아닌 찰나의 표정이라 이설이 읽어 내기는 어려웠다. 다만 틀린 대답을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끝내 나타나지 않은 짐을 원망하겠군.”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개까지 저으며 부정하는 이설을 보고도 황제는 감흥 없이 빈 잔에 차를 채웠다.

“초야에 소박을 맞은 후궁이라 황궁에 소문이 파다한데 그래도 짐을 원망하지 않는다 하니,”

“…….”

“그대 심성이 고운 것인가, 아니면 미련하여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인가.”

무심한 말투로 제 마음을 찌르며 묻는 황제에게 이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은 심성이 고운 것이 아니니 미련하여 상황을 볼 줄 모르는 것에 가까웠으나 황제에게 이렇게 고할 수는 없었다.

“…저는…….”

“되었다, 대답하지 말라.”

“…….”

“그대에게 단 한 가지 높이 쳐주는 것이 그 무거운 입이다. 명심하라.”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말라는 말을 돌려 들은 이설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조용히 예, 하고 대답만으로 끝냈다.

“탄영당 다과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던데.”

생각지도 않던 얘기를 꺼내는 황제에게 이설이 머뭇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황제의 내리깐 눈에 번지는 냉랭한 기운이 더욱 짙어진다.

“그대는 후궁이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라.”

이설은 황제에게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뜻 모를 서러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한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닌 건지 황제의 기분은 알 수 없다.

긴 침묵이 다시 흐르는 동안 조용히 숨만 쉬며 앉아 있는 이 자리가 지독하게 숨이 막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심장이 빨리 뛰어 바깥으로 그 소리가 들릴 것 같다.

“그대는 진정 천명이 정해 준 짐의 인연이 그대라고 믿는가?”

온통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만 질문을 하는 황제에게 이설이 또 즉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렇다 대답하기에는 어심을 언짢게 할 것 같았고 그렇지 않다 대답하기에는 이설 스스로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를 부정하는 것 같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황제 역시 이설의 대답을 궁금히 여긴 것은 아닌 듯했다.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설을 책망하지 않고 말한다.

“짐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황제가 덤덤히 말하며 차 한 모금을 마시고 그제야 이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대에게 짐의 이름이 없는 것도, 짐이 그대에게 절대적인 연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모두 우리가 인연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하오면 폐하께서는 왜 저를 후궁으로 맞으셨습니까?”

이설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이름을 나눠 가지는 연인 사이에 생기는 절대적인 연심이 황제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만나는 모든 순간에 황제는 이설에게 무심하거나, 언짢은 태도를 보였다. 일방적인 호정은 이설에게서 황제로 향했을 뿐 황제는 답하지 않았다.

또한 황제의 말대로 이설은 황제의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목간에서 옷을 벗으면 하루 한 번은 꼭 몸을 훑어 확인을 하곤 하였는데, 어느 날서부턴가 그만두었다. 그때쯤에는 이설도 거의 확신을 하였던 것 같다. 나는 황제의 정인이 아니라고.

스스로도 인정하였던 것을 황제에게 확인받는 것이 썩 기분 좋지는 않다. 자신에게 연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을 애써 무시하며 그간 생각했던 것을 황제에게 물었다.

“연국의 왕족이며 사내이기까지 한 그대가 짐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황후를 통해 적통 황손을 잇지 않겠다 누군가와 약조하였다. 그 약조를 위해 그대를 입궁시킨 것이다.”

예상하지 못하였으나, 들었을 때 확실히 납득이 가능한 대답이라 크게 놀랍지가 않았다. 황손을 잇지 않겠다 약조하였을 때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황제가 택한 것이다.

“……사내인 저를 황후로 책봉하시어 적통한 황손을 잇지 않겠다는 약조를 지키려 하셨군요. ……하온데 저는……,”

“황후가 되지 못하였지.”

황제의 조소가 걸린 얼굴이 이설에게 닿는다.

“그대를 직접 만나고 보니 황후 자리는 좀 아깝다 생각이 들었다.”

“…….”

“아쉬우냐?”

“아닙니다. 신첩, 소의의 자리도 과분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내 우물쭈물 대답을 고민하던 것과는 달리 아쉬우냐는 물음에는 망설임 없이 즉각 대답했다. 이설은 정말 제 자리에 아쉬움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황후든 비든 소의든 황제의 사람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생각한다.

황제는 이설의 대답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헛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았으나 황제는 다시 무표정이었다.

“그럼 황후의 자리가 탐나느냐?”

“탐나지 않습니다.”

“탐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마치 이설이 탐이 난다고 답하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가 위압적인 말투로 말했다. 황제의 말은 대체적으로 무덤덤하고 건조했는데, 이 말만은 감정이 실린 것처럼 무척 날카롭게 들려 이설이 짧게 숨을 참았다 뱉었다.

“짐과 약조를 한 자는 그대가 짐의 황후가 되길 바란다. 그대에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할 수도 있지.”

“…….”

“무엇을 한다 한들, 어리석은 짓이다. 그대는 그런 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다시 평이해진 말투로 황제가 말했다. 이만하면 이설도 황제의 의중을 알아들었다.

“……폐하의 말씀을 모두 알아들었습니다. 폐하께 누가 되지 않겠습니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입을 닫아라. 이 궁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라.”

“…….”

“그렇게만 목숨 보전한다면 십 년 안에 이 궁을 나가게 해 주겠다 약조하지.”

황제의 기세에 점점 아래로 기울어지던 고개가 위로 번쩍 올라섰다. 화들짝 놀란 얼굴이 정면으로 황제를 응시한다. 눈만 깜빡이는 이설이 그게 무슨 말씀이냐 묻지도 못하자 황제가 대답했다.

“짐이 천자에서 물러나면 그대는 자유다. 연국으로 돌아가도 좋다. 다시 혼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황궁에서 홀로 늙어 죽는 것보단 낫겠지.”

황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이설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황제의 후궁은 함부로 황궁을 떠날 수 없다. 연국을 떠나던 날 이설은 숨이 붙어 있는 한 다시는 이 고향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모든 미련을 버렸다. 다시 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황제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를 울려 혼란스러웠다. 황제의 말대로 두 번 다시 혼인을 치르지 못할 테지만 그 대신 지금과는 견줄 수도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제 고향 땅에서, 평생을.

꿈꿔 보지도 않았던 십 년 뒤의 일이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황제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약조를 거절할 수도 없고, 감사하다 예를 갖출 수도 없다. 이설의 복잡한 심정을 알 바 없는지 황제는 태연했다.

“짐의 약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진정 약조해 주시는 겁니까?”

“천자의 자리를 걸고 약조하지.”

힘주어 강조하는 그 목소리에 거짓은 없다 느껴졌다. 이설이 천천히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쉴 때에도 황제는 조용히 차만 음미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신첩 또한 폐하께서 천자에서 물러나시는 그날까지 누가 되지 않도록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설핏 굳은 얼굴을 하였으나 본래가 무표정에 무심한 인상이라 이설 눈에 크게 띄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대와 짐의 약조이니 다른 이에게는 함구하라.”

“예.”

“또한 앞으로 비은궁을 자주 찾을 것이다. 황후 자리는 비어 있으나 그대의 것이라 여기는 자들이 많은 게 좋지.”

“…….”

“허나 짐이 그대에게 연심을 가졌다는 소문을 귀담아듣지는 말라. 그대는 짐의 정인이 아니다.”

말끝이 날카로웠으나 이설은 개의치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황제에게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 같아 스스로가 가여운 마음이 들었지만 황제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니 원망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정말 황제의 정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은 금색 비단 끈을 묶은 황제의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설이 황제를 불렀다. 폐하. 다소 충동적인 호기심이 들었던 건 뭐에 홀린 듯 정신이 아득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가짜이나, 폐하께 새겨진 이름은 진짜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그 진짜 정인을……, 만나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설의 조심스러운 말에 황제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이설을 건방지다 생각하여 쳐다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설은 그 눈빛을 피하는 대신 느릿하게 눈꺼풀만 깜빡였다.

대답 없는 황제에게 송구하다 대답하려는 순간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을 전했으니 더 이상 이설에게 볼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설이 황제를 따라 일어났지만 황제는 바로 걸음을 옮기지 않고 이설에게 대답했다.

“정말 짐의 정인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짐의 이름을 가졌을 테고, 천지명관을 통해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

“짐의 정인은 없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가 걸음을 옮겼다. 딱 자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이설이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황제의 걸음에 예를 갖추었다. 황제가 스스로 내실 문을 열고 나서자 수많은 발소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다가 곧 멀어진다. 황제가 궁을 떠난 게 확실해지고서야 궁녀들이 내실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와 무슨 얘기를 나눴냐며 조잘조잘 묻는 목소리들이 주 상궁 일갈에 잠잠해졌다.

멍하니 서 있는 이설은 대답 없이 눈만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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