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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6)화 (16/300)

달의 황홀경

16화

황제의 따분하고 무료한 표정에 일순간 날카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뭐라 말하였느냐?”

“연국의 왕족 말입니다. 항아의 후예라는 증거가 그 머리카락인데, 그게 달빛을 받으면 아스름한 푸른빛으로 반짝인다 합니다.”

“…….”

“예, 폐하께서는 믿지 않으시겠죠. 믿으시라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연국 왕족에게 있어 머리카락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니 그것이 보기 싫다 하여 꼬투리를 잡으시면 안 된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차란은 황제를 공손한 말로 비난했다. 황제가 이설에게 머리카락으로 모욕과 수치심을 준 것을 보기라도 한 듯 황제의 그런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지, 황제가 노여워할 선을 넘지 않고 나긋나긋 읊조렸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쫓겨났을 차란의 존재를 완전히 지운 황제는 비스듬히 기울인 머리를 손으로 받치며 며칠 전날 밤을 떠올렸다.

잠이 오지 않아 녹염각의 금잔화 화전을 찾은 밤이었다. 그때 황제는 똑똑히 보았다. 은회색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이설이 달빛 아래에서 아스름히 빛나고 있던 것을.

잘못 보았다 생각해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자신이 왔다 고하려는 상궁의 입을 막고 멀리 어둠 속에 홀로 빛나고 있는 이설을 보다 황제는 깨달았다. 옆에 있던 궁인들 그 누구도 이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설은 어둠이 내려앉은 금잔화 밭에 서 있는 ‘무언가’였을 뿐, 빛으로 시선을 당기는 건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무언가를 열심히 따고 있는 어느 궁녀였다. 등불을 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오직 황제만이 이설을 보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밝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달빛처럼 고요히, 이설은 아스름하게 시린 빛을 내며 서 있었다. 차란이 말한 것처럼 비단 머리카락만 빛을 내던 게 아니다. 이설이 빛을 내는 것인지, 달빛이 이설에게만 모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황제가 봤을 때 이설은 그냥 빛나고 있었다. 망연히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뱃속에서 불씨가 켜지듯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 가슴에서 온몸으로 번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버렸다.

당연히 잘못 봤다 생각했다.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 한들 자신의 눈에만 띄었을 리도 없다. 은회색 머리카락만 보았을 때도 이미 알아차렸으나, 일부러 물어 그자가 이설이라는 걸 확인하였다. 그렇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면 자신이 본 게 사람이 아닐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설이 맞았다.

다음 날. 대전을 향하던 길에 탄영당에 이설이 있다는 말을 들어 일부러 걸음 하였다. 여전히 제 눈에 그렇게 보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전날 이설을 보며 들었던 몸의 열기도 느껴질지 궁금했다.

탄영당으로 들어선 순간 황제는 한눈에 이설을 찾아냈다. 그가 또 어제처럼 아스름히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꽃같이 화려하고 찬연한 후궁들 틈바구니에 있는 하얗고 마른 나뭇가지는 빛이 나지 않았고,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도리어 그 아름다운 것들 사이에 홀로 낀 초라한 사내가 형편없어 보여 주위의 눈을 무시하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장신구는커녕 입고 있는 옷은 한눈에 보아도 바느질이 엉성하고 황궁에서는 아무도 입지 않는 회백색의 질 나쁜 옷감이었다. 그마저도 찻물이라도 쏟았는지 얼룩이 지어 있었다.

초야만 가지 않았을 뿐 지아비로서 해야 할 일은 모두 했다. 패물도, 비단도 모두 분에 넘칠 만큼 주었다. 사가에서 가져오는 보옥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왕족 체면에 아들을 타국으로 혼례 보냈으니, 패물함이 가볍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놓고 저 꼴을 하고 다니다니. 황제인 자신의 체면은 뭐가 되느냔 말이다. 괄시받는다 여기저기 소문이라도 내고 싶은 건지. 옆에 있는 양 소원에게 비웃음을 사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 수치로 번질 때 황제는 실망으로 뒤돌아섰다.

“……어찌 네 얘기를 들어 보면, 네 놈도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는 듯하구나?”

차란이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황제가 가벼운 조소와 함께 물었다. 차란이 뭐 어떠냐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믿어 나쁠 게 뭐랍니까. 제 어머니가 달에서 온 항아의 후손이라니 좋지 않습니까. 그럼 저 역시 항아의 후손이니까요.”

“네 놈이 하다 하다 이제 조상까지 날조를 하는구나.”

“폐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짐짓 자랑스러운 듯 말하던 차란이 그새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가 황제 뒤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 족자를 번갈아 봤다.

“황제 폐하는 태양에서 갓 떨어져 나온 불꽃에서 태어나신 성천자 봉황의 자손이 아니십니까?”

“네 말대로 정말 내가 성천자 봉황의 자손이라면, 너는 어찌 내 앞에서 이리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황제의 느릿한 말에 차란은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황제인 이상 이길 수가 없다.

황제가 말이 없는 것을 보자 차란이 물러날 준비를 했다. 이설에게 정이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황제와 후궁의 일은 정분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황제는 똑똑하다. 설득하지 않아도, 무엇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지 알고 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은, 황제가 생각을 전환하여 다른 시각으로 상황을 볼 수 있게끔 때마다 언질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맡은 바 책무를 다했다.

황제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 중이었다. 해야 할 일을 끝낸 신하는 황제 곁에서 빨리 사라지는 게 신상에 좋다.

“폐하, 그럼 전 이만 광흥창 관리…….”

“비차란.”

무거운 목소리가 차란의 발목을 붙잡았다. 할 일이 많은데. 가라 할 땐 그리 가지도 않고 버티던 차란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예.”

“광흥창 일은 다른 이에게 맡겨라. 너는 나와 비은궁으로 간다.”

*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겐가?”

“예. 대신 반납 일자를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내 일각도 늦지 않게 가져다주겠네.”

황궁 서고 앞. 관리에게 몇 번이나 말을 묻던 이설이 환한 얼굴로 서고 안으로 들어섰다. 종이 냄새와 말린 가죽 냄새 등이 섞인 것이 결코 좋은 냄새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이설은 연신 밝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곳저곳 걸음을 옮겼다.

황궁 서고에라도 가 보시면 어떠하십니까?

같은 책을 이제 막 네 번째 반복해서 볼 참이던 이설에게 주 상궁이 물었다. 황궁이니 서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가 봐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던 이설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괜히 비은궁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신경 쓰였고, 행여 다른 후궁을 만나게 되는 상황도 원치 않았다. 탄영당에서 일이 있었던 일 이후로 양 소원은 두 번쯤 더 기별을 보냈으나 이설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이설은 그날 이후로 기연이 궁 밖에서 사 온 탕약을 매일 먹고 있었다.

서고가 무척 큽니다. 서책도 많고요.

고개를 젓는 이설에게 주 상궁이 말을 더했다. 들고 있던 서책의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고민하는데 주 상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추홍시대에 이름을 널리 알렸던 신의 가탁희가 집필한 연생약초도감과 고사독초도감도 전 권 모두 있습니다. 가탁희가 직접 집필한 원본 그대로라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설은 막 보기 시작하려던 서책의 책장을 미련 없이 닫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이설이 물었다. 그래서, 서고가 어디인가?

할 일이 많은 주 상궁 대신 이설을 서고로 안내 한 건 화홍, 뒤를 따르는 건 기연이었다. 성정이 불같은 화홍이 이미 기연과 몇 번이나 말싸움을 벌였다는 걸 아는 이설은 서고까지 걷는 내내 냉랭한 둘 사이를 오가며 말을 잇느라 애를 먹었다.

황궁의 서고는 무척 넓어 이설은 물론 서책 같은 것에 관심 없는 기연까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서책들도 무척 많은 데다 용이하게 정리되어 있어 원하는 서책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 서책도 보고 싶고, 저 서책도 보고 싶어 고민을 하는 이설에게 관리가 스윽 나타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렇게 읽고 싶은 서책이 많으면 가져가서 읽으면 되지 않겠느냐 물었다. 그 말에 이설이 신이 나서 품에 서책을 한가득 안고 관리 앞에 섰다.

“기한은 딱 이틀입니다. 근데 그동안 이 서책을 다 보시겠다고요?”

“이르면 내일 석반 전에라도 가져다주겠네.”

관리는 이설의 말을 못 믿는 눈치였으나 더 대꾸하지는 않았다. 이설이 가져온 서책의 제목들을 한참 동안 적고 나서야 이설에게 길게 말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틀 뒤 책을 가지고 오실 때 이 증서를 함께 가져오시면 됩니다. 이설은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서고를 나섰다.

“그리 기분이 좋으십니까?”

“그럼 좋고말고. 내 가탁희가 쓴 서책을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근데 그것을 원본으로 얻었지 않았느냐.”

“한 번에 너무 많은 서책을 빌리셨습니다. 또 밤새 한숨도 안 주무시고 서책만 들여다보시려 그러십니까?”

“잠도 자고, 끼니도 거르지 않을 테니 주 상궁에게는 괜한 소리 하지 말거라. 화홍이 너도, 알았느냐.”

“예, 마마.”

품에 서책 두 권을 끌어안고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나머지 책은 기연과 화홍이 나눠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모여 있던 궁녀들이 이설을 보고 수군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도 하지 않고 쌩하니 가 버렸지만 달리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화홍만이 눈을 부라리며 ‘저 잡년들이 감히!’ 하는 말로 울분을 터뜨리는 게 다였다.

제 궁으로 들어가기 전 담장을 둘러 본 이설의 얼굴에 미소가 더 깊게 팼다. 능소화 잎이 더 파릇파릇하게 살아나고 있다. 좋은 징조인 것 같아 마음이 좋아졌다.

기연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 그 뒤를 따라가려는데, 안에서 단향이 신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뒤에 있던 화홍이 큰소리를 내려던 찰나, 무언가를 발견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서책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다.

“마, 마마! 루 소의 마마! 폐, 폐하께서 지금 안에……!”

단향이 호들갑을 떨며 말해 주지 않아도 이설은 알았다. 제 궁의 앞뜰 풍경이 평소에 보던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네댓 명의 궁녀들이 모여 잡초를 뽑거나 나뭇가지를 치는 한가로운 곳에 이리 많은 궁인들이 서 있는 것을 처음 봤다. 씨앗을 심은 곳 위를 밟고 서 있는 것도 보았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설이 단향 따라 허둥지둥 궁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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