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5화
황제는 멀리 붉은색 천이 걸린 과녁을 향해 활을 들었다.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자 가슴이 넓게 벌어진다. 잠시 숨을 멈추고 조준을 한 뒤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놓았다. 넓게 포물선을 그린 화살이 과녁 정중앙에 정확히 꽂혔다.
옆에 서 있던 궁인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지만 황제는 화살이 꽂히기도 전에 활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섰다. 방금 쏜 화살이 과녁 정중앙에 꽂힌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차란의 얼굴에 박혔다. 차란은 늘 그렇듯 타격 없는 반응이었다.
“스무 발 중 세 발이나 놓치셨습니다. 심중에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폐하?”
언뜻 공손한 말투인 것 같기도 하지만 황제가 듣기에는 분명 시비였다. 땀을 닦아 주려는 궁녀를 물리고 수통만 건네받았다.
“과녁이 맘에 들지 않는다. 비차란 네 놈 모가지라도 걸어 놓으면 흥이 좀 나겠구나.”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몇 번이고 내놓겠습니다.”
“그 전에 네 놈 혀부터 잘라 버릴 것이다.”
빈 수통을 다시 궁녀에게 건넨 황제가 화살촉으로 차란의 입술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위협이나 다름없는 행동에 충분한 살기까지. 그래도 차란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미동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습사(習射:활쏘기 연습)를 마치고 환복하지 않은 채 황제는 곧장 의정전으로 향했다. 뒤를 바짝 따르는 윤 내관을 멀리 물리자 차란이 가까이 따라붙는다.
“내가 너와 나란히 걷고 싶어 윤 내관을 뒤로 물린 것 같으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추국의 수입 관세는 관례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서남 지방 성주들이 하는 말 따위에 귀 기울이지 말라.”
“루 소의 마마에 관한 일입니다.”
의정전에 막 들어선 황제가 걸음을 멈칫하며 차란을 곁눈질로 훑어봤다. 며칠 잠잠하더니 왜 또 그자 얘기를 꺼내는 건지. 한동안 잊고 지내던 얼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다.
비차란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며 다른 궁인들이 따라 들어올 수 없도록 의정전 문을 닫았다. 하는 짓이 고까우나 지적하지 않고 황제는 제좌에 앉았다. 고하라 한 적도 없는 차란이 멋대로 입을 놀려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정인이신 루 소의 마마를 박대한다는 소문이 황궁은 물론 수도 주안에까지 파다합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정인은 천명이 정해 준 것이나 폐하의 연정은 폐하의 것. 제가 감히 훈수를 둘 수는 없지요.”
“…….”
“허나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은 폐하의 쓸모 있는 패가 아닙니까. 박대하신다 소문나 봐야 폐하께 득 될 것이 없습니다.”
속내를 감추는 듯하다가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야 마는 차란은 태평한 얼굴이었다. 황제는 제좌 팔걸이에 조각된 봉안(鳳眼:봉황의 눈)에 손가락을 천천히 두드리며 차란의 말을 곱씹었다.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결론은 내릴 수 있다. 차란이 하는 말이 옳다. 이설이 짊어지게 만들 책임의 무게를 생각하면 제 태도가 냉랭하기는 했다. 소문이 빠른 황궁이니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자 또한 없을 것이다. 확실히 저에게 득이 될 일은 아니었다.
“당장 품계를 올려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그럴 성산(成算: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보이시면 됩니다.”
침묵이 길어지는 황제에게 차란이 이어 고했다.
“그럼 일단 손조익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폐하와의 약조를 먼저 깨뜨리는 게 될 테니까요.”
“내가 루 소의 그자를 황후로 맞지 않았기 때문에 약조는 이미 내가 먼저 깬 것이 됐다.”
“폐하의 약조는 황후를 통해 적통 황손을 잇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루 소의 마마를…… 그 수단으로 삼아서요.”
잠시 말을 멈췄던 차란이 내키지 않는 말투로 말을 끝냈다. 자신이 사용한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지. 루 소의를 수단으로 삼아 황후를 통해 황손을 잇지 않겠다 약조했던 건 황제의 말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본래 비차란이 인간적인 정이 넘치는 오지랖이 좀 있기는 하나 유독 이설에게는 그 정도가 심하다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생각났다.
“네 놈의 어머니가 연국 출신이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느냐?”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차란이 되물었다. 갑자기 다른 얘기를 꺼내는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묻는 말에 답하기나 하라.”
“예. 연국 선대 왕의 조카뻘쯤 되신다 들었습니다. 루 소의 마마와도 먼 사촌쯤 되실 겁니다.”
너무 멀어 촌수도 헤아리기 어렵겠지만요. 뒤이어 작은 말로 덧붙이는 얘기는 별로 상관없는 것이다.
“네 어머니도 머리카락이 그렇더냐?”
“그렇다는 게 어떻다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장절 하늘에 낀 먹구름처럼 흐릿한 회백색이냐 이 말이다.”
황제의 구체적인 설명에 상상이 제대로 된 차란이 기가 막힌 얼굴로 작게 코웃음을 쳤다.
“아닙니다. 지금이야 춘추가 드셔 희게 새셨지만, 이 전에는 확실히 흑색이셨습니다. 폐하께서도 몇 번 뵙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분명 비가랑 상단의 안주인은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제 것만큼 진한 흑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장절 먹구름에 비할 색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황제가 말이 없는 동안 무얼 고민하고 있는지 짐작한 차란이 말했다.
“연국 왕실 적통인 루 소의 마마와는 비교하실 수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왕족이라 하기에도 변변찮은 신분입니다. 그러니 일개 상단에 시집을 오신 거겠죠.”
“그럼 그자 말고 다른 적통들도 모두 그런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거냐?”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나 대부분 루 소의 마마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왕족 핏줄에 가까울수록 더 밝은 은회색이라고는 들었는데, 한 세대에 자손 수가 많지 않아 딱히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루 소의 그자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머리카락 색으로만 봤을 때는 지극히 평범한 연국 왕족이십니다.”
황제는 질문에 모든 대답을 듣고도 개운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단 말이지. 혼자 조용히 되뇌는 말은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진 것이 아니었지만 차란에게는 달랐다.
“근데 그건 어찌 물어보십니까?”
“…….”
“혹 루 소의 마마께 머리카락으로 꼬투리라도 잡은 건 아니시겠죠? 요전번 녹염각에 가셨다 만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갑자기 녹염각은 무슨 일로 가신 겁니까? 거기 만개한 꽃냄새를 질색하지 않으셨습니까?”
“시끄럽다. 지금 나를 문초라도 하는 것이냐?”
“갑자기 괜한 걸 물으시니 궁금하여 그럽니다. 흔한 안부조차 묻지 않으셨으니까요. 정말 녹염각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래서 탄영당에서 마마께 그리 모욕을 주신 겁니까?”
“녹염각도, 탄영당도 모두 네가 없던 자리였다. 도대체 네 놈은 귀를 어디까지 심어 둔 것이냐?”
어떻게 들어도 칭찬이 아니었는데. 기가 막혀 언성이 높아지는 황제에게 기죽기는커녕 차란이 흐뭇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제가 모르는 것은 없어야 한다 말씀하신 게 바로 폐하십니다.”
그래 분명 그리 말했다. 차란은 그 책무를 충실이 이행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황제가 차란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헌데, 정말 머리카락 얘기는 어찌 물어보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듣고 싶지 않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황제는 요즘 비차란이 광흥창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제 옆자리를 자주 비웠던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었는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차란은 말을 하는 데에 있어서 도무지 정도라는 것을 몰랐다.
“루 소의 마마께 머리카락에 대해 꼬투리를 잡으시면 안 됩니다.”
“나보고 지금 그자에게 말조심을 하란 거냐?”
“그저 유의하시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도 한번 말해 보아라. 그럴듯한 대답이라면 내 오늘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이렇게 협박을 해 봐도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흘린다. 정말 자신을 해할 거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인 걸까. 황제가 차란에게 목을 잘라 과녁으로 삼는다는 말을 하는 것은 기실 농이 맞았다. 하지만 쓸모없는 새끼손가락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 보기도 한다. 황제는 진심이었다.
“연국 왕족에게 머리카락은 그들이 선조의 땅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일종의 명패와 같습니다. 자신들이 그 선조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내내 웃음기 한번 없던 황제가 차란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란의 말도 우습고, 그걸 저리 진지하게 말하는 꼴도 우습기 짝이 없다.
“연국인의 선조라면 만설지에서 내려온 호설제 족이 아니냐? 야만족의 후손을 증명해야 할 정도로 그 머리카락이 소중한 것이란 말이냐? 게다가 그 만설지로 되돌아간다니.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만설지는 연국에서 더 위로 올라가 오악산을 넘으면 나오는 넓은 평원 지대다. 일 년 사계절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는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몇몇 야만족이 무리 지어 살기는 하지만 그들도 변방으로 쫓기다 보니 그렇게 된 신세일 뿐 일부러 그곳에 정착하여 사는 이는 없었다. 황제의 말대로 제정신이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황제의 코웃음에도 차란은 아직 제법 진지했다.
“그건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연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그자들이 생각하는 선조는 누구란 말이냐?”
“……상아, 라고 합니다.”
“…….”
“저희 금국에서는 보통 항아라고 알고 있는 달의 선녀입니다.”
황제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차란이 저를 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이가 없는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런 얘기를 왜 듣고 있어야 할까, 생각해 보니 쓸데없이 이설의 머리카락 얘기를 꺼내서인 것 같다.
빈도수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꺼림칙한 꿈을 꾸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고 있는 데다 이따금씩 조절이 안 되는 감정 기복 때문에 유난스럽게 짜증이 많아졌다는 걸 알고 있다. 인자한 성품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흉포하고 난폭한 성정 또한 아니다. 그저 모든 것에 무념한 게 전부인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물어 스스로를 이런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듣게 만들었을까.
결국 이 상황을 자초한 것은 자신이라 넘기며 차란에게 물러가라 말하려 하였다. 이번에도 불복한다면 차란은 정말 다리 한 짝이 부러질지도 모르는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황제가 막 흑영을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그 증거가 달빛을 받으면 빛나는 머리카락이랍니다.”